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사년을 앞두고 개봉하는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모티브로 한다. 배우 현빈이 일본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역을 맡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위압감에 여러 차례 캐스팅을 거절하고 출연을 결정한 후에도,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그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배우 현빈에게서 안중근과 만나고자 하는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시 종로구 모처에서 만난 현빈과 영화 <하얼빈>의 현장을 되짚어 보았다.
그간 영화 <영웅>(2022), <밀정>(2016), <암살> (2015) 등 안중근 의사나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꽤 나왔어요. 소재 자체가 그리 신선한 건 아닌데 그럼에도 영화 <하얼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존의 영화들과는 목적이나 방향성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어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치르는 과정 자체가 밑거름이 되는 이야기예요. ‘앞으로 남은 사람들 역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라서 선택을 하게 된 것도 있죠.
아무래도 ‘안중근 의사’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것 같아요. 그 부담감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극복 못했어요.(웃음) 지금은 <하얼빈> 촬영이 끝난 지 꽤 되었고 다른 작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얼빈>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다시 마음을 짓누르는 게 있네요. 안중근 장군이라는 분의 무게감이 너무 크다 보니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요. <하얼빈> 촬영할 당시에는 상상 이상이었어요. 크랭크 업(촬영 종료)을 하고 겨우 벗어날 수 있었어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데에 있어 더 신경 썼던 부분이 있었나요?
가장 어려웠던 건 이것이에요. 관객분들 각자의 머릿속에 ‘안중근’이라는 이미지 혹은 생각이 있잖아요. 이것을 너무 벗어나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완벽한 고증만을 따르는 것도 능사는 아니죠. 그 선을 찾는 게 배우한테는 굉장히 힘든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상상하고 생각했어요.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후 일본 내에서 엄청난 팬덤이 생기셨잖아요. <하얼빈> 출연을 결정하는 데에 일본 내의 인기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걱정되지는 않으셨어요?
주변에서 (걱정) 많았죠. 하지만 이런 가슴 아픈 역사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많이 보게 되면 사람들이 다시금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 역사를 모르는 분들도 알 수 있게 되고요. 여러 가지로 좋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가 시작하면서 광활한 얼음 호수가 화면을 가득 메우잖아요. 그 위를 안중근 의사가 홀로 걸어가는 장면이 정말 압도적이에요. 거기가 몽골의 홉스골 호수라고 하던데 실제 촬영하면서 어떠셨어요?
실제로 홉스골에 도착해서 풍광을 봤을 때 너무 놀랐어요. 아이맥스에서 봤을 때 그 모습이 잘 전달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실제로 그 얼음이 1m 넘게 얼어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현지 분들은 루트를 개척해서 차로 이동하시더라고요. 차로 이동해서 베이스캠프에 촬영 장비를 내리고 촬영할 때는 저 혼자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 얼음판 위에 서 있으면 되게 희한한 소리가 나거든요. 앞으로는 끝없는 빙판길이 보이고 멀리 산이 보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 독립군들은 정말 끝을 모르는 곳을 향해 한발 한 발 내딛고 있었구나. 얼마나 이 길이 외롭고 고독하고 추웠을까. 환경이 연기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이어서 신아산 전투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굉장히 고생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흙을 뒤집어써요. 당시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게 광주에서 찍었어요. 그때 광주에 몇십 년 만에 폭설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눈이 자주 안 오는 지역인데… (웃음) 촬영장에 진입하는 도로 제설 작업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제작진들이 많이 고생하셔서 루트를 개척하고 올라가서 촬영했죠. 저희 영화에 나오는 눈과 바람, 모든 자연 현상은 CG가 하나도 없어요. 눈이 다 실제로 왔고 눈이 오다가 그치면 눈을 기다렸어요.

신아산 전투의 액션은 전날 수정을 했어요. 액션팀에서 가져오신 액션이 ‘액션’ 같은 합이 있었는데 그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였으면 한 거죠. 그래서 전날 따로 모여서 리허설을 다시 했어요. 각자 캐릭터에 맞는 액션들로 수정도 하고 꽤 오래 찍었어요. 한 열흘 걸렸어요.
신아산 전투 장면을 촬영하다가 다치기도 하셨다고요.
제 부주의죠. 사람 한 명을 들어서 뒤로 넘기는 장면이 있었는데 허리에 무리가 좀 왔어요.

