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환, 송형국, 홍수정 평론가, 윤웅원 건축가가 <로마>를 보고 읽고 썼다.

“클레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다. 그녀의 상처와 나의 상처, 나아가 한 가정의 상처, 멕시코라는 나라의 상처 그리고 전 인류의 상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캐릭터가 클레오였다.” <로마>(2018)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바라보는 역사와 여성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안시환, 홍수정, 송형국 영화평론가와 윤웅원 건축가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로마>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이 있는 곳, 삶은 계속된다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시선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는 마당과 침실, 거실, 부엌을 반복적으로 드나들며 하루를 일로 채운다. 알폰소 쿠아론은 패닝과 트래킹 그리고 롱테이크의 화면 속에서 그런 클레오의 행동을 주시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사소한 일상이 모인 그녀의 하루를, 아니 어쩌면 그녀의 삶(시간) 전체를 본다(또는 보아야 한다). 그녀의 행동에서 어떤 상징이나 은유를 발견하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알폰소 쿠아론에게 클레오의 일상은 또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대상화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물만이 아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 사물, 심지어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러 소음마저도 그 존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려 한다. 즉 <로마>에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는 그 어떤 큰 목적 아래 종속된 하위개념이 아니라 시청각적 이미지 각자의 존재성을 주장하고, 그때마다 <로마>는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한마디로 <로마>는 관객을 “순수한 시·지각적 상황”(질 들뢰즈)으로 초대하는 영화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

알폰소 쿠아론이 클레오의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해도, 우리는 그녀에게 플롯의 변곡점이 될 어떤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 클레오는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인물(고전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인물)이 아니라 특정 사태를 맞닥뜨리면 행동하는 대신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인물에 가깝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의 마디마디, 그러니까 지진이 났을 때, 산불이 났을 때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휩싸일 때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클레오를 보여준다. 거리 시위대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시작되고 이를 창 너머로 바라보던 클레오 앞에 페르민 패거리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세상 바깥으로 나온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삶 속으로 불쑥 침투하는 불가항력의 힘 앞에서 그녀는 침묵의 머뭇거림으로 일관하고 삶은 더 막연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일상적 노동의 삶과 그 관성을 뚫고 나오는 머뭇거림 속에서도 클레오는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로마>를 본 관객이 격찬해 마지않는 바닷가 장면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내딛던 클레오의 발걸음은 그녀의 하루하루가, 그녀 앞에 들이닥친 불가항력의 상황들이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보이던 머뭇거림이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속하는 삶에 놓인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그렇게 그녀는 무언가가 되어가고, 또 되어갈 것임을 증명한다. 클레오가 관통한 사건(기억)들은 지나간 시간으로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미래로 전진시키는, 그럼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무언가가 되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클레오만이 아니라 그녀와 몸을 포개어 작지만 큰 산을 쌓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주관과 객관의 이중 인화

알폰소 쿠아론에게 클레오(또는 자신을 길러준 입주 가정부 리보)의 삶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시절을 ‘박제’하는 것과는 다르다(영화 속 부르주아 집안을 채우고 있던 박제품을 상기하라). 박제품에게 변화와 생성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간성은 온전히 시네마의 영역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지속하는 시간을 극단적인 롱테이크에 담아낸다. 그는 ‘시간을 자르고 붙이는’ 편집을 통해 행위의 극적 의미를 생산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로마>의 롱테이크는 차곡차곡 쌓이는 클레오의 시간을 존중하려는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적 태도 그 자체다.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 속 한 인물로 존재함에도 그 소년의 시선을 경유하여 클레오를 바라보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클레오의 삶을 되살리려 할 때, 그 과정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어린 시절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이는 그녀의 삶(또는 그의 삶)을 낭만화할 위험을 수반한다. 하지만 알폰소 쿠아론은 클레오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거리를 두면서 <로마>를 단순한 회고담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마치 주관과 객관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로마>의 카메라 포지셔닝은 인물과 같은 상황에 함께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바라본다. 알폰소 쿠아론은 패닝과 트래킹(때로는 틸트)이라는 ‘인간의 신체적 능력’에 기반한 카메라의 움직임 너머로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다. 철저하게 아이레벨의 위치에서 클레오를 따라가는 <로마>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또한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또는 관객)의 영화로 완성되었다. 한마디로 사람들간의 경험의 공유.

