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사무실을 찾았다. 인터뷰 장소인 회의실은 조금 어수선했다. 책상 위에는 <변산> 시나리오, 캐릭터 관계도, 스태프 연락처 이외에 각종 회의 자료가 수북했다. ‘아, 여기서 <변산>이 탄생했구나’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준익 감독은 “회의했으면 좀 치우지”라고 어색함을 감추며 기자를 반겼다.
지난 5월24일 <변산>의 이준익 감독과 조금 아니 많이 이른 인터뷰를 했다. 7월 4일 개봉하는 <변산>을 보기 전이었고 ‘씨네플레이’ 기자는 시나리오만 읽은 상태였다. 이런 인터뷰가 재미있을까 싶었지만 기자는 이준익 감독과의 대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인터뷰는 무려 2시간 45분 동안 이어졌다. 여기 그 내용을 다 소개하지는 못히지만 <변산>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변산>은 발렛 파킹,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빡센’ 청춘을 보내며 <쇼 미 더 머니>에 6년 개근하며 열정을 불태우는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의 이야기다. 예선 탈락 위기에서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잊고 싶었던 고향 변산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짝사랑 선미(김고은) 등 옛 친구들과 만나면서 지우고 싶던 흑역사와 마주한다.
과거 영화주간지 <씨네21> 등의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이준익 감독을 두고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 또는 “그의 말은 농담 반, 진담 반인데 농담 속에 진담이 있고 진담 속에 농담이 있다”고 썼다. 아래의 긴 인터뷰는 거침 없고 꾸밈 없고 점잖은 체 하지 않는 이준익 감독의 성격에 맞게 그의 말투를 살렸다는 점을 밝힌다.
<변산>은 청춘영화? 음악영화?
-개봉까지 한달 반 정도 남은 것 같다. 지금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하다.
=후반작업 하고 있지. 후반작업은 1번 편집. 2번 녹음인데. 녹음의 단계가 여러 개가 있어. 후시녹음 AR(Aftre Recording), 각종 효과음을 만드는 폴리(Foley) 등등. 그 다음 단계는 음악 감독이랑 각 음악이 어디 어떻게 들어가는 선정하는 작업을 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파이널 믹싱이라고 해서 모든 소리를 믹싱하는 작업을 할 거야. 영화라는 것은 소리가 반, 그림이 반이니까. 그림을 만드는 촬영감독은 몇 달째 DI(Digital intermediate, 색보정)하고 있고. 동시진행하고 있지. 모든 영화가, 전 세계의 모든 영화가 똑같은 프로세스야.
-그럼 후반작업은 거의 끝난 거라고 보면 되나.
=그렇지, 파이널 믹싱. 그게 남은 거지.
-음악감독은 누군가.
=방준석 감독이라고. 나랑 지금 몇 작품이야? 대여섯 개 했나?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소원>, <박열>, <변산>.
-<변산>은 음악영화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청춘영화라고 해야 하나. <동주>, <박열>, <변산>까지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글쎄 뭐. 단정 짓는 것이 항상 더 큰 오류를 낳는 거니까. 음악영화라고 하기엔 드라마고. 청춘영화라고 하기엔 모든 세대가 다 나오는 거고.
-과거에 <라디오 스타>부터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까지 음악 3부작이 있었다.
=그 3편의 영화에서 누구는 직업적으로 음악을 했고, 누구는 필요에 의해서 음악을 했고, 누구는 하고 싶어서 음악을 했잖아. 주인공들의 욕망이 음악과 밀접하기 때문에 음악 3부작이라고 했는데 이번에 주인공이 래퍼다 보니까 음악영화라고도 할 수 있어. 어쨌든 최근에 <동주>, <박열>이 젊은 세대의 청춘이니까 연장선상에서 청춘 3부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작품수가 많다 보니까 찍어 붙이기가 좋은 거지 뭐. (웃음)
-그렇다면 청춘 얘기를 하고 싶어서 <변산>을 시작한 게 아닌가.
=그렇지. 청춘이 목표일 순 없지. 상업영화 시장 내에선 주된 관객이 청춘들이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보는 사회관? 가치관? 그런 것에 대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아. <동주> 같은 경우 일제강점기의 동주(강하늘)나 몽규(박정민)가 가졌던 가치관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거고. <박열>에서 박열(이제훈)하고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도 국적을 떠나서 그들이 유지해야 될 가치관을 보여준 거고. <변산>에서도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 자신의 인생을,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이런 것들의 가치관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거지. 그런데 사실은 청춘들에게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봐. 꼭 가치관이 있어야 해? 미래에 답이 필요하냐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거, 그런 가치관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상업주의야.
