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란>에 대한 스포일러가 본문에 포함돼있음을 사전에 안내합니다.

거가(車駕)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姦民)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 사 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략)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전,란>(2024)은 임진왜란을 배경 삼지만, 그동안 좀처럼 다뤄지지 않았던 시대의 불편한 심연을 비춘다.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임진왜란 편>(1985~1986)이나 <명량>(2014)에서처럼 관민(官民)이 일치단결 합심해서 왜적을 물리친다는 식으로 전개되던 천편일률적인 민족주의 서사의 정념은 여기에선 흔적도 없이 증발해 남아있지 않다. 보통 붙여 쓰는 전란(戰亂)이라는 단어를 굳이 띄어서 나눈 건 실로 의미심장한 구석인데, 분명 영화는 전쟁의 와중에 뛰어든 인물의 싸움(戰)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당시 조선의 혼란한 사회상, ‘어지러움‘과 ’반역’의 뜻을 동시에 함축하는 글자 란(亂)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천영(강동원)은 의병의 일원으로 검을 휘두르지만, 정작 영화에서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그가 (의병장 김덕령에게서 직접적인 모티브를 따왔을) 김자령(진선규)의 휘하에서 벌였을 활약상은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 세세히 그려지진 않는다. 대신 <전,란>이 주목하는 건 조선왕조 내부의 모순과 불합리성이다. 영화는 오늘날에는 반역자가 아니라 당파싸움의 여파로 인해 날조된 모반 사건의 억울한 희생양이었다는 쪽으로 평가가 기울고 있는 정여립의 난(1589년)으로 막을 연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무예로 교분을 나누는 모임을 가졌던 그는 관아의 요청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대동계의 일원들을 이끌고 손죽도를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는 공을 세운 적도 있었지만, 관군의 포위에 저항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목에 칼을 꽂아 넣음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선조(차승원, 그의 분장은 <란>(1985)의 나카다이 타츠야를 닮아있어 광기 어린 노인의 인상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친히 정여립의 잔당을 심문하며 대동계가 추구했던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 이 세상에 딱히 정해진 주인은 없는 것)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 어느 누구든 임금으로 섬기지 못할 것이 없다)을 일일이 부정하고 임금의 체통을 잃은 채 광분한다. 붙잡힌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은 말을 할 수 없어 임금의 질문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이윽고 참수된다.(이 부분은 묘하게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완범(신하균)이 청각장애인으로 설정되었던 걸 떠올리게 한다.) 조선이 엄연한 계급사회였음을 천명하는 이 도입부는 영화의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극의 외양을 썼지만 <전,란>은 선조와 이종려(박정민)의 존재로 표상되는 신분제 사회의 정점을 차지하는 지배층인 왕실과 양반, 그리고 천영과 그의 의병 동지들로 대변되는 피지배 계급인 민중 간의 대립과 충돌,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계급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통 불가능과 단절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창(唱) 소리의 운율을 타고 두루마리 그림 펼치듯 치고 달려 나가는 초반부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폐단으로 양인의 자식이었던 어린 천영이 노비로 팔려가고, 양반 댁 가솔로 딸린 노비들이 노역과 학대에 시달리며 ‘짐승’만도 못한 처우를 받는 반면, 그들 희생의 대가로 안락을 누리는 양반층을 대비시키면서 양극화로 찢어진 사회의 폐단과 분열상을 압축해 제시한다. 본래 조정에 종사하는 관료층을 가리키던 양반은 상민 위의 지배계급으로 고착화되어 양천제는 반상제로 바뀌고, 노비의 신분은 대를 이어 세습되었으며 인권 수준은 턱없이 낮았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압제의 표면 아래 숨죽인 채로 쌓여가고 있던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부리던 노비들의 봉기로 이종려의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대서 시작해 불길에 휩싸인 경복궁에 이르기까지, 마치 번지는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며 정점에 달한다.

