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민호 감독 영화에 ‘안중근’이라는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하얼빈> 직전 작품인 <남산의 부장들>(2020)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1979년 10.26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의거는 그로부터 정확하게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아마도 그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을까, <남산의 부장들>에는 “동상에 금이 가서 남산 안중근 동상 제막식을 연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 자신이 같은 날짜에 이토 히로부미처럼 죽게 될 것을 몰랐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안중근 장군을 존경한 건 맞다. 1979년 10월 26일이 되기 전인 9월 2일, 안중근 탄신 10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남산공원을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와 동격으로 성역화해 과거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이었던 남산 조선신궁 터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게 했던 것. 실제로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 의거 기념행사 때 제막식을 하기로 했지만, 바로 그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우민호 감독이 안중근 자서전을 읽은 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 「하얼빈」과 무관하게) <하얼빈> 영화화를 결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최초의 시나리오는 오락영화적인 성격이 강해서 시나리오의 톤앤매너를 완전히 바꿨다고 한다. 안중근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인물을 다루는 창작자로서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어쩌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는, 꽁꽁 얼어붙은 (영화에서 두만강으로 설정된) 몽골 홉스골 호수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안중근(현빈)의 모습이 <하얼빈>이 보여주고자 하는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른바 ‘영웅’으로 기억되는 인물의 고독 혹은 부활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하얼빈: 안중근 비긴즈’라는 부제를 붙여도 될 정도로 우민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별다른 서사의 곁가지를 덧붙이는 것보다, 안중근 장군의 떨리는 눈빛과 힘겨운 발걸음을 더욱 깊게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 태도 때문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하얼빈역에서의 의거 당시 안중근 장군이 비장하게 총을 쏘는 클로즈업 컷도 없고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컷도 없다. 지금껏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무수히 재현됐던 그 모든 장면들과 비교해도 가장 다르다. 가령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의거를 가장 역동적으로 잘 담아냈다고도 할 수 있는 ‘북한 블록버스터’, 즉 1979년 북한에서 만들어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는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다음 그의 가슴팍을 발로 밟고는 양손을 치켜올려 환호하는 통쾌한 컷이 있을 정도다. 당시 북한의 국민배우, 아니 인민배우로 칭송받던 리인문, 황영일 배우가 각각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처럼 <하얼빈>은 안중근 장군의 의거가 관객에게 약속한 거의 유일하고도 예상 가능한 클라이맥스의 희열을 비켜 간다. 그렇게 안중근 장군이 총을 쏜 다음, 단숨에 하늘로 올라간 카메라는 직부감으로 하얼빈역을 담아낸다. 이에 대해 우민호 감독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동시에, 함께 같은 목표를 꿈꿨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동지들의 시선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줬다가, 되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동료들을 잃고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안중근 장군은, ‘왜 돌아온 것이냐’는 동지들의 질타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돌아왔다”며 자신의 현재에 대해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동지들의 시선으로 거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독립군 내 가상의 인물 김상현(조우진)은 안중근이나 우덕순(박정민), 공부인(전여빈), 그리고 일본군 모리 다쓰오(박훈)와 비교해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한국영화계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 <내부자들>(2015)을 비롯해 마약에 찌든 보스를 연기한 <마약왕>(2018)에 이르기까지, 조우진은 우민호 감독의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왔다. ‘조우진 사용설명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민호 감독은 안중근과 모리 다쓰오 사이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어쩌면 관객의 자리에서 이 영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김상현 역을 조우진에게 맡긴 것이다. 