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시작으로 아카데미의 주요 지표로 여겨지는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을 휩쓸고 오는 3월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브루탈리스트>가 지난 12일 개봉했다. 영화는 나치가 폐쇄한 독일 예술학교 바우하우스 출신의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난민으로 전락한 뒤, 구원자처럼 다가온 미국 자본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유린당하며 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굴곡진 삶을 그린다. 한 예술가의 초상이자 모든 이민자의 이야기이기도 한 <브루탈리스트>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다. 3월 아카데미에서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남우주연상 수상을 점치며 영화에 대한 이모저모를 정리했다.
브루탈리즘으로 빗댄 미국 사회의 초상

브루탈리즘은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Béton brut)라는 어원이 말해주듯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기능성에 극도로 치중한 건축 방법론이다. 전후 복구가 과제였던 1950~70년에 유행한 실용적이고 합리적 건축 사조였지만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된 모습에 흉물스럽다는 비판도 따랐다. 예술적 경험과 이민자 경험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탐구하고자 했던 코베 감독은 브루탈리즘을 향한 엇갈린 당시 시선을 전후 유럽 이민자에 면한 미국 사회의 차별적 시선과 연결 지었다.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1950년대 브루탈리즘 건축물이 세워졌을 때 많은 사람이 즉시 철거하길 원했다”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움받기 쉬운 브루탈리즘 건축물이 이민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고 작품의 시작을 회고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50년대 이민자 경험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브루탈리즘과 이민자를 바라보는 경계의 시선은 동시대적이기도 한데, 도널드 트럼프는 1기 임기 말 “Make Federal Buildings Beautiful Again”(연방 건물을 (신고전주의 디자인으로) 다시 아름답게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브루탈리즘 건축양식을 노골적인 철거 표적으로 삼기도 했다. “추악하고 끔찍한 현대적 건물”을 모두 없애자는 발언은 이민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의 말과 다름없었고, 트럼프 시대의 경험은 감독을 <브루탈리스트>의 제작으로 이끌었다.
실화 같은 가상 인물

정교하게 구축된 한 건축가의 삶, 건축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 홀로코스트 등 극 전반에 녹아있는 역사의 상흔은 실존 인물의 연대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지만, 라즐로 토스는 브래디 코베 감독이 새롭게 창조해낸 건축가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헝가리 출신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가 미국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감독은 가상의 인물을 빚었다. 영화 주인공과 다르게 실제 마르셀 브로이어는 바우하우스 출신이라는 후광과 먼저 도착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덕분에 미국에서 쉽게 자리를 잡았다고. 영화는 자본을 틀어쥔 의뢰인의 구미에 맞춰야만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건축가로서의 숙명을 강조하기 위해 유럽에서 갖고 있던 라즐로의 명성이 단절되는 것으로 설정했다.
이례적인 인터미션

인터미션이 있는 것도 이례적이다. 영화는 라즐로가 미국에서 기회를 잡고 유럽에 있던 아내까지 데려오며 아메리칸드림에 한 발짝 다가가는 지점에서 15분간 정지한다. 영화제에서 선공개될 땐 없던 인터미션이 정식 개봉 후 생긴 것인데, 코베 감독은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3시간 30분 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힘들어 나도 인터미션이 필요했다. 관객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라즐로가 미국에서 서서히 건축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는 전반과 건축물을 만들어나가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갈등을 겪으며 피폐해져가는 후반으로 서사가 나뉘기에 다행히 흐름이 끊기진 않는다.
배우들의 열연! 애드리언 브로디 vs 가이 피어스

애드리언 브로디는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슈필만을 연기한 영화 <피아니스트>(2002)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연기를 <브루탈리스트>로 다시 썼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자신의 혈통과 능력에 의구심을 던지는 사회와 불화하는 문제적 인물을 연기한 브로디. 깡마른 얼굴에 얹어진 눈썹이 아래로 기울어질 때마다 깊은 연민이 인다. 실제 헝가리 난민의 아들로 자라기도 한 브로디는 “라즐로랑 비슷한 나이대의 내 할아버지 또한 라즐로처럼 평생 미국에서 헝가리 영어 억양으로 고통받았다”고 회고하며 “할아버지도 배우를 꿈꾸셨다. 조부모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고 밝혔다. 브로디는 유년기 기억과 이전 작품에서의 경험을 되살린 연기로 오스카 전초전으로 일컬어지는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피아니스트>로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기록(당시 29살)을 세운 그의 두 번째 수상 관측이 높은 이유다.
같은 영화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른, 미국 그 자체를 육화한 캐릭터 해리슨을 연기한 가이 피어스의 열연도 눈에 띈다. 가이 피어스가 “록펠러와 살리에리 중간쯤”이라 묘사한 해리슨은 라즐로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극찬하며 그를 후원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그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복잡한 인물이다. 최고급 대리석을 구하러 떠난 이탈리아에서 마침내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폭력으로 라즐로를 굴복시키는 해리슨의 얼굴에 엉켜드는 열등감과 오만함. 가이 피어스라 가능한 연기다.
AI로 보정한 배우 발음, 아카데미 수상 자격 두고 논란 일기도

영화를 둘러싼 논란도 일었다. 주연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와 아내 에르제벳 역할의 펠리티시 존스의 헝가리 억양이 섞인 영어 발음 일부를 AI로 보정한 것이 밝혀지며 아카데미상 수상 자격을 두고 정당성 논란이 제기된 것. 주연 애드리언 브로디는 “AI 사용은 전형적인 후반 작업이었다”며 “사람들의 작업을 뺏는 AI 기술은 구현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영화의 편집자인 다비드 얀초는 "영화에서 AI를 사용한 것은 이전에도 해왔던 일이다. 단지 프로세스를 더 빠르게 만든 것뿐이다. 예산과 시간 때문에 촬영하지 못했던 세부적인 부분을 AI로 구현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AI 기술을 통해 후반 작업의 속도를 높인 덕일까. 영화는 실제 할리우드 기존 영화들과 비교해 적은 예산인 1000만 달러(144억 원)로 제작됐다. 제작진은 건축 도면과 건물들을 제작하기 위해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