-시나리오를 보면 이 청춘들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가는 게 느껴지긴 한다. 특히 김고은이 연기하는 선미라는 캐릭터가 이 과정을 이끌고 있다.
=주인공을 통해서 이야기에 집중하는 하는 거니까 주인공 내면의 성장과정이 주제와 맞닿을 수밖에 없지. 학수의 내면 성장에 조력자가 있다, 그 조력자라는 것은 저 사람을 조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자각할 수 있게끔 자극을 주는 것이지.
-그런 면에서 <동주>, <박열>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다. 동주 옆에는 몽규가, 박열 옆에는 후미코가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단순화 하게 되더라고. 그 단순화는 관계성에서 푸는 게 설득력이 있는데.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 존재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존재증명 되는 거지. 동주와 몽규, 박열과 후미코는 적어도 70년 전, 90년 전 인물을 현대적 개념으로 해석했거나, 재구성한 이야기라면 <변산>은 현재에 상존하는 다양한 객체들의 한 부분을 조망한 거라고. 그런데 가치관에 답이 있겠어?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 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니까, <변산>은 좋은 질문을 위한 영화인 거지.
-랩 음악, <쇼 미 더 머니>에 꽂힌 이유가 궁금하다. 이 질문은 너무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아니야. 처음이야. 정식 인터뷰가 이번이 처음이잖아. (웃음) 현재성을 고민했지. 현재성은 세대별 개인별로 다 달라. 심지어 부부도 달라. <변산>의 주인공은 청춘인데 그 인물의 현재성이라는 건, 어떤 지점에서 다수에게 유사감정을 느낄 수 있느냐 거든. 특별한 개인의 경험을 깊숙하게 쫓아간다 그러면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가 되는 거지. <버닝> 같이.
-<버닝>도 말하자면 청춘영화인데.
=그렇지. <버닝>은 유사 감정이 아닌 특수 감정을 이야기 하는 건데… (<버닝> 관련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그래서 아까 물어본 게 뭐였지?
=<쇼 미 더 머니> 관련 질문이었다.
=아, <쇼 미 더 머니>. 청춘들의 유사감정을 대표하는 대량 소비 트렌드가 힙합이라고 본 거지. <쇼 미 더 머니>를 통한 힙합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핫한 최근 몇 년이지 않았나? 우리가 옛날에 록음악에 미쳤던 것처럼. 뭔가 자기들을 대변해주는 해소해주는 장르는 힙합이지.
-감독님도 힙합 음악 많이 듣나.
=많이는 안 듣지. (웃음) 음악은 다 좋아해. 좋아하는데 노래방에서 힙합 노래 부르고 랩하고 그러진 않지.
과거 이준익 스타일로 회귀?
-<변산>은 과거 이준익 스타일로 복귀하는 느낌이 있다. <동주>가 기존 스타일과 가장 달랐고 <박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등장했고 <변산>은 시나리오를 보면서 엄청 웃었다. <라디오 스타> 같은 감독 특유의 마이너한 감성, 변두리 정서, 촌스러움의 미학도 느껴졌다.
=그렇지. 의도된! 의도된 촌스러움의 미학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코미디, 장르로의 회귀라…. <황산벌>도 코미디였지만. 어쨌든 코미디성으로 조금씩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 같아. (2011년 이준익 감독의 트위터에서 시작된) 은퇴 소동 이후에 <소원>을 찍었는데 정말로 가슴 아픈 이야기여서 찍을 때도 고통스러웠어. 또 <사도>는 애비가 아들 죽인 이야기니까 얼마나 힘들겠어. <동주>는 또 청춘이 일본 놈한테 고문당하고 취조당하고 이런 건데 그걸 어떻게 즐겁게 찍겠어?
-<박열>은 통쾌한 느낌이 있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 <박열>을 더 통쾌하게 그렸지. 일부러 더! 만약 앞의 영화를 안 찍었으면 <박열>을 굉장히 진지한 분위기로 찍었겠지. 어쨌든 지난 작품들을 너무 진지하게 찍으니까 나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거 아냐? <변산>은 더 멀리 가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코미디로 가는 거고. (웃음)
-감독님의 전공 분야가 시대극 또는 코미디인 것 같다.
=그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지는 게 <왕의 남자>지.
-괜히 천만영화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변산>은 즐겁게 촬영했나.
=일부러. 일부러 더 즐겁게 찍으려고 한 거야. <변산> 같은 경우는 더더욱 즐거워야 되는 현장이었지.
