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회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가 개막을 앞두고 있다. 여느 영화제든 개막이 가까워오면 어떤 작품이 초청되고, 어떤 영화인들이 방문하는지 눈길이 쏠리기 마련이다. 전주영화제에는 여기에 주목받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전주영화제에 장편영화를 선정해 제작 투자를 하는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이다. 이일하 감독의 신작 <호루몽>을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을 발굴하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간 고군분투한 전주시네마프로젝트와 <호루몽>을 함께 만나보자.
일본 사회를 흔든 자이니치 3세 <호루몽>

<호루몽>이란 제목은 언뜻 들으면 ‘호접몽’ 같은 철학적 논제를 다룰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단어의 실체는 훨씬 뼈아프다. 호루몽은 대창을 뜻하는데 일본어로 ‘버리는 것’에서 유래됐다.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을 이르는 일본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일본인이 버리는 부위 대창을 먹었기에, 호루몽이란 단어가 곧 자이니치를 상징하는 것이 됐다.
이렇게 일본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간 자이니치를 상징하는 단어를 설명한 <호루몽>은 곧이어 자이니치 3세 신숙옥을 소개한다. 신숙옥은 모델, 인재육성컨설턴트를 지나 현재 사회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호루몽>은 2017년, DHC 방송국과 신숙옥의 법적다툼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DHC방송국에서 방영한 ‘뉴스여자’라는 프로그램은 신숙옥이 자이니치이자 조선어 학교 출신이란 것을 중심으로 북한의 사주를 받아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을 여과 없이 방영한다. 신숙옥은 취재 요청 한 번 없이 일본 사회를 흔드는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다. 일본 사회의 극우세력이 그에게 발톱을 드러내고, 신숙옥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해외 이주까지 고려했지만 이내 당당하게 맞서기로 결심하고 DHC를 상대로 소송을 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중심으로 일본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혐오와 증오의 시선과 역사를 담는다. “하루라도 자살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며 깔깔 웃는 어머니 케이코의 얼굴에 이내 쏟아질듯한 눈물이 드리우듯, DHC에 맞선 신숙옥의 선택은 그저 그만의 선택이 아니고 약자를 이용해 사회적 주도권을 취하려는 이들을 향해 켜켜이 쌓인 분노나 다름없다. 그렇게 할머니 이백란, 어머니 케이코로부터 내려온 차별적 사건으로 지난 시대를 아우르는 한편, 미군 기지 반대 공약을 걸어 산케이 신문의 표적이 된 오키나와 시의원 등 동시대로까지 확장하는 시선이 99분에 응축됐다.

이일하 감독은 작중 제작진의 목소리 하나 넣지 않을 정도로 카메라 뒤에 바짝 물러나 있지만, 반대로 작품 전체에 세 여성의 무용 장면과 도쿄 타워 등 일본 사회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자이니치의 ‘넋’을 기억하고 기리려는 마음을 담는다. 카메라 밖 인물의 시선을 최대한 배제한 저널리즘의 태도와 그럼에도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녹여내려는 아티스트적 태도의 공존이 <호루몽>을 관통한다. 이일하 감독의 전작, 혐오 시위를 자행하는 극우 세력을 막는 전직 야쿠자 다카하시를 포착한 <카운터스>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을 보는 영화, 전주시네마프로젝트

혐오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커지고 있는 지금의 전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호루몽>은 전주영화제의 전주시네마프로젝트에서 완성됐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전주영화제가 2014년부터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저예산 장편영화 제작 활성화를 위해 영화제가 투자자로서 영화 제작에 관여한다. 밀레니엄 시대의 디지털 환경에 대비해 진행한 ‘디지털 삼인삼색’ 단편 제작 프로그램을 장편 제작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지금까지 38여 편을 공개했는데, 특히 2023년과 2024년은 베를린국제영화제 인카운터스 섹션에서 연이은 성과를 거뒀다. 2023년 <삼사라>가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고, 2024년 <다이렉트 액션>이 인카운터스 섹션 작품상과 심사위원 특별 언급 대상이 됐다. 이 같은 수상 결과는 단기간의 성과가 아닌, 전주시네마프로젝트가 그동안 지향해온 행보의 결과물이다.
전주영화제는 전주시네마프로젝트를 통해 세상과 유리된 채 영원불멸을 꿈꾸는 ‘예술’이 아닌, 동시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시네마를 제작했다. <우리손자 베스트>, <초행>, <국도극장>, <럭키, 아파트>처럼 한국 사회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의 한국영화와 <우아한 나체들>, <이사도라의 아이들>, <아웃사이드 노이즈>, <세 탐정>처럼 대담하게 동시대의 분위기를 간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해외영화가 공존하고 있다. 2024년까지 매해 3~4편가량을 공개한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올해 <호루몽> 한 편만 공개한다. <호루몽>의 알찬 완성도와 현 전주시네마프로젝트 흐름 안에서의 위치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발굴하려는 전주영화제의 의지가 앞으로도 지속되리란 것을 엿보기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