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안에서도, 밖에서도 ‘믿고 보는’ 신뢰의 아이콘 유해진이 4월 16일 <야당>으로 돌아왔다. <야당>은 수사기관에 마약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야당’ 이강수(강하늘)와 그를 야당으로 만든 검사 구관희(유해진), 둘의 수사에 휘말린 형사 오상재(박해준)를 둘러싼 사건을 그린다. <파묘>로 또 한 번의 천만 달성 쾌거를 올린 유해진은 이번 영화에서도 날카로운 연기력으로 사건의 중심에서 대한민국 검사의 무지막지한 권력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구관희 캐릭터는 오랜만에 엘리트층에 속하는 인물이라 유해진의 폭넓은 연기력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그동안 유해진이 맡아왔던, 한국영화 속 캐릭터들을 모셔다가 그 계보를 한 번 정리해봤다. 각 계보별 대표 캐릭터만 다룰 예정이니 유해진의 최애캐가 있다면 댓글로 함께 남겨주시길.
'분위기메이커'파
고광렬, 초랭이, 철봉

이제는 신스틸러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예로부터 작품의 재미를 더하며 존재감을 남기는 조연들을 ‘감초’라고 불렀다. 그리고 유해진은 이 감초 배우 중 최고로 뽑아도 손색없다. 특히 그의 전매특허는 능청스럽게 유쾌한 말투와 행동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이끌어내 무거운 분위기가 거듭되는 영화에서조차 웃음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캐릭터 소화력은 <타짜>(2006) 고광렬에서 특히 만개했다. 고니(조승우)의 조력자로서 활약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박판의 날선 분위기를 풀어주며 상대를 방심케 하는 고도의 심리전까지 일품이다. 고니의 가족에서 돈을 가져다주는 장면의 연기가 애드리브인 것이 알려지면서 회자되기도. 고광렬 이후 최동훈 감독과는 <전우치>(2009)에서 한 번 더 호흡을 맞췄는데, 역시 한 번 말맛을 맞춰본 사이라 유해진은 최동훈의 대사를, 최동훈은 유해진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극대화한다. 아마 유해진의 연기 사상 가장 충격적 반전(!)을 가진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의 철봉도 빠질 수 없다. 영화를 안 봤어도 유해진의 “음~파! 음~파!” 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 많을 정도로 안 그래도 코믹한 영화에서 가장 웃긴 장면들을 연이어 만든다. 사실 웃긴 캐릭터로 보이나 이 등장인물 중 몇 안 되는 지식인 캐릭터라는 게 키포인트.
‘삭막’파
김덕천, 장석구, 용만

데뷔한지 20여 년. 유해진이 그저 감초 연기만 잘했다면 이렇게 롱런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해진은 늘 유쾌한 기존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복잡한 심리나 남모르게 잇속을 챙기는 복합적인 캐릭터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렇게 확실한 존재감을 남긴 캐릭터는 <이끼>(2010)의 김덕천이다. 천용덕(정재영)이 이끄는 마을의 일원으로 아버지의 사망을 쫓아 마을에 온 외지인 해국(박해일)이 마을의 비밀에 점점 가까이 오자 궁지에 몰린다. 이때 김덕천은 해국을 찾아와 일종의 자백을 하는데, 천용덕이 한 지시를 읊으며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그에게 학대당했던 기억에 벌벌 떠는 유해진의 연기는 관객들의 숨까지 멈추게 만든다. 현장에서도 단 2번의 촬영 만에 OK 사인을 받아 스태프들이 박수를 쳤다고. 이어지는 그의 악역 계보는 <부당거래>(2010) 장석구가 이어받는데, 류승완 감독의 말맛과 본인의 연기력으로 다소 능청스러워 보이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다. ‘조폭 출신’ 사업가답게 폭력에 거리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조폭 출신 ‘사업가‘답게 남몰래 계략을 세워 자신만의 잇속을 챙긴다. 경찰과 검사란 공권력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만의 생존전략이랄까. 아무래도 삭막보단 분위기메이커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의 출세작 <공공의 적>(2002)에서 맡은 용만도 나름 삭막한 캐릭터다. 줄곧 ‘칼잡이’ 외길 인생을 살아서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다. 다만 주인공 형사 강철중(설경구)이 막 다루고 본인도 전라도 사투리로 말도 안 되는 개그와 입담을 선보이기에 그 위압감이 도통 느껴지지 않을 뿐.
‘엘리트’파
장대석, 인조, 구관희, 최대웅

주변에 있을 법한 친근한 이미지가 핵심인 유해진이지만, 폭넓은 연기력은 이른바 ‘엘리트’계열의 캐릭터를 맡아도 손색없다. 데뷔 초만 해도 깡패나 범죄자 등의 캐릭터가 많았던 유해진이 활동 기간 동안 보여준 캐릭터의 스펙트럼은 연기력을 인정받은 척도이기도 하다. 이번 <야당>(2025)의 구관희 검사도 밑바닥에서부터 자신만의 능력(물론 야당 김강수의 도움이 크지만)으로 서울까지 올라온 캐릭터다. 그렇게 올라왔지만 여전히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를 꿈꾸는 야욕가이기도 하다. 유해진이 맡은 엘리트 캐릭터의 끝판왕이라면 <올빼미>(2022)의 인조가 아닐까 싶다. 아들 소현세자의 죽음에 분노하는 아버지인데, 위엄 있는 왕의 묵직한 카리스마와 심약한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친근한 이미지와 코믹한 연기가 먼저 떠오르는 배우였기에 ‘유해진이 왕을?’이라며 의구심을 가졌던 대중마저도 그의 연기력을 재차 확인한 영화였다. 어떻게 보면 엘리트란 단어와 거리가 좀 있어뵈지만 <소수의견>(2015)의 장대석도 변호사로 엘리트 캐릭터다. 처음엔 후배 변호사 윤진원(윤계상)과 티키타카를 보이며 다소 가벼운 듯 보이지만, 윤진원과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권력에 맞서며 활약한다. <베테랑>(2015)의 최대웅 상무도 재벌 집안 출신이란 빽이 있는 캐릭터이나 대기업 그룹의 상무이사란 점에선 엘리트 캐릭터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다.
‘보통사람’파
육갑, 황태술, 한병용, 김판수

그래도 돌고 돌아 배우 유해진의 가장 큰 장점은 보통사람을 연기할 때 빛을 발한다. 우리가 언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 친근한 모습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강인한 의지가, 특유의 정이 번뜩일 때 유해진은 관객들의 마음을 흔든다. 먼저 그의 천만영화 1번 타자 <왕의 남자>(2005) 육갑은 (비록 신분은 보통사람도 못 되는 천민이나) 유해진 캐릭터들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능청스럽게 심각한 분위기도 풀어주는 분위기메이커, 담대해보이지만 은근 소심한 성격에, 도움이 필요한 이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정에, 본인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의협심까지. 육갑, 칠복(정석용), 팔복(이승훈)은 <왕의 남자>의 화룡점정 그 자체다. 2017년 출연한 두 편의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에서 각각 황태술, 한병용 역으로 출연했는데 여기서도 정감 가는 보통사람이면서 불의에 참지 않고 대응하는 참된 시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두 인물이 한국 현대사 속 용맹했던 시민들을 상징하는 ‘완성형’ 캐릭터라면, <말모이>(2019)의 김판수는 ‘성장형’ 캐릭터여서 또 남다르다. 조선말의 중요성을 모르다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을 만나며 점점 나랏말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과정을 정감 가는 캐릭터를 통해 펼쳐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