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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스〉(2024) - 한 편의 소설, 네 개의 비전. 한국영화의 자유를 꿈꾸며

씨네플레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닉이 입을 열었다,

“누구든 배신했던 모양이지. 그들 사이에선 그런 일로 사람들을 죽이거든.”

“난 이 동네를 떠나야겠어요.” 닉이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조지가 말했다.

“아저씨가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방 안에서 기다리는 걸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요. 몸서리나게 끔찍해요.”

"글쎄, 그 일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고.” 조지가 말했다.

- 어네스트 헤밍웨이 「살인자들」, 「헤밍웨이 단편선 1」, 민음사, P117

 

<더 킬러스>(2024)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 이 그림은 「살인자들」 말고도 또 다른 헤밍웨이의 단편인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에서 콘셉트를 공유해 만든 네 편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이다. 원작이 된 헤밍웨이의 소설은 싱거우리만치 단출하다. 시카고 외곽의 작은 마을 서밋의 어느 식당에 쌍둥이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살인청부업자가 도착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식사하러 오는 누군가를 처치하고자 하지만, 정작 표적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암살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극적인 사건의 발생과 전후의 배경, 인물의 심리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 없이 말과 행위만을 건조하게 기술하는 하드보일드 문체의 담담함에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두고 헤밍웨이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쓴 어떤 작품보다도 더 많은 것을 생략했을 것이다. 시카고에 대해 모두 빼버렸는데, 이는 2,951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작가로서 그는 단편의 제한 안에 모든 걸 눌러 담기보다는 도리어 비워버리고 은근한 암시만 드러날 뿐인 미설명 부분으로 남김으로써, 킬러의 배후에 무엇이 있을지, 표적이 된 전직복서에겐 무슨 사연이 있길래 숨어살게 되었는지에 관해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려 했던 것이다. <더 킬러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네 명의 감독, 김종관, 노덕, 장항준, 그리고 이명세는 이와 같은 원작 소설의 여백을 자유로운 창작을 위한 토대로 십분 활용한다.

<변신>과 <업자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무성영화>. 킬러의 출현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한 개의 실내 공간, 매 영화마다 평행우주의 존재들 마냥 위상을 달리하며 출현하는 배우 심은경(<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선 ‘선데이 서울’의 표지모델로 이스터에그처럼 등장)만을 공유할 뿐, 일말의 연속성도, 유기성도 띠지 않고 펼쳐지는 이상 네 편의 단편들. 일찍이 구로사와 아키라가 동료 감독인 고바야시 마사키, 이치카와 콘, 키노시타 케이스케와 손잡고 독립 프로덕션 ‘네 기사 모임’(四騎の會)를 출범시켜 저렴한 오락물에 치중하던 일본 내 대형영화사의 제약에서 벗어나 창작의 자유를 얻고자 했던 것처럼, 이명세 감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더 킬러스>는 감독의 비전을 존중하지 않고 다양성과 창작의 활력을 잃어버린, 시장 만능주의 일변도로 한참 망가져버린 한국영화 산업의 옥죄이는 현실에서 숨통을 트고 다른 가능성의 출구를 찾고자 한 결기의 시도이다.

(<더 킬러스> 이전에도 「살인자들」의 영화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편영화로는 버트 랭카스터와 에바 가드너 주연에 각색으로 존 휴스턴이 참여해 <말타의 매>(1941)와의 유사성이 여럿 드러나는 필름 느와르 <살인자들>(1946), B무비의 장인 돈 시겔의 <킬러>(1964)가 있었고, <노스탤지어>(1983)와 <희생>(1986)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역시 영화학교 재학 시절, 이 단편 소설을 움켜쥐고 단편영화를 찍은 바 있다. 여담으로 조성환의 <인져리 타임>, 윤유경의 <언 땅에 사과나무 심기>가 <더 킬러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함께 만들어졌지만 부산국제영화제와 극장에서 공개된 버전에선 포함되지 않았다. 부디 이 나머지 단편 둘도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더 킬러스〉  중 '변신'
〈더 킬러스〉  중 '변신'

 