-후반부에 슬픈 이야기도 있다. 그러면서 주인공 학수도 성장한다.
=슬픔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는 것의 문제야. 슬픔은 그냥 슬퍼버리면 가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슬픔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가치를 부여 받아야 해. 만약 슬픔이 아름답지 않다면 기쁨도 아름답지 않고 인류의 역사는 암울할 뿐이야. 가만 보면 모든 글쟁이들은 슬픔에 아름다움으로 가치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거야. 전 세계 모든 예술가나 창작가나 문학가는 다 슬픔을 아름답게 구현하려고 창작을 하는 거야.
-<변산>에서 그 슬픔의 아름다움이 구현됐나.
=그럼! 개과천선 했잖아! 개날라리가! (일동 웃음)
-그렇게 개날라리는 아닌 것 같았는데, 주인공 학수를 연기한 박정민이 직접 랩 가사를 썼다고 들었다. 박정민 배우가 글도 잘 쓰고 책도 내고 했으니까 잘 썼을 것 같다.
=내가 직접 쓰라고 그랬지. 그 가사는 정민이 말고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거야. 글을 잘 쓴다고 랩 가사를 다 잘 쓰는 건 아니잖아. 정민이가 학수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매 신마다 체험했잖아. 주인공으로서 체험한 감정의 찌꺼기를 글로 표현한 거지. 감정은 대신할 수 없어.
-감독이 그 감정을 대신할 수도 있지 않나.
=아니지. 내가 어떻게 대신해?
-전체 영화를 연출하니까?
=연출은 연출일 뿐이야. 배우는 감정의 주체이고 감독은 대상일 뿐인데 때로는 ‘오케이’를 하고 ‘NG’를 하는 권리를 부여받은 거지. 감독이 그 주체를 대신할 수 없지. 서로의 입장을 상호존중해야 배우는 배우대로 자신의 감정을 관객들과 2시간 동안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고.
-추측인데 학수의 랩 가사가 <동주>의 시 내레이션 같은 느낌인가.
=전혀 톤앤매너가 다르니까 그런 느낌은 못 느끼지. (웃음) 그런 연출 의도는 들키지 않으려고 하지. 나는 가장 좋은 연출은 들키지 않는 것이라고 봐. 들키는 연출이 가장 후진 연출이야.
-꼭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뭐, 연출론은 각자 다른 거지만. 나는 내 연출이 관객에게 들켰다 생각하면 그건 관객한테 진거라고 생각해. 절대 들키면 안 돼.
-그럼 평론가들이 감독님 영화를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걸 보면 어떤가.
=때로는 거기서 배우는 게 더 많아. 그래서 너무 고맙지. 내가 의도하지 못한 것까지 말해주니까. 왜냐면 의도를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가 않아요, 현장이. 그냥 눈앞에 있는 거를 메꿔나가기 바빠 죽겠는데. 그런데 그 바쁜 현장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데 그걸 평론가들이 어떤 거라고 규정해주면 난 ‘아휴, 감사합니다’ 하는 거지. (웃음)
-아무도 연출 의도를 모를 예술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은 없나. 감독님이 운영한 영화 제작·수입·배급사 ‘씨네월드’에서 예술영화 수입도 많이 했는데.
=(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의 컬트 영화) <성스러운 피> 수입한 사람이야, 내가. <헤드윅>, <메멘토>도 수입하고. (웃음) 이상한 놈이지. 그런데 예술영화 안 해.
-예술영화 보는 건 좋아하고 찍는 건 싫은 건가.
=그렇지. 힘들어. 너무 머리 아퍼. 난 영화를 즐기고 싶지. 예술영화 내가 뭐 하러 해. 아휴, 힘들어, 싫어, 피곤해.
-예술영화 수입하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렇지. 그런데 사업가 체질이 안 맞아. 빚만 100억 원 졌잖아. 그 빚 결국 다 메웠잖아, 창작으로. 난 예술가는 아니고 창작자이긴 해. 아티스트 아니고. 테크니션도 아냐. 크리에이터야, 그냥.
무단횡단 하며 쓰레기 줍는 사람
-이야기를 좀 바꿔보자. 부안군 특산품 가방이 뒤쪽에 보인다. <변산>을 촬영한 동네 얘기를 듣고 싶다.