삶은 계속된다

알폰소 쿠아론은 자기 가족과 클레오의 위계적 관계에 대해 눈감거나 애써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거실에 모인 소피아 가족이 TV를 본다. 가족들에게 디저트를 나눠주던 클레오는 그들 틈에 앉아 시선을 TV로 향한다. 클레오만이 유일하게 소파가 아니라 바닥에 앉아 있다 해도, 그들의 모습은 꽤 안정된 가족(또는 공동체)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소피아가 클레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클레오는 그들 속에 더 머물지 못한다. 이처럼 클레오는 가족과 함께 존재하면서도, 그들과 계급적·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소외된 존재다. 소피아는 통화를 엿듣던 아들을 야단치다 이내 감싸안는다(화면의 후경). 화면 전경에 멈춰 선 클레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세상은 클레오에게 기대어 위로받을 수 있는 어깨를 쉬이 내어주지 않는 걸까?

우리는 가혹한 세상을 홀로 버티고 서 있던 그녀가 무엇을 꿈꾸며 견뎌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며 단 한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그녀의 마음을 유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침묵과 머뭇거림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파도와 맞서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뿐이다(이 장면에서 지금까지 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던 카메라는 그 반대 방향을 향한다). 어쩌면 그 순간 클레오는 불가항력의 힘으로 몰아붙이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옥상에 오를 때, 카메라는 틸트 업해 하늘을 담는다. 그렇게 그녀는 천국의 계단을 오른다. 영화 초반부, 클레오는 옥상에 누워 “죽어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한다. 영화 엔딩에서 다시 옥상에 오른 그녀는 다시금 그곳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삶이 계속되는 것도 참 괜찮은 일이다. <로마> 같은 영화와 함께라면 말이다.

안시환 영화평론가


운동하는 힘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움직임

<로마>에는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가 걷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걷고 또 걷는다. 걸레질을 할 때, 아이들을 깨울 때, 조명을 끌 때에도 클레오는 사뿐사뿐 걸으며 집안 구석구석을 누빈다. 그녀가 잠시 바닥에 앉자 차를 내달라는 부탁이 떨어진다. 다시 몸을 일으켜서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스크린 위로 새겨진다. 그녀의 걸음은 늘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제 속도를 유지한다. 걸음뿐만 아니다. 설거지를 하거나 걸레질을 할 때에도, 그녀의 움직임은 돌출이나 막힘없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어딘가 세상사에 초연한 느낌도 풍긴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에서 이런 움직임은 낯설지 않다. <그래비티>(2013)에서 라이언(샌드라 불럭)이 우주선 안을 유영할 때나 <위대한 유산>(1998)의 에스텔라(기네스 팰트로)가 화폭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보여주는 움직임들은 이상하게도 클레오와 겹쳐 보인다. 느리고 부드럽게 지속되는 초연한 움직임. 이것은 대개 너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에서 2층을 비출 때 특이하게도 방문이 모두 열려 있다. 그 덕에 우리는 방 안 깊숙이까지 들여다보이는 깊은 공간감을 배경으로 클레오를 보게 된다. 빨래가 가득 널린 옥상 혹은 클레오가 소피(다니엘라 데메사)를 구한 바다를 회상해보자. 그녀의 주변에는 자주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마치 고래가 너른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치듯, 클레오는 넓은 공간 위를 부드럽게 움직인다. 탁 트인 공간에서의 유려한 움직임. 알폰소 쿠아론은 자꾸만 애정을 듬뿍 담아 이런 운동을 주시한다. 거기에 특별한 이유나 어떤 당위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런 공간, 그런 속도, 그런 움직임이 옳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다른 세계를 향하여