김종관의 <변신>은 문자 그대로 감독 자신의 ‘변신’을 예감케 하는 실험작이다.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7), <아무도 없는 곳>(2021)을 보아왔던 관객이라면, 정적인 구도와 일상적인 공간 미장센 속에 인물을 배치하고는 대화중에 흐르는 미묘한 뉘앙스의 변화 통해, 마치 찻잔에 이는 작은 물결처럼 고요하지만 동시에 격렬하게 진동하는 감정의 드라마, 심리의 서스펜스를 추구해왔던 이제까지의 그의 작풍을 떠올리자면 이 단편은 대중영화로 본격적인 멜로드라마를 선택한 <조제>(2020)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금 당혹스럽게 다가올 법하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대화라는 화술의 근간은 살아남지만, 장르적으로 과장된 탐미적 미장센, 짧지만 직접적인 액션과 폭력의 연출, 만화적으로 양식화된 연기, 흡혈귀 장르에 늘 따르기 마련인 섹슈얼리티의 긴장과 감염의 모티브 등, 장르의 표준화된 관습과 스타일을 끌어들여 이식하려는 이 소품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것인지 모호해 단언하기 어렵지만, 이후에 있을 필모그래피의 작은 변곡점, 확장과 ‘변신’의 계기가 될 것임을 예감케 한다.

 

〈더 킬러스〉  중 '업자들'
〈더 킬러스〉  중 '업자들'

 

노덕의 <업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지는 일종의 연쇄반응에 관한 영화이다. 선정성에 눈이 먼 언론이 조작된 진실을 덮기 위해 더 큰 조작을 일삼게 되는 끝없는 악순환을 그렸던 <특종 : 량첸 살인기>(2015)에서처럼 한국사회의 부도덕한 측면을 조명하고 풍자하고자 하는, 리얼리스트의 시선과 지독하게 비틀린 블랙코미디의 기묘한 병치는 이 단편에서도 도저하게 나타난다. 의뢰인이 자신의 원수 이원수를 처리해주는 대가로 건넨 선금 3억 원이 윗선에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깎이고 깎여나가 말단에게 갈 때는 달랑 10만 원만 던져지는, ‘중간에서 떼어먹기’의 기막힌 연속. 굳이 말을 만들자면 ‘살인의 외주화’라고 해도 좋을 이 과정은 흥겹게 치고 달려가는 교차편집의 리듬감에 힘입어 유머러스하게 전달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패와 타락상에 대한 서늘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우화(寓話)가 된다. <더 킬러스>에 포함된 네 편 중 장편으로 확장해도 괜찮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하는, 흡입력 있는 구성이 돋보이는 단편. 선글라스를 낀 킬러 3인조와 중간에 변경된 살해 대상의 이름 이종세가 영락없는 이명세의 데뷔작 <개그맨>(1988)에 대한 존경과 애정 어린 오마주임은 덤이다.

 

〈더 킬러스〉  중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더 킬러스〉  중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살인자들」의 배경이었던 미국의 금주법 시대는 장항준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선 한국의 근현대사, 유신정권의 말엽으로 뒤바뀐다. 표적인 염상구(이 이름은 소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 중 염상진의 동생인 벌교의 깡패두목으로 나온 바 있다)가 예정된 시각인 자정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형사와 현상금 사냥꾼 둘, 가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살인청부업자가 부둣가 선술집에 한데 모이는데, 염상구의 실체를 모르기에 서로를 의심한다. <용문객잔>(1967)도 떠올리게 하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서스펜스는 <석양의 무법자>(1966)의 마지막 결투처럼 한껏 긴장감을 고조시킨 끝에 의외의 인물이 염상구였음이 밝혀지면서 일순간 휘몰아치다 멎어버리는 액션의 피바람으로 정리되고 만다. 얼핏 보면 첩보영화의 클라이맥스 한 시퀀스를 떼어다 놓은 것 같지만,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의 비밀은 시공간적 배경의 설정과 극 중 상황의 묘한 대비와 충돌에 있다. 무심코 넘기기 쉽지만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을 알리는데, 제막식이 있은 이날은 10월 26일이었고 박정희는 그날 밤 궁정동 안가에서 술을 마시다 피살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서 온 국민에게 통금을 강요하던 대통령이 피살당하던 날, 통금을 어기고 모여든 형사와 현상금 사냥꾼, 순경을 위장한 살인청부업자가 단 한 사람의 여성 암살자에게 몰살당한다는 상황의 대비는 통속적인 장르영화를 넘어선 정치적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더 킬러스〉  중 '무성영화'
〈더 킬러스〉  중 '무성영화'

