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쓴다. ‘씨네플레이’는 ‘씨플 재개봉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봉하면 당장 보러 갈 영화, 실제로 재개봉하는 영화들을 소개해왔다. 이번에 만나볼 영화는 20년 전, 1998년 3월에 개봉한 <크래쉬>다.

크래쉬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제임스 스페이더, 홀리 헌터, 엘리어스 코티스, 데보라 웅거, 로잔나 아퀘트 개봉 1998년 3월 7일 상영시간 100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크래쉬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출연 제임스 스페이더, 홀리 헌터, 엘리어스 코티스

개봉 1996 캐나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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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섹스. 묘하게 자극적이다. 자동차 충돌과 섹스는 어떨까. 이 조합은 다소 어색하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는 자동차 사고와 섹스라니. 수리비나 보험 할증도 걱정이다. 어떻게 자동차 사고에서 어떻게 성적 쾌감을 연결할 수 있단 말인가.

제임스 발라드를 연기한 제임스 스페이더.

자동차 충돌로 성적 쾌감을 얻는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라면 말이 된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크래쉬>는 자동차를 타고 충돌하는 고통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의 ‘크래쉬’(충돌)는 비유가 아닌 실제 자동차 충돌을 의미한다.

<크래쉬>는 제임스 G. 발라드(극중 주인공과 이름이 같다)의 소설이 원작이다. 발라드는 <태양의 제국> <하이-라이즈>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작가 본인도 영화화는 어렵다고 했을 정도였던 <크래쉬>의 충격적인 욕망은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국내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크래쉬>는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애초 영화 관계자, 기자, 평론가에게 무삭제 상영을 약속했지만 10분 정도 삭제된 버전이 상영됐다. 영화제에서도 <크래쉬>의 파격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게 <크래쉬>는 첫 영화제의 뜨거운 감자가 돼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유명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2년이 지난 뒤 1998년 개봉 버전에도 2분가량이 잘려나갔다. 해외에서도 <크래쉬>의 욕망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국의 ‘데일리미러’는 상영을 금지해야 한다(Ban This Car Crash Sex Film)고 썼다.

헬렌 역의 홀리 헌터.

파격적인 장면의 연속
도대체 얼마나 파격적일까. <크래쉬>는 방송국 프로듀서 제임스 발라드(제임스 스페이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그는 아내 캐서린(데보라 웅거)의 불륜에서 성적 자극을 받는 인물이다. 어느 날 제임스는 운전 도중 의사 헬렌(홀리 헌터)의 차와 충돌하고 사고의 충격을 받은 헬렌을 보면서 성적 충동에 휩싸인다. 헬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두 사람은 사고 수습을 위해 만났다가 자동차에서 격한 섹스를 나눈다. 헬렌은 제임스를 더 극단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자동차 충돌을 통한 성적 에너지를 연구하는 집단의 리더 본(엘리어스 코티스)을 만난다.

자동차 사고의 흔적 역시 성적 자극의 요소다.
캐서린을 연기한 데보라 웅거.

기계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의 뒤틀린 욕망은 기계, 테크놀로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이 의미심장한다. 캐서린은 비행기 격납고에 있다. 비행기의 매끈한 표면에 자신의 가슴을 갖다댄다. 비행기라는 기계에 성적 욕구를 느끼는 페티시즘(fetishism)처럼 보인다. 자동차 역시 기계 장치다. 기계에 대한 욕구와 함께 고통 역시 성적 흥분을 자극시키는 요소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흉터, 다리 뼈가 부러진 환자가 사용하는 보조기구 등을 보며 제임스는 극도로 흥분한다. 세차장 장면이 압권이다. 제임스의 아내 캐서린은 본의 몸에 생긴 흉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본과 제임스 부부는 자동차 사고 현장을 둘러본다. 이후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캐서린과 본은 자동세차가 이뤄지는 동안 섹스를 하고 그 모습을 룸미러로 보는 제임스 역시 흥분한다. <크래쉬>는 이런 변태 성욕자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크래쉬>는 보면 볼수록 불편한 장면들이 가득한 영화다. 기계 페티시, 불륜, 동성애, 사도마조히즘을 넘나든다.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된다. 금지된 것을 보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니까 <크래쉬>는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헬리콥터, 비행기 등의 기계에 성욕을 느끼는 ‘메카노필리아’(Mechanophilia)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광범위한 인간의 모습을 다룬다. 때론 착한 인간 본성을 이야기할 때도 있고 때론 악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기도 한다. 성적 욕망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실험은 다소 극단적인 금기를 보여주지만 그것 역시 인간에 대한 탐구다. 어쩌면 그것이 예술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크로넨버그는 텔레비전과 몸을 합치는 영화 <비디오드롬>, 파리인간이 등장하는 <플라이> 등으로 자신만의 뒤틀린, 한마디로 변태스러운 세계를 구축한 바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수많은 논란을 만들어낸 <크래쉬>의 실험정신에 손을 들어줬다.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가장 위험하고 매혹적인 감독
영화주간지 ‘씨네21’이 펴낸 책 <씨네21 영화감독사전>에는 <크래쉬>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크래쉬>를 두고 ‘종교적인 걸작’이라고 평했다. 크로넨버그에 따르면 <크래쉬>의 등장인물은 모두 예수 같다. 거기에는 초월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것은 종교의 역할이다. 우린 우리 자신의 기원을 항상 넘어서려고 한다.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고 전환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거의 종교적인 과정이다.” 크로넨버그는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 자아가 뒤바뀌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인간다움의 가치를 관찰하고 있다. 크로넨버그는 금세기가 배출한 가장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감독 목록에 꼭 들어야 할 감독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크래쉬>를 통해 인간 본성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아주 몹쓸짓은 아니다. 단, 19세 미만은 절대 관람 금지.

덧. 국내에서 2006년 4월 개봉한 같은 제목의 영화 <크래쉬>도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각본을 쓴  폴 해기스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인종 갈등 문제를 다룬다. 200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크래쉬>의 작품상 수상은 아카데미 최악의 선택이라 불린다. 당시 작품상 후보는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 베넷 밀러 감독의 <카포티>, 조니 클루니의 연출작 <굿 나잇 앤 굿 럭> 등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작품상을 수상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크래쉬

감독 폴 해기스

출연 산드라 블록, 브렌든 프레이저, 돈 치들, 제니퍼 에스포지토, 맷 딜런, 라이언 필립, 테렌스 하워드, 탠디 뉴튼, 루다크리스, 라렌즈 테이트, 샤운 토웁, 마이클 페나

개봉 2004 독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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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