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은 태어날 때부터 걸작이 아니었다. 하나의 영화에 제각각의 평가가 쏟아지는 것처럼, 당대의 시선으로는 범작, 졸작, 망작이었다가 시간이 흘러흘러 다시금 재평가된 영화들이 많다. 누구나 다 인정할만한 걸작들이 한때는 평가절하됐던 안타까운 흑역사를 모아봤다. 저명한 걸작들이 남긴 비운의 역사는 이 영화들을 꼭 봐야 할 영화로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탐욕>
Greed, 1924

<탐욕>은 복권에 당첨된 치과의사가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주며 배금주의를 겨냥했던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탐욕>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찬탄했다. 무성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탐욕>은 본래 러닝타임이 장장 9시간에 달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온전한 감독판을 우리는 영영 볼 수 없다. 감독의 의사결정에 우호적이던 골드윈에서 상업영화를 원하는 MGM으로 제작사가 바뀌면서 가위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2시간 20분짜리의 축약된 버전으로 개봉돼 관객들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당연히 망했다. 다행히도 1950년대 들어 영화의 강렬함과 불온한 에너지로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폐기된 필름을 살려낼 순 없었다. 사라진 원본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탐욕>은 더욱더 불후의 걸작으로 남았다.

탐욕

감독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출연 깁슨 고우랜드, 자수 피츠, 진 허숄트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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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많은 영화감독이 <시민 케인>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그만큼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시민 케인>이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영화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오손 웰스)은 시대를 풍미한 언론계 유명인사다. 항간에 이 주인공이 당대 언론계의 큰손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모델로 삼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허스트 그룹은 <시민 케인>에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했다. 악의적인 기사를 내보내거나 영화사와 극장주를 협박하는 식이었다. <시민 케인>은 그 여파로 개봉 당시 빛을 보지 못했고, 수년이 지나 프랑스의 비평가들에 의해 새 시대를 연 영화로 평가받는다. <시민 케인>은 오슨 웰스가 고작 25세에 제작, 감독, 각본, 주연을 겸했던 작품이다.

시민 케인

감독 오손 웰즈

출연 오손 웰즈, 도로시 코민고어, 조셉 거튼, 아그네스 무어헤드, 루스 워릭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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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
<현기증>
Vertigo, 1958

<현기증>은 2012년, 영국영화협회가 펴내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선정한 올 타임 베스트 영화의 1위 자리에 있던 <시민 케인> 50년 만에 2위로 끌어내린 주인공이다.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은 당대 제일 가는 상업영화감독이었다. 그런 히치콕에게 <현기증>히치콕의 흑역사라고 기록될만한 실패를 안겨준 영화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느린 전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 영화로 실패의 쓴맛을 경험한 히치콕은 이후 다른 작품을 만들면서도 <현기증>처럼 망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했다고. 히치콕은 현기증을 느끼는 상태를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줌 아웃 트랙인’(Zoom-Out, Track-In) 기법을 고안했다. 줌을 늘려 피사체를 멀게 만드는 동시에 카메라를 전진시키는 방식으로, 인물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배경만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다. 이 기법은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기증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제임스 스튜어트, 킴 노박

개봉 195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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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

원시시대에서 시작해 미래까지. 인류의 역사를 네 개의 챕터로 집약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범접할 수 없는 SF계의 철학적 고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로 이루어진 영화는 대사도 극히 적었다. 그 때문인지 평론가들은 ‘예술가인척하는 영화라는 비아냥도 쏟아 냈다. 일각에서는 컬트적 인기를 끌었던 반면 평단에서 명작이냐, 졸작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이룩한 영화 역사의 기념비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되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케어 둘리, 게리 록우드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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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셔먼
<록키 호러 픽쳐 쇼>
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1975

기이하고, 난잡하며, 화려하다. 컬트영화의 대명사가 된 <록키 호러 픽쳐 쇼>컬트라는 용어에서 짐작하듯 그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전개와 비주얼로 소수에게 열광 받은 영화였다. 동성애와 양성애, 폭력과 살인 등 관습을 깨부수는 요소들이 융합된 이 영화는 개봉 초기에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아 2주 만에 상영이 중단됐다. 이후 변두리 극장에서 심야에나 상영됐던 <록키 호러 픽쳐 쇼>에 일부 관객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상황은 반전됐는데. 어떤 관객들은 코스튬을 장착하고 극장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상영관은 점차 늘어갔으며 이 역주행은 3억 달러를 넘는 흥행 기록을 달성, <록키 호러 픽쳐 쇼>는 뉴욕에서만 13년간 상영됐다.

록키 호러 픽쳐 쇼

감독 짐 셔먼

출연 팀 커리, 수잔 서랜든, 베리 보스트윅, 리처드 오브라이언, 패트리시아 퀸, 넬 캠벨, 조나단 애덤스, 미트 로프, 찰스 그레이

개봉 1998.06.20. / 2016.10.13.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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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다라본트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1994

많은 이들에게 <쇼생크 탈출>이 명작으로 분류되지만 시작은 달랐다. <쇼생크 탈출>은 각본가였던 프랭크 다라본트의 감독 데뷔작이었다. 개봉 당시 흥행 성적은 그다지 망한 편도 아니었지만 평범한 수준이었다. 입소문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일까. 원작 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의 저자인 스티븐 킹은 원작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수성들이 배어 있다“잘 된 각색 그 이상의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영화 정보 사이트 IMDb에는 수년째 최고의 영화 1(평점 9.2) 자리를 <쇼생크 탈출>이 지키고 있다.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종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으나 상은 하나도 타지 못했다. 따라서 <쇼생크 탈출>에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쇼생크 탈출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출연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

개봉 1995.01.28. / 2016.02.24.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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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파이트 클럽>
Fight Club, 1999

영화평론가 짐 호버먼은 <파이트 클럽>이 세상에 나오자 온갖 사도마조히즘적인 찬양”, “감상적이고 덜 예리하며 도무지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남근주의로 떡칠갑한 억압적 장치들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라고 썼다. ,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철학도 주제의식도 없이 스타일만 가득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단순히 평단의 평단만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파이트 클럽>의 흥행은 처참했고, 이 때문에 폭스 영화사의 사장이 해임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화는 DVD 시장에서 입소문을 타 재평가 받기 시작한다. 개봉 당시엔 데이빗 핀처에게 암담함을 안겨주었지만 현재는 데이빗 핀처의 대표작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화로 남았다. <파이트 클럽>의 인상적인 결말은 원작 소설가 척 팔라닉도 내 결말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파이트 클럽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개봉 1999.11.13. / 2016.10.26.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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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지구를 지켜라!>
Save The Green Planet!, 2003

국내 영화에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비운의 걸작이 존재한다. 제목으로 보나, 포스터로 보나 이 영화가 걸작으로 칭송받기에는 의문이 따를 수도 있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대표적인 마케팅의 실패 사례로 거론되는데. 영화가 코미디 요소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코미디는 블랙코미디에 분류될만한 것이었고, 전체적으로는 SF, 스릴러 영화의 성격이 훨씬 강했다. 결과적으로 그저 그런 코미디 영화처럼 보였던 마케팅은 아쉬웠다. 영화 자체의 독창성과 기괴함 마저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흥행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광들 사이에 숨은 수작으로 손꼽히며 컬트영화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 이후 10년 만에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차기작을 발표했다.

지구를 지켜라!

감독 장준환

출연 신하균, 백윤식

개봉 200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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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심미성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