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윈스턴과 여동생 에블린은 히어로를 대신해 히어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두고 대립한다. 스크린 슬레이버는 <아이언맨3>(2013)의 만다린(벤 킹슬리)처럼 실체 없는 아이콘에 불과하다. 스크린 슬레이버는 이름 그대로 미디어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구현한, 일종의 이미지다. 영화는 대중의 맹목을 신랄하게 매도하진 않는다. 집중하는 건 이를 각자의 목적에 따라 활용하고자 하는 남매의 대립이다. 히어로를, 혹은 히어로에게 자신을 맡기는 대중을 혐오하는 에블린 데버는 히어로에게 오명을 씌워 그들의 존재를 영구히 불법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윈스턴 데버는 히어로의 낭만을 믿는다. 그가 범죄자에게 양친을 잃고 유산을 상속받은 설정은 ‘배트맨’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만약 브루스 웨인이 어둠의 자경단이 되지 않고 CEO로 성장했다면 윈스턴 데버가 되었을 것이다. 1편의 빌런 신드롬이 <슈퍼맨>의 숙적 렉스 루터의 변주였다면 2편의 스크린 슬레이버는 시스템의 통제와 치외법권의 힘을 명제로 놓고 배트맨을 변주한다. 배트맨의 선한 의지를 이어받은 게 윈스턴이라면 어두운 수행 방식을 이어받은 게 에블린인 셈이다.
빌런(들)이 히어로의 정체성에 대해 숙고한다면 그 시간에 히어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크레더블 가족이 매진하는 건 성역할의 전환과 그에 따른 잔재미다. <인크레더블2>에선 인크레더블은 육아와 가사를 맡고 일라스티걸이 히어로 활동의 전면에 나선다. 이건 사실 남녀 문제라기보단 히어로 이미지 개선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며 히어로의 개성에 따른 결과다. 애초에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인크레더블의 활동은 파괴 행위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육아와 가정을 돌보는 인크레더블과 외부활동을 하는 일라스티걸의 활약은 양성평등을 외치는 시대 분위기에 부합한다.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픽사가 늘 해오던 접근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냐면, 그렇지 않다. 반대로 강화한 뒤 팔아먹는 쪽에 가깝다. <인크레더블2>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당연히 히어로와 빌런의 대립이다. 히어로 합법화를 위해 일라스티걸은 바깥에서, 인크레더블은 가정에서 고군분투한다. 스크린 슬레이버와 히어로들의 대결 역시 이 대립의 연장에 있다. 하지만 진짜 예리하게 각을 세우는 건 실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 세계의 충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