=전라북도 부안에 인구가 정말 몇 명 없어. 한 군에 3만 명, 5만 명 이래요. 서울시내 한 구가 50만 명인데. 도시와 농촌의 인구격차가 어마어마한 거지. 심지어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대도시로 가버리고. 어린 아이와 노인만 남는 거지. 그래서 <변산>에서 고향을 버리고 떠난 젊은이가 고향에서 길을 찾다. 그게 이 영화의 이제… 의도된 메시지는 아니고. 의도치 않은! (웃음)
-촬영 협조는 잘 해줬을 것 같다.
=나에게 촬영 협조를 잘 해준다는 건 간섭하지 않는 거야. 한번은 부안군수가 ‘아니, 감독님. 밥 좀 사게 해 달라’ 그러더라고. 그것까지 거절하면 내가 너무 배타적인 것 같아서 밥은 먹었어.
-시나리오에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라는 학수가 쓴 시의 한 부분이 있다. 변산에서 기똥찬 노을이 담았나.
=어, 기똥찬 노을, 담았지! 영화에 어우~ 진짜. 영화 현장에 나가면 날씨의 돌발변수를 이겨낼 수 없거든. 우리가 촬영하는 그 날짜에 어떤 노을이 생길지 알 수 없어. 최소한 일주일, 넉넉잡아 한달은 줘야 베스트 컷을 찍는 거야. 그래서 크랭크인 할 때, (주로 배우 없는 장면을 촬영하는) B카메라한테 미션을 줬어. 노을 지는 4시 되면 한 팀이 나가서 계속 노을만 찍었지. 그런데 배우들과 함께 한 촬영 때 노을이 제일 예쁜 거야. CG 하나도 안 했어. 그냥 리얼로. 어마어마하지. 변산 지신이 도운거야, 해신이 도운 거야. 바닷가 언덕에 바람 정면으로 맞으면서 정민이랑 고은이랑 찍는데 그 긴 신을 한방에 오케이 했잖아. 배우의 의지와 카메라의 무서움이 만나면 초인적인 거지.
-아주 식상한 질문인데 박정민씨는 감독님의 페르소나 같은 느낌이다.
=아휴, 난 페르소나라는 말 정말 싫어해. 그렇게 따지면 내 페르소나가 한두 명이야. 진짜 페르소나는 정진영이지. 다섯 작품이나 했는데. 박중훈도 두 작품 했고, 최희서도 두 작품했고, 강하늘도 두 작품 했고. 박정민도 이제 두 작품 한 거야.
-아무래도 <동주>부터 <변산>까지 물려 있는 느낌이라서 그런 것 같다.
=물리는 느낌이 강하지. 그런데 <박열>에는 안 나와, 박정민이. <동주>, <박열>에 출연한 최희서가 물리니까 릴레이가 된 거지. 쇼트트랙 400m 릴레이처럼. (웃음)
-박정민 얘기만 했다. 김고은은 어떤 배우인가.
=김고은씨는 할머니랑 어린 시절을 보냈더라고. 할머니와 오랜 성장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굉장히 지혜로워. 그래서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균형 잡힌 인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지성미와 야성미가 잘 균형잡힌 배우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현혹되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굉장히 중심이 딱 잡힌 배우야.
-김고은이 연기한 선미라는 인물은 학수를 위해 희생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른 기자에게) 선미가 고전적인 여성 같아? 현대적인 여성 같아?
-고전적인 여성?
=이 고전적인 여성이 현대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아니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인간이 한 가지 방식으로 평생 살지 않아. 변한다고. 변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지, 돌멩이도 아니고. 변하는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희생적 캐릭터로서의) ‘선미성’이 있어, 없어? ‘선미성’이 있다는 거야. 고향 친구, 동창이기도 하지만 선미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학수의 시 때문이잖아. ‘내 고향은 폐향,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그 두 줄 짜리가 얼마나 멋있어. ‘별 헤는 밤’ 못지않아, 정말.
-그 문장은 누가 쓴 건가.
=그거 김세겸 작가가 쓴 거야. 그 문장 하나 때문에 이 영화를 한 거라고. 아무튼 선미한테 학수란 자신의 가치관에 엄청난 모티프를 제공한 존재야. 그러면 그 놈을 괜찮은 놈으로 기억했을 거 아냐. 그래서 선미가 자꾸 오랫만에 고향에 내려온 학수를 자극하지. 그런데 이 새끼가 끝까지 못 알아먹어. (웃음)
-‘선미성’이라는 게 여성주의쪽에서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있지. 시나리오만 보면 그런 의심이 들 수 있어.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아닐 거야. 여기 나오는 남자들이 너무 찌질해. 여자 캐릭터를 이 찌질한 놈들을 멋지게 하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썼다고 하면 욕 먹어도 싸지.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남자 새끼들을 보면 진짜 다 ‘아휴’ 이런다고.