특히 일본군에 잡혀 거의 벌거벗겨지다시피 롱테이크로 고문당하는 장면은, 온전한 정신의 개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처참한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쩌면 <하얼빈>은 “(독립군으로서)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다”던 김상현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 김상현이라는 인물의 변화 그 자체가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얼빈>을 이미지로 정리하자면, 얼어붙은 몽골 홉스골 호수를 걷는 안중근 장군의 모습 외에도 크게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있다. 안중근, 우덕순, 김상현, 공부인, 그렇게 네 사람이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는 뒷모습이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안중근이 빠지고 세 사람이 똑같은 구도로 다리를 건넌다. 별다른 말도 없다. 네 사람이 세 사람으로 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하얼빈>의 담담한 톤앤매너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랄까. 어쩌면 안중근 장군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네 사람이 세 사람으로 된 것일 뿐이고, 나의 빈자리는 관객인 당신이 채워주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머리에 맴도는 대사, 아니 영화에서 가장 반복으로 들려오는 대사는 바로 “안중근은 어디에 있나?”(안중근와 도코다)라는 모리 다쓰오의 대사다. 단지 안중근을 쫓는 일본군의 대사일 뿐인데, 박훈 배우가 인터뷰에서 얘기한 바에 따르면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마치 어느 순간부터 ‘당신 마음속에 안중근이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바뀌어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의 존재를 계속 지우려 하고 있다. 국가보훈부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에서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거사가 지워졌다. 우민호 감독은 개봉 이후 여러 관객과의 대화와 무대인사에서 “정부는 매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명을 선정해 왔는데, 광복 80주년인 올해는 인물 대신 역사적 사건 12개를 골랐고 하얼빈 의거를 비롯해 이봉창, 윤봉길, 홍범도 장군의 대표적 독립운동도 빠졌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고 꺼내고 있다.

영화의 분위기는 건조하고 차갑고 담담할지 몰라도, <하얼빈>의 안중근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개인적으로 <하얼빈>에서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라졌던 동지들이 뒤늦게 나타날 때마다 무조건 달려가 “몸은 어떻소, 힘들지 않았소”라며 껴안고 다독이며 걱정하는 안중근 장군의 뒷모습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만 나면, 마치 누구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본능적으로 튀어 나간다. 계속 동지를 기다렸고 살아있을 것이라 확신하지 않고서는 그런 반사적인 동작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안중근에 대해 내내 대립각을 세우던 이창섭(이동욱)은 동지들을 향해 그러지 못하고 의심부터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고결한 인간’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동지를 믿지 못하면 거사는 성공할 수 없소”라는 안중근 장군의 순수한 믿음과 인간애야말로 그를 가장 잘 보여준다.

<하얼빈>에는 실존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섞여 있다. 가상의 인물인 김상현은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고 있고, 실존 인물인 우덕순은 통역까지는 아니지만 꽤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하며, 실존 인물 최재형(유재명)과 가상의 인물 공부인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공부인이 독립군의 하얼빈 여정을 함께 하겠다고 주장하는 근거도 “여기서 나보다 더 러시아 말 잘하는 사람 있습니까?”였다. 반면 안중근은 일본어와 러시아어 모두 능숙하지 못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기차에서 꼬치꼬치 캐묻는 일본군에 의해 독립군임이 발각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렇고, 나중에 공부인에게 러시아어로 ‘대한 독립 만세’를 뭐라고 하는지 물어볼 때도 그렇고, 안중근이 일본어와 러시아어 둘 다 못 한다, 라는 것을 영화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하얼빈>이 얘기하는 안중근 장군의 가장 위대한 면모는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인’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당대의 유력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비교해 해외 유학 경험도 없고 가톨릭 신자이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것 외에는, 오직 한국에서만 독립군 활동을 했던 그가 만국공법에 따라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 포로를 풀어주려 하고, 하얼빈역의 러시아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라는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길 바라며, 옥중에서도 「동양평화론」이라는 책을 저술하고자 했던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당장 생계와 안위를 걱정하는 것도 벅찼을 그때 그 황폐한 시절, 그는 어떻게 시대를 앞서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상상했을까. 그렇게 그는 어떤 순간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고결한 인간이자 먼 미래의 대한민국을 내다보는 세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