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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에서 건진 영화들④] 패트리샤 마주이의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멜로드라마의 온기와 계급 현실의 냉기 사이

씨네플레이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나 <슬픔의 삼각형>(2022) 등에서 잘 드러나듯, 사회계급(Social class)의 문제는 현대 유럽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슈이다. 유럽 작가주의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계층 간의 갈등과 격차의 현실을 조명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한국영화인 <기생충>(2019)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광을 안고, 할리우드 영화인 <조커>(2019)가 마찬가지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영화에 담긴 주제의식이 오늘날의 유럽을 사는 사람들이 마주한 현실의 문제와 닿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칸영화제가 성매매 여성과 하층 노동자 계급의 삶을 그린 션 베이커의 <아노라>(2024)에 그랑프리를 안긴 걸로 더욱 결정적이게 되었다.

 

유럽사회에서 계급 불평등의 문제는 한국에서 통념적으로 떠올리는 양극화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일면이 있다. <더 스퀘어>(2017)에서 잘 드러나듯 빈부격차뿐 아니라 이민의 문제까지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는 20세기를 휩쓸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가 초래한 후유증이다. 대규모 이주의 형태로 본국에 끌어들인 식민지 인구는 하층 노동자 계급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옛 식민지 뿐 아니라 변방의 후발 개발도상국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값싸게 모집했다. 문제는 식민지 출신 내지 이민자(와 그 후예)들이 법적으로는 정당한 권리를 지닌 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음에도, 주류인 백인 사회는 과거 민족국가의 관성을 떨쳐내지 않고 그들을 동등한 자격의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나, 칸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논란이 된 비서구권 참석자에 대한 인종차별은 이러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새턴 볼링장〉
〈새턴 볼링장〉
〈새턴 볼링장〉
〈새턴 볼링장〉

 

 

<새턴 볼링장>(2022)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파트리샤 마주이의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2024)은 이러한 유럽의 분열적 현실을 바탕에 깔고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상류 부르주아 계급인 알마(이자벨 위페르)와 하층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미나(아프시아 에르지)라는 두 여성인데, 한쪽이 백인이고 다른 한쪽이 유색인종인 데서 영화의 인물 설정과 구도가 프랑스의 사회상을 십분 반영한 것임은 물론이다. 알마의 남편 크리스토퍼는 성공한 신경외과 의사이지만 음주운전 사고로, 미나의 남편 나세르는 보석강도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 있다.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일종의 광장 역할을 하는 공간이 감옥의 면회대기실이라는 건 실로 짓궂은 농담이 아닐 수 없는데, 이처럼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 이상 서로 생활영역이 겹칠 일이 없는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의 두 여성이 만나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교분을 나누는 상황은 연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교도소에 면회를 오는 일과를 중심으로 짜여진 알마와 미나의 일상은 감방이 아니다 뿐이지 각자의 남편이 저지른 죄에 매여 일상의 평화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감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알마의 화려한 저택은 넓은 부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방으로 분할된 내부 구조, 겹겹이 놓인 문과 높은 벽, 창살로 된 대문이 자아내는 폐쇄적인 공간감으로 인해 감옥의 인상을 자아낸다. 행정 오류로 인해 면회가 거부당해 난처한 지경에 처한 미나를 보고 연민을 느낀 알마는 그녀가 보르도에서 한참 거리가 떨어진 나르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서 출퇴근하듯 면회 올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저택에 초대해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머물도록 허락하고, 지역병원의 세탁소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만 같은 두 계급이 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일시적인 대안가족 관계가 형성되고 알마와 미나 둘 사이에는 친구로서의 우정이 싹트게 된다. 그리고 한 달 남짓한 동거의 기간 동안 빠르게 발전한 두 여인의 친밀한 관계는 곧 엄혹한 진실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처음에는 순조로워 보이지만 극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두 사람의 동거는 점차 봉합될 수 없는 균열을 드러내게 된다. 알마는 미나를 인도적으로 대하며 친구(그녀는 장난스럽게 자신을 미나의 ‘부르주아 친구’라 칭한다)로서 신뢰하지만, 미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부자를 악으로, 가난한 자를 선으로 그리곤 하던 고전적인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시대의 현실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기생충>에서 기택의 대사 한 소절을 빌리자면 알마의 관대한 성격은 “부자들이 원래 순진해. 꼬인 게 없고. 부잣집은 또 애들이 구김살이 없어”라는 말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은퇴한 발레리나 경력을 갖고 있고 의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등, 세상의 풍파를 겪지 않고 순조로운 삶을 살아온 그녀는 부를 세습하면서 잘 교육받은 부르주아 집안의 소양이 몸에 배어 매너가 좋고 젠틀한 반면, 험한 길거리에서 살아남은, 가난한 밑바닥 인생의 생존자인 미나는 남을 함부로 믿거나 의지하지 못하며 모종의 박탈감과 위화감을 품고 있다.

