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말이 있다. 실전은 기세다. 때로는 그냥 뻔뻔하려고 하는 말처럼 쓰이지만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기세라 함은 “기운차게 뻗치는 모양이나 상태”이면서 “남에게 영향을 끼칠 기운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기세가 좋으면, 상대가 의구심을 가지기 전에 제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물길로 끌어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왜 갑자기 기세 타령이냐고? 일본을 휩쓸고 한국 정식 개봉을 앞둔 <사유리>를 만나고 왔기 때문이다. 오시키리 렌스케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시라이시 코지 감독이 연출한 <사유리>, 어떤 영화길래 기세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는지 그 후기를 전한다.

4월 16일 개봉하는 <사유리>는 지난 2024년 7월 열린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한국 관객들을 만난 바 있다. 당시 부천국제영화제에서 붙인 태그는 다음과 같다. #엑소시즘, #유령, #블랙코미디. 엑소시즘과 유령의 상관관계는 누가 봐도 빤하지만, 여기에 블랙코미디라니. 그동안 시라이시 코지 감독이 걸어온 ‘이종 장르’ 외길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분명 호러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코미디를 경유해 감동 드라마로 선회하는 <사유리>의 경로에서 말이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사유리와 가족의 모습을 잠시 비춘 <사유리>는 그로부터 10년 후, 그 집으로 이사 온 키미키 가족의 행복한 모습으로 영화를 연다. 치매 걸린 할머니와 다정한 할아버지, 언제나 유쾌한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 그리고 우애 좋은 삼남매. 좁은 빌라를 떠나 단독주택에 터를 잡은 이들에겐 이제 행복한 미래만 존재할 것 같다. 하지만 이내 맏이 케이코가 밤마다 기이한 현상을 겪고 할머니가 자꾸만 허공을 바라보며 화를 내는 등 불길한 기운이 키미키 가족을 감싼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유리>는 아주 통속적인 호러에서 그칠 것 같다. 귀신들린 집에 발을 들였다가 원혼에게 호되게 혼나는 인간들. 틀리진 않았다. 다만 만점 답안지는 아니고 부분 점수에 불과하다. <사유리>는 중반까지 최선을 다해 키미키 가족을 불행한 지경에 몰아넣었다가, 갑자기 드리프트를 한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할머니가 주도권을 잡는 순간 영화는 생명과 심장의 약동을 내세운 인간찬가로 돌변한다.

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은 관객의 보는 재미를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다만 이 이야기는 인간 찬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유리>의 이야기는 이미 중반 즈음에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거기서 멈춰 서지 않는 뿐이다. 할머니가 누차 강조하는 ‘생명력’을 <사유리>는 본인만의 화법으로 풀어낼 뿐이다. 절망하지 말고 웃어라, 불안해하지 말라,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라. <사유리>가 남기는 짙은 향은 바로 이 태도의 차이다. 호러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패배로 귀결한다면 <사유리>는 거기에 패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표상을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담아낼 뿐이다.
그래도 호러영화답게 공포의 수위도 충분하다. <사유리>는 키미키 가족이 이사 온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는데, 단순한 공포를 넘어 인물의 심리를 완전히 무너지게 하는 이 순간은 카메라가 끈덕지게 따라붙어 그 절망감을 절감케 한다. 흔히 말하는 ‘갑툭튀’ 점프 스케어에만 의존하지 않고 실제로 마주하면 오금이 저릴 만한 순간들을 나열해 심리적 압박감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오시키리 렌스케 작가의 상상력과 시라이시 코지 감독이 쌓아온 기발한 장면 연출들이 시너지를 발휘한다. 여기에 신선한 얼굴 미나미데 료카(노리오 역)와 콘도 하나(스미다 역)의 케미스트리, 베테랑 배우 네기시 토시에(할머니 역)의 박력 넘치는 연기가 쏠쏠한 재미를 더한다.



딱 한 가지 기우라면, <사유리>는 오컬트 위주의 J호러에 익숙한 관객이 보기엔 폭력의 묘사가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15세 관람가이므로 서구 고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 또한 암시돼 순수 오컬트를 기대한 관객에겐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그 점을 제외하면 호러로서도, 그리고 일본영화 특유의 자유분방한 매력을 담은 신작으로서도 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