-그러고 보니 <변산>에 제대로 된 남자가 없다.
=남자는 원래 그래. 그게 남성성의 본질이에요. 가부장제나 아버지 권력이 잘못된 사회를 형성한 게 있다면, 남자가 사회적 완성체로 소비해 온거야, 그동안. 그런데 그게 거짓말이었어. 그건 가짜야, 가짜 이미지. 본래 남자는 찌질한 존재야. 이게 진실이야.
-<변산>의 남자들이 찌질하면서 위악적인 것도 특징적이다.
=그렇지. 의도성이 있어.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다 위악적이라고. 곱게 나가는 말이 없어. 항상 삐딱하게 나가. 내면과 외면이 다른 인간의 속성이야.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이게 그거 아냐.
-감독님 영화의 인물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무단횡단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처럼.
=(박장대소) 야, 멋지다. 그 말이 맞네. 그 비유는 엄청난 메타포잖아. 무단횡단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꼭 내 얘길 하는 거 같네. 어떻게 생각을 했어?
-그런 얘기 많이들 하니까.
=그래? 무단횡단 안 하고 뒤에서 쓰레기 버리는 놈들도 많거든. 앞에서 남들이 보는 예의범절 지키고. 뒤에서 나쁜 짓은 엄청 많이 하는 나쁜 검사, 나쁜 기레기들 엄청 많잖아. 그런데 철가방 들고 오토바이 막 달리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런 애들. 그게 무단횡단하면서 쓰레기 줍는 애들이야. 그런 애들이 멋있지 않아?
20세기 인간, 21세기 ‘시대감성’을 쫓다
-과거 <씨네 21> 인터뷰를 찾아보니까 ‘집단보다는 개인의 가치,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나는 20세기 사람인데 21세기 유심칩을 꽂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려고 노력한 거지. 난 20세기 사람이지 전형적인. 세대가 그러니까. 20세기에 40년을 살았는데, 21세기에 불과 18년 산 거 아냐, 이제. 21세기 유심칩을 갈아 끼우지 않으면 영화 현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어.
-<변산>도 21세기 칩으로 연출한 건가.
=그렇지. 오죽하면 힙합이야? (웃음)
-이준익이라는 감독의 야심이 녹아 있는….
=야심은 없어. 난 야심가는 아냐.
-그렇다면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허겁지겁 쫓아가는.
-아티스트, 크리에이터 얘기를 앞에서 했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얘기를 해왔다. 시대정신이라고 할까.
=나도 모르게 시대극을 많이 찍었고. 시대극을 찍다보면 항상 시대정신에 대해 머물러 있어야 해. <황산벌>을 찍는다, 이러면 1300년 전 시대정신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거야. 또 <왕의 남자> 찍을 땐 또 500년 전의 연산군 시대정신에 있어야 하고. <사도>를 찍으려면 250년 전 상황을 알아야 하고. 그러니까 시대정신을 놓치는 순간 그 영화의 맥략을 놓치는 것과 똑같아. 그런데 이제 시대정신을 강조하면 꼰대 소리 듣는 거야. 시대감성으로 전환시켜 버리는 거지. 그래서 힙합이니 이딴 소리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시대에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면 그것 자체가 올드한 사람이야. 시대감성을 이야기해야지. ‘정신’이 ‘감성’으로 옷을 갈아입는 거야.
-이제 감독님을 중견이라고 말해도 되나.
=중견이지, 나이가 환갑인데. 좀 있으면 원로 되겠다. (웃음)
-그런 나이이지만 시대정신 아니고 시대감성을 잘 아는 감독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1년에 한 편씩 영화 찍으면 가능해. ‘은퇴’ 기간 2년 빼고는 계속 영화를 찍었지. <황산벌> 이후부터 계속 일년에 하나씩.
-워커홀릭인가.
=아니지, 워커 ‘홀릭’이 아니지. 워커 ‘엔조이’지. (웃음)
-그럼 이미 다음 영화도 진행중인가.
=시나리오 초고 다 썼어. 이제 고쳐야지.
-어떤 영화인지…?
=비밀이지. 영업비밀.
-그러면 시대정신인지 시대감성만 알려주면 안 될까.
=아이, 그런 거 묻지 마. 차기작 얘기는 그냥 어제 시나리오 초고 썼다. 엎어질지 모른다, 이거지 뭐.
글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 김명재 인턴 기자
사진 씨네21 최성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