<변신>과 <업자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가 장르의 틀에 걸쳐져있다면, 이명세의 <무성영화>는 형식미학적인 급진성을 추구한 가장 예외적인 성격의 작품이다. 감상자의 입장에서 주의할 것은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영화가 아닌 ‘효과’의 영화라는 점이다. 공간과 인물, 기본적인 줄거리는 「살인자들」을 충실하게 옮겼지만 <무성영화>에선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의 인상은 흐릿해지고, 오롯이 이미지의 선과 면,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 장면의 무브먼트에 반응하듯 맞춰지는 사운드에 의한 효과만이 관객의 뇌리를 채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경우처럼 관습화된 장르의 플롯을 따라가되, 현실의 배경에 특유의 양식미를 접목하며 어떤 균형점을 이루는 순간 이명세의 영화는 대중적인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감독의 관심은 정반대로 <형사 Duelist>(2005)와 <M>(2007)에서 그랬듯, 플롯은 이미지를 펼치기 위한 구실로서 앙상한 뼈대만을 유지할 뿐, 내러티브가 아닌 순수한 연출의 힘으로 영화의 의미에 닿고자 하는, 과감함을 넘어 무모하다 싶은 미학적 모험에 있다. 이는 단편 <그대 없이는 못살아>(2017) 이래 7년 만에 연출의 메가폰을 쥔 <무성영화>에서 더더욱 극단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일단 <무성영화>에는 이명세 영화의 오랜 팬이라면 반가워할 법한 순간들로 넘쳐난다. 프리즈 프레임과 분절된 슬로우 모션, 현수막을 달 위치를 두고 다투는 행동이 관객의 시점에서는 춤처럼 보이는 동작의 연출, 무대극처럼 과장된 연기와 말이라기보단 음향효과로 느껴지는 두 킬러의 대사 스타일, 화면에 직접 개입하는 만화의 말풍선과 분할 화면, 전격적인 이중노출과 디졸브의 활용 등, 상투성을 거부하고 가능한 모든 표현의 테크닉을 활용하고자 하는 연출 방식에서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와 <남자는 괴로워>(1995)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M>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제한된 식당 공간 안에서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무브먼트의 일대 소동을 벌이는 장면은 돈궤를 실은 수레가 엎어지면서 시장 바닥 한가운데서 럭비 경기 비슷한 혼돈의 난장판이 펼쳐지던 <형사 Duelist>를. 풍선이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김혜수 주연의 <첫 사랑>(1993)의 마지막에 실연한 영신이 홀로 남아 엎드려있는 동안, 주변 사물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원래는 우주까지 날려 보내는 걸로 만들 작정이었다는 감독의 변을 떠올리게 한다.

 

〈더 킬러스〉  중 '무성영화'
〈더 킬러스〉  중 '무성영화'

 

가상의 도시 디아스포라 시티의 존재를 알리는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열리는 오프닝에서 문자와 포개지는 창살의 수직적 이미지, 원형의 창문 두 개 너머로 나타나는 종세와 도석(이 이미지는 카세트테이프 구멍에 둘이 비치는 반사이미지로 다시 반복된다)을 포착하며 원을 그리는 카메라의 회전, 프레임 우측으로 질주하다가 시간을 갖고 놀 듯, 필름을 되감기한 듯 좌측으로 돌아가며 가상의 선을 그리는 수평적 이미지. 연속으로 제시되는 세 이미지의 연속은 충돌하는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를 원호의 이미지가 포섭하며, 이러한 이미지의 운동과 충돌이 한 화면 안에서나 장면과 장면의 연결을 통해 거듭되면서 관객에게 영영 잊히지 않을 인상을 준다던 에이젠슈테인의 이론, 즉 ‘어트랙션(attraction)의 몽타주’를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다. 맑게 개어 있던 하늘에는 곧 먹구름이 몰려오고, 폐쇄된 저택 제너두를 비추던 <시민 케인>(1941)의 도입부를 오마주한 출입금지 안내판과 철조망은 이윽고 두 명의 킬러 종세와 도석(소설의 엘과 맥스를 대신한 둘의 이름이 <개그맨>의 그것임은 물론이다)이 통과하는 계단과 난간, 이를 통과하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자로 이어지며 감옥의 창살처럼 어둡고 답답하며 갇혀있는, 탈출구가 없는 듯한 공간의 인상을 각인시킨다. 밝고 넓고 개방된 공간에서 어둡고 좁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는 이행의 양상. 그리고 빛과 어둠,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적 대비. 이명세 영화의 단골 공간이자 핵심 모티브라 할 계단과 창살이 조명의 이동과 변화에 겹치면서 인물의 운동 이미지가 분절되어 보이게 하는 연출은 정지된 필름 이미지의 연속인 활동사진의 속성에 영화적 활력의 본질이 있다는 감독의 철학을 드러내보인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뼈대만 남은 채 형해(形骸)화된, 맥거핀(MacGuffin)에 지나지 않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의 효과와 상징을 읽어내는 다른 방식의 ‘이미지-읽기’를 통해서야지만 그 윤곽을 더듬어볼 수 있게 된다. 식당주인 스마일(그가 입은 해골문양 셔츠는 <개그맨>의 문도석이 입은 하와이안 셔츠를 연상케 한다)과 대화하고 있는 동안 두 킬러 중 한 사람인 도석이 한 손에 풍선을 잡고 있는 모습은 앞서 풍선이 하늘 높이 날아가는 장면과 연결 지어 보게 된다. 원작 소설에서의 킬러가 시카고 갱단의 일원으로 추정된다면, <무성영화>의 두 킬러는 ‘새 지도자’와 ‘국민의 단합’을 운운하는 데서 박정희 사후 정권을 쥔 전두환 정권의 공안 관계자라 추정할 수 있다. 이때 맑은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이 이상 세계와 자유를 뜻한다면, 식당에 들이닥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종세와 도석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으로 표상되는 현실의 암울함을 은유한다. “이곳에 들어온 후론 언제가 낮이고 밤인지 알 수도 없고 빛을 누릴 자격을 영원히 상실한 줄 알았”던 스마일은 “여기 사람들은 구멍이라 하는” 칵테일 잔의 형상처럼 생긴 하늘이 비치는 창(窓)을 두고 “저에게는 영화관이지예“라 말한다.