이런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상반되는 운동을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안토니오가 좁은 길에 주차를 하는 장면은 시종 긴장되며 위태롭다. 이 장면의 긴장은 후에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가 엉망진창으로 주차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차가 겨우 지나갈 좁은 공간과 기어이 비집고 들어가는 세단의 불편한 움직임. 이것은 앞서 설명한 클레오의 부드러운 움직임과는 상반된다.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차를 가지고 위태로운 장난을 친다. 두 아이는 장난감 차로 경주를 한다. 좁은 레일 위를 달리는 장난감의 거친 질주는 아이들의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유리가 깨지며 끝을 맺는다. 상대를 제압하려는 폭력적 움직임은 파국을 부른다. 클레오의 연인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은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자주 등장한다.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차 있고, 그가 훈련을 받는 운동장에는 열을 맞춘 이들이 빼곡하다. 이곳은 클레오의 공간과는 달리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 페르민은 갑작스레 막대로 위협하거나 소리 지르는 행동을 자주 한다. 이것은 늘 돌출 없이 평온한 속도를 유지하는 클레오의 행동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심지어 권총을 클레오에게 들이대고,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던 클레오의 양수가 터진다. 그리고 차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빽빽하게 밀집된 공간, 상대를 향해 돌출되는 행동들. 이것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클레오의 아이가 죽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 이때 한자리에 고정된 채 얼어붙은 카메라는 그 자체로 클레오의 슬픔을 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카메라는 이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클레오의 비극을 애도한다. 제한되고 정지되며 과격한 모든 것, 유려한 움직임과 대조되는 그 모든 것들이 <로마>에서는 부정적인 맥락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유려한 움직임들은 어째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그 움직임이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그 유려한 운동이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다만 그런 활동 끝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허문영 평론가는 그의 글에서 “<그래비티>의 주된 운동 이미지는 막의 관통”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씨네21> 929호, ‘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나는 ‘관통’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며, 그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알폰소 쿠아론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영화에서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활동이 중요하다. <그래비티>에서 대기권을 뚫고 지구로 복귀하는 우주선의 운동은 말할 것도 없다. <칠드런 오브 맨>(2006)은 집과 집 사이를 건너가며 새로운 세계를 찾는 영화다. <소공녀>(1995)는 원작 동화를 영화화한 소품 정도로 보이지만 주인공 사라(리젤 매슈스)가 비를 흠씬 맞으며 옆집으로 건너가는 장면만은 인상적이다. 알폰소 쿠아론의 인물들은 자주 온 힘을 다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한다. 그의 영화 엔딩에 유독 바다와 물이 자주 등장한다는 질문에 그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며 어떠한 메타포도 아니었다는 취지로 대답한 바 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비티>와 <칠드런 오브 맨>의 엔딩에 등장하는 바다, <위대한 유산>에서 핀(에단 호크)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나 <소공녀>에서 사라가 아빠와 재회할 때 내리는 비는 모두 ‘물’의 성질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지 않으며, 오로지 세계를 구별짓는 이질적인 물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어와 마찬가지다. 이때 외국어는 이질적인 언어의 장막으로서 존재하며, 그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의미를 모를 중국어를 듣고 삶의 의지를 다지는 라이언처럼(<그래비티>), 뜻모를 말을 내뱉으며 임신부를 살리는 노파처럼(<칠드런 오브 맨>) 언어적 장벽을 무심히 건너서 전달되는 감정의 파동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로마>를 다시 생각해보자. 클레오는 소피아 가족과 달리 미스텍어(멕시코의 아메리칸 인디언 언어)를 쓰며 보모 신분이다. 바다에 빠진 소피를 구하러 갈 때에 클레오는 안간힘을 쓰며 바닷물을 헤친다. 이질적인 언어, 신분, 물질이 그녀와 가족 사이에 버티고 있다. 그러나 클레오는 헤엄치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천천히 걸어서 소피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해변으로 돌아온 클레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낸다.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작업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울먹이는 고백과 이어지는 포옹이 이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부드럽게 지속되는 활동, 이질적인 세계의 장막, 마침내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유려한 움직임. <로마>는 그 일련의 과정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집으로 귀환하는 차 안에서 ‘사랑한다’는 나지막한 고백이 이어진다.

<로마>는 자주 사실주의 영화라고 언급되어왔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이 영화가 품은 모종의 비현실성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느끼기에 그 비현실성은 영화가 응시하는 초연한 움직임에서 오는 것 같다. 클레오의 느린 걸음은 현실에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 당당히 버티고 지속되는 유려한 움직임만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내게 <로마>는 그것으로 충분한 영화다.