 

알마가 미나를 두고 너무 부정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대책 없는 낙천성에 대한 미나의 조용하면서도 미묘한 반응은 실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자식이 없고 수년간 혼자 저택에 남겨져 적적한 알마는 외로움을 달래줄 인간적인 동반자가 필요했으나, 반대로 미나 역시 내심 마냥 달갑기만 하진 않지만 부유한 알마의 자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감독은 여성들 사이에 진정한 애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지에 대한 미스터리의 여지를 남겨둔다. 서로의 삶에서 저마다 완전히 이해하고 인식할 수 없는 측면을 갖고 있는 인물 간의 관계가 머잖아 파열음을 내며 깨질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저택에서 열린 알마의 저녁 만찬 자리는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지인들끼리 담소하던 중 미나가 들어오자 알마의 부르주아 친구 중 한 사람인 변호사는 미나를 새로 온 가정부라 착각한다. 이때 만찬 자리에 있는 알마와 그녀의 친구들을 정반대 편 문가에 배치된 미나,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과 대조시키는, 불편한 공기가 감도는 숏 리버스 숏은 양측 사이에 가상의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넘어갈 수 없는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단번에 시각화하며 관계의 파탄을 예고한다. 남편들이 같은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처지의 유사성도 둘의 연대감을 지속시켜주기엔 턱없이 허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인에게 공평해야 할 법의 실상은 지위의 고하(高下), 신분의 귀천(貴賤)에 따라 관대함과 엄정함이 엇갈리는 것이어서, 알마의 남편은 음주운전으로 사람 한 명을 죽이고 다른 한 명은 불구로 만들었지만, 죗값이라 치기엔 턱없이 낮은 6년 형을 선고받은 반면, 미나의 남편은 그보다 훨씬 긴 형기를 감수해야 한다.

 

가난한 하층계급 출신으로 남편 탓에 범죄조직과 연루되어 있는 미나는 본의와는 달리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결국 알마의 재산인 미술품 컬렉션 중 한 점을 훔치는 공범이 된다.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했던 알마는 미나의 거짓말에 깊이 실망하고, 그동안 나누었던 우정이 겉모습이요 허상이었다는 자괴감에 휩싸인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미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긴 했지만, 그녀가 문을 나서자 알마는 크게 상심하며 가슴앓이를 하고, 미나 역시 관계의 종말을 안타까워하고 있음이 은연중에 감지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뒤이다. 마주이는 상반된 계급성을 지닌 두 여성 간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관대함과 신뢰의 인간적 미덕은 질곡의 현실 속에서 어디까지 유효할 수 있는지 한계를 탐구하면서, 순간순간의 진실된 감정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차원에서는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둘 사이에 패여 있음을 확인시킨다.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패트리샤 마주이 감독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패트리샤 마주이 감독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패트리샤 마주이 감독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 패트리샤 마주이 감독

 

그러나 영화가 오직 비관의 뉘앙스를 남기는 데서 그치는 건 아니다. 계급의 현실은 여전히 강고하고 바뀌지 않지만 마주이는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최소한의 낙관과 희망의 여지를 이 자본주의 시대의 동화 속에 남겨두고자 한다. 미나가 알마의 도움을 받은 것 못지않게 알마 역시 미나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옴으로써 얻은 것이 있다. 흔히들 부자는 자신이 가진 부에 힘입어 무한정의 자유를 누릴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이라기보단 소속된 계급에 따르는 의무에 가까운 남편과의 껍데기뿐인 관계,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단 전시공간이나 창고 같다는 인상을 주는 저택, 공간 곳곳에 놓인 그림들의 배치와 사이즈에서 드러나듯 가진 자는 (마치 <에비에이터>(2004)의 하워드 휴즈와 <올 더 머니>(2017)의 폴 게티가 그랬듯이) 도리어 자신이 가진 것의 거대함에 짓눌려 질식하고 허우적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죄수일지도 모른다. 그런 알마에게 미나의 개입은 물질과 계급의 감옥에 갇혀있던 삶에 작은 구멍을 내고 또 다른 자유의 길로 이끌어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부자의 자선이 빈자의 절박함에 한 줄기의 빛이 되어줄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종종 물질에 매몰된 삶이 갖는 위험성은 간과하곤 한다.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겨냥하고 지어진 것인 셈이다. <천국과 지옥>(1963)의 양극단으로 쪼개진 두 계급 사이에 가치의 상호 교환이 가능한 어떤 관계망을 만드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도식적인 계급 구도와 예측 가능한 서사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이 담고 있는 함의가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 조재휘 평론가의 ‘올해 부산에서 건진 영화들’ 연재는 아래 구로사와 기요시의 <클라우드>, 에릭 쿠의 <영혼의 여행>, 지아 장커의 <풍류일대>에 이어 네번째 영화 패트리샤 마주이의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으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