서두에 인용한 「선조수정실록」의 기사에서 ‘간악한 백성’(姦民)이라는 표현이 있던 걸 상기해보자. 이 대목은 사료(史料)를 남길 만한 학식을 갖추고 있던 조선사회의 엘리트인 양반 계층이 억눌려있던 민중의 절망과 분노를 이해할 혜안(慧眼)이 없었음을 역으로 반증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천영(강동원)과 이종려의 신분 관계를 넘어선 우정이 얄궂은 오해와 불신으로 인해 불구대천의 원수로 바뀌는, 마치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하는 장중한 고전적 구도에서, 전혀 민심(民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왕실의 안위와 위신만을 염려하며 무리한 공역(工役)을 강요하는 등, 소시오패스에 가깝게 묘사되는 선조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차원에서건 국가적 차원에서건 <전,란>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상황의 원천은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화해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영영 평행선만 그리며 계급 간 소통의 활로가 꽉 막혀버린 단절에 있다.

종국에 선조가 항왜(降倭 : 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인)가 된 킷카와 겐신(정성일)을 종려가 지휘하는 민란 토벌을 위한 토포사의 일원으로 배속시켜 자국민의 살해를 방조하는 데서, 영화는 백성의 안위에 대한 책임은 도외시한 채 권좌(權座)의 온전함에만 골몰하는 타락한 권력이 공동체에 얼마나 가공할 해악을 끼치는가를 섬뜩하게 내비친다.(이 부분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투항한 항왜 김충선의 일화와 후대의 일이지만 동학 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관군뿐 아니라 일본군까지 동원했던 고종의 경우에서 각각 모티브를 따와 뒤섞어 각색한 것으로 짐작된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민족(nation)을 단위로 한 하나의 국가 공동체에 속한다는 근대적 내셔널리티(nationality)는 왕토사상(王土思想), 즉 국가의 모든 것은 왕의 사유물(私有物)이라는 관념에 입각한 근세의 조선에선 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란>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경악스럽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임금은 궁궐 재건에 충당할 금은보화를 기대하지만 애써 찾은 궤짝에 담겨있던 건 보물이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도망한 지도자의 무책임과 무능이 초래한 국가적 재난의 증거가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전,란>은 <심야의 FM>(2010)을 연출했던 김상만 감독 본인의 색채보다는 각본을 쓴 박찬욱 감독의 과거작, 하층계급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연민과 합리화로만 일관하는 상위계급의 위선과 부조리를 냉소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복수는 나의 것>의 문제의식을 시대극의 무대로 옮겨 투영한 결과물에 가까워 보인다. 벼슬을 주고 면천시켜 보답해야 할 의병의 공적을 역적으로 몰아 저잣거리에 목을 매다는 식으로 갚는 몰염치한 군주 선조의 뻔뻔함은 물론이거니와 대리무과시험으로 장원급제를 따오면 면천시켜준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종려의 아버지는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송강호)이 물가에서 완범을 붙잡고 면전에 칼을 들이대며 “나,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하던 걸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기묘한 장단점은 박찬욱이 메가폰을 잡지 않았지만, 박찬욱의 이야기라는 데서 나온다. 촬영과 편집의 면면에서 드문드문 노출되는 형식적 만듦새의 허술하고 부족한 밀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앞에 벌어진 상황과 대사가 뒤에 반드시 뒤집힌 채 반복되는,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대위적 구조를 시종일관 팽팽히 유지하는 각본의 힘에 있다.

만약 종려의 일가족이 천영을 비롯한 종들을 ‘짐승’처럼 다루지 않고 사람으로 대했다면, 조선이 유학의 이상이라는 대동(大同: 너와 나의 구분이 없이 전체가 하나됨)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의 사회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순식간에 내부가 와해되고, 불과 한 달 만에 한양을 적에게 내어줄 만큼 허약하게 붕괴할 수 있었을까?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동족을 동족으로 보지 않고 ‘짐승’ 내지 ‘천것’으로 하대하는, 이와 같은 민족 개념의 부재는 따지고 보면 현대의 한국도 마찬가지라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허울에 지나지 않고, 계급의 구분과 차별, 그리고 소통불가능과 단절의 현실만이 놓여 있는 것 아닐까? 안에선 풍악과 잔치상, 밖은 굶어 죽은 시신이 나뒹굴며 기와집 담벼락의 경계 한 장 차이로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는 풍경이 갈수록 양극화가 가속화되며 공동체가 붕괴해가는 오늘날 세상의 풍경과 겹치는 역사적 대응물이자 메타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극이자 액션활극이라는 장르적 외양, 넷플릭스의 화제작이자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라는 화려한 선전의 이면에 모종의 작가의식, 과거를 재현하는 듯하나 실은 현대의 시대상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준엄한 비판의 목소리가 깃들어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