다음으로 프레임 중앙에 놓인 선샤인의 얼굴이 이중노출을 통해 그늘진 창살이 겹쳐져 사방에서 포위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무성영화>의 메시지는 마침내 분명해진다. 이명세에게 있어 영화란 숨 막힐 듯 답답한 현실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창이자 출구, 상상의 이미지를 구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이상향이며, 시대배경 상 전두환 정권의 끄나풀일 터인 두 킬러는 영화라는 풍선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날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발목을 잡는 현실의 모든 제약을 상징한다. 어느 정도 논리를 비약이 허용된다면 천장에 매달려있는 풍선은 마음껏 하늘로 날아가는 창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붙잡혀있는 영화(인)의 처지이며, 오로지 식당 실내에만 갇혀 지낸 채 디아스포라 시티의 기념일을 맞아야 했던 1000일은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 영화계가 마비되다시피 한 타격을 입은 지난 3년의 시간에 대응된다고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등장인물의 이름 설정 역시 의미심장하다. 선샤인(빛), 보이스(소리), 스마일(연기)는 영화를 구성하는 3대 기본 요소라 할 것들이 아니던가? 피사체와 카메라 움직임, 영화적 테크닉의 혼연일체를 통해 시각적 어트랙션의 힘을 빚어내려는, 좁디좁은 실내 공간의 제약된 스케일 안에 모든 기교를 총동원해 때려 박다시피 한 영화적 서커스의 활력은 자신들을 인질로 붙잡는 킬러(어둠)에 맞서 싸우는 선샤인, 보이스, 스마일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영화 매체의 본질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창작에의 열정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현실에 대해 감독이 벌이는 고군분투(孤軍奮鬪)로 보일 지경이다. <개그맨>으로 데뷔할 시절에는 군사정권 치하의 억압적인 시대 분위기와 문학적 리얼리즘에 경도된 한국영화 비평의 고루한 관성이 양쪽에서 발목을 붙잡았다면, 현재는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예술’이라는 명제에서 ‘예술’의 측면은 저버리고 오로지 ‘산업’의 논리에만 치중해 영화의 미학과 형식에는 무지한 채 돈이 되는 작품만을 요구하고, 그래서 모델화된 서사와 묘사의 표준을 답습하며 갈수록 열화된 결과물만 내놓는 일그러진 영화산업의 지형이 감독에게서 운신(運身)할 자유를 빼앗는다.

 

〈더 킬러스〉에 참여한 네 감독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김종관, 노덕, 장항준, 이명세
〈더 킬러스〉에 참여한 네 감독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김종관, 노덕, 장항준, 이명세

 

그래서인가 <무성영화>의 클라이맥스는 <M>을 내놓은 이래 17년, 단편 <그대 없이는 못살아> 이래 7년을 억울하게 쉬어야 했던, 그래서 창작자로서는 사실상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나 다름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시간을 보냈을 이명세 감독의 개인적인 심경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절하고 비장하게 다가온다. 4인 4색의 다양한 방향성을 보이는 단편을 한데 묶은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의 마지막 방점을 <무성영화>가 찍는 건 다분히 선언적이다. 어쩌면 영화가 없어지는 건 아닌가라는 두려움,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 맞서, 그럼에도 영화를 사랑하고, 그러기에 멈추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며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나가겠다는, 영화에 대한 네 사람의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의 천명(闡明)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