이창섭 역의 이동욱, 우덕순 역의 박정민, 김상현 역의 조우진, 공 부인 역의 전여빈 등 함께 거사를 치르는 독립군 역을 맡은 배우들과의 합은 어떠셨나요?
저희가 몽골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어요. 타지에서 우리끼리 모여서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면서 생각을 교류할 시간이 많았어요. 저는 저대로 안중근 장군에 대한 압박감을 가지고 갔는데 그들도 각자 자신의 것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각자 캐릭터를 위해서 때로는 고립하고 외로워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많이 의지했죠.
영화 <하얼빈>에서 또 중요한 캐릭터가 있다면, 이토 히로부미인데요. 일본의 대표 배우인 릴리 프랭키가 맡았어요. <하얼빈>에서 릴리 프랭키 배우의 연기를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되게 놀라웠던 점이 릴리 프랭키 배우가 찍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요. 기차 안. 그게 다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너무 놀라웠어요. 표현 방법이 다른 지점이 있는데 굉장히 편하면서도 힘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게 궁금해서 여쭤봤던 적도 있어요. 실제로도 너무 좋으신 분이에요. <하얼빈> 촬영 마치고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고 있어요.
얼마 전에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영화를 보셨는데 너무 좋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날 저희가 무대 인사를 돌았거든요. 그렇게 같이 해 주셔서 ‘만약 나중에 이 작품이 일본에 개봉하게 되면 그때는 내가 일본에 가서 무대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이하 <하얼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얼빈역에 도착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요. 그리고는 러시아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죠.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그 말에 큰 울림이 담겨있었는데요. 여러 차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배우님은 어떤 감정이었을지 궁금해요.
기차역에 공부인(전여빈)과 앉아서 넌지시 러시아어로 ‘대한독립만세’가 무엇이냐 물어보았을 때부터 감정이 시작돼요. 그리고 결국 소리를 지를 때, 최대한 많은 사람한테 이 소리가 전달되기를 바랐던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경찰들에게 잡히고 나서도 목이 갈라질 때까지 소리를 질렀던 건 저(안중근)의 얼굴보다도 그 소리 하나가 귀에 박혔으면 하는 바람이었어요.
안중근의 교수형신 역시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담백하게 지나갔어요. 그 장면의 경우에는 현빈 배우님의 표정이 잘 드러났는데요. 복잡미묘한 눈빛이 고스란히 담겼더라고요. 어떤 심경이었나요.
그 세트장이 엄청 높았어요. 뚜벅뚜벅 철판 위로 올라가는데 발자국 소리 자체만으로도 공포심이 생기더라고요. 두렵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어요. 아직 고난과 역경이 끝나지 않았는데… 나 아닌 누군가는 분명히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만 이 어려운 상황에서 쏙 빠진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마지막 안중근의 내레이션도 인상 깊어요. 현재 혼란스러운 시국에 놓인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될 만한 이야기잖아요.
그 내레이션이 감독님께서 조사하신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거라고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지금 시국이 이러하다 보니 남다르게 받아들이시는 거 같아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 앞으로도 분명히 어려움을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 생각해요. 그때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연기를 하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장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안중근 장군님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안중근 장군님은 듬직하거나 리더십이 있는 그러한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그 장면은 초라하고 두려움에 휩싸여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죠.
촬영장에 들어가서 그 공간에 오래 머물렀어요. 원래 그 공간에 의자가 있었어요. 그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거였는데 의자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고 싶더라고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주변이 계속해서 희생당하고 있는 거니까 어디론가 숨고 싶을 것 같았어요. 감독님이 흔쾌히 좋다고 해주셔서 그렇게 진행되었죠.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대단한 면모보다는 좌절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현빈 배우님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 같아요. 거의 20년 차 배우잖아요. 모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고 혹평을 받으면 상처를 받기도 할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최선을 다한다고 최고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늘 그런 생각으로 프로젝트에 임하고요. 결과가 좋지 않을지언정 제 끝이 여기는 아니니까 뭐라도 하나 발전된 것을 다음에 보여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계속하는 것 같아요.
혹시 안중근 장군을 연기하면서 그와 어떠한 접점을 찾으셨나요?
이게 안 되더라고요.(웃음) 이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이 끝나는 순간까지 매일 상상하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발톱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 나이대에 생각할 수 있는 범주도 아니고. 어찌 되었건 저는 표현을 해야 되니까 ‘흉내라도 내려고 애썼다’ 이 정도? (웃음)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30살이셨잖아요. 현빈 배우님의 30살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저는 그때 군대를 갔습니다. 시크릿 가든 끝나고 딱 입대를 할 무렵이어서… 아! 접점 있네요. 같은 군인이었네요. (웃음)

<하얼빈> 고사를 지내고 아이가 태어났어요. 촬영을 하면서 아빠가 되셨던 건데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도 했나요?(배우 현빈은 영화 <협상>,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함께한 배우 손예진과 2022년 3월 결혼했고 그해 11월 아들을 얻었다. 영화 <하얼빈>의 고사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그렇지는 않았어요. 만약 지금 촬영을 한다면 또 달랐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좀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저에게 맞닥뜨려진 얼마 안 된 일이라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어요. 일단 생각이 많이 달라졌죠. 그동안 제가 중심이 되어서 살았다면 지금은 다른 존재가 중심이 되어서 살고 있어요. 1순위가 바뀌었어요.
1순위가 아이가 된 건가요?
두 분(배우자, 아이)이 1순위죠.(웃음) 두 분이 공동 1등이고 제가 2등이고.
앞서 짧게 언급하셨지만 현재 시국이 위태롭다 보니 영화 <하얼빈>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동시에 여러 우려도 나오고 있어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남기를 바라시나요?
제 개인적인 바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닥치더라도 용기를 내고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다 보면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또 안중근 의사와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셨던 분들이 있다면 이 작품을 계기로 찾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해요. 지금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이 터전과 일상이 이분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2024년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올해 마무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현재 우민호 감독과 또 다른 작품을 촬영 중이라고요.(디즈니 플러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우민호 감독의 영화 <마약왕>의 스핀 오프로 현빈뿐 아니라 정우성, 원지안, 조여정 등이 출연한다.)
맞아요. 디즈니 플러스에서 내년에 공개될 <메이드 인 코리아>를 촬영 중이에요. <하얼빈>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여서 재미있게 촬영하고 있어요. 촬영이 없을 때는 <하얼빈> 무대인사를 다니고 있어요. 올해 그리고 1월 초중순까지는 <하얼빈>과 같이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