홍수정 영화평론가


두개의 집, 열린 공간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공간

멕시코의 현대건축을 좋아한다. 우리가 멕시코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과는 달리 멕시코에는 뛰어난 현대 건축가들이 존재한다. 나는 멕시코의 건축가들을 볼때마다 그들의 외모가, 내가 미국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멕시코 사람들과는 다소 다르다는 점이 항상 궁금했다. 루이스 바라간, 후안 소르도 마달레노, 마리오 파니, 테오도로 곤살레스 데 레온 같은 잘 알려진 건축가들은 유럽계 백인들처럼 보였다.

인종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멕시코 사람들은 크게 백인, 백인과 원주민 혼혈, 원주민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밝은 피부색을 갖고 있을수록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쉽게 경제적 상층부로 올라갈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아마도 멕시코의 인종, 정치, 경제 분야의 역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건축가의 ‘외모’는, 어떤 직업은 부유한 계층에 속해야 하고, 이 직업이 발현되는 형식이란 부유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로마>에서 가정부로 나오는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는 시골 출신의 원주민이고, 주인 가족은 중산층 백인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도시화의 기간 동안, 가난한 시골처녀들이 도시 중산층의 가정부로 일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70년대 멕시코에서는 특별하게, 백인 가정의 원주민 가정부라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로마>에는 두개의 집이 나온다. 하나는 로마라는 이름의 중산층 주거지역의 주택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 지역의 플랜테이션 농장 저택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집이 모두 외부로부터 분리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의 주택이 거리로부터 독립된 집을 만들기 위해 중정을 이용했다면, 농장 저택은 높은 담을 쌓아서 외부와 격리된다. 농장 저택에서 높은 담의 존재는 담 안의 지주와 외부 소작농의 세계가 동일하지 않고, 또한 두 세계가 불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어린아이들을 옆에 두고 사격 연습을 한다거나, 기르던 개들의 머리를 박제해서 벽에 진열한다거나, 백인 가족들끼리 송년파티를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암시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고 있는 로마 지역의 도시주택은 측면과 후면에 중정을 갖고 있고, 측면의 중정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 주택들이 건설된 시기와 바닥의 타일 마감을 고려하면 원래부터 주차장으로 계획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영화에는 주차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중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구조다. 본채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있고, 도로로부터 사생활 보호가 필요한 침실들과 가족실은 2층에 위치해 있다. 후정 안쪽에는 부속 건물이 있는데, 부속 건물 2층 클레오의 침실은 중정을 사이에 두고 본채의 방과 마주하고 있다. 히치콕의 영화 <이창>(1954)처럼 감시가 가능한 이 조건은, 가정부의 침실 등이 켜져 있는지를 주인집에서 확인한다고 하는 대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 도시주택이 갖고 있는 독립된 세계라는 형식은, 시골의 농장 저택과 달리 계층적인 차이에 대한 표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정부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부속 건물의 존재는 이 중산층 주택도 여전히 멕시코의 경제적 계층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전망을 확보할 수 있는 건물 옥상이 가정부들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부속 건물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는 옥상은 빨래를 하는 장소이고, 아이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다. 영화에서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이 비행기로 상징되고 있다면 가정부들에게 더 넓은 세상은 건물의 옥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타일 바닥을 부감으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물을 흘려보내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리고 비누 거품이 끼어 있는 물 위로 프레임된 하늘이 반사되고, 그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비행기가 나타난다. 이 장면은 평범한 일상이 벌어지는 마이크로한 세상과 비행기로 상징되는 더 큰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제부터 간략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할 생각이다. 그 이유는, 원주민 가정부 클레오가 어떤 사건을 통해서 주인집 가족의 일원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원주민 출신의 클레오는 중산층 백인 가족의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과 개를 돌보는 그녀의 일상은 임신했을지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 남자친구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이 사라진 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집의 주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도 남편이 외도로 집을 나간 후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물론, 소피아의 상황이 클레오가 나중에 남자친구에게서 듣게 되는 “더러운 하녀 주제에!”와 같은 종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클레오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소피아에게 털어놓는다. 남편으로부터 버려진 자신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아니 버려진 여자들이라는 연대감으로, 소피아는 클레오의 출산 준비를 돕는다. 하지만 아기 침대를 사러 간 클레오가 우연히 마주친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를 살해하는 남자친구 페르민의 총구 앞에 서게 되고, 이 충격은 클레오가 배 속의 아이를 사산하는 원인이 된다.

병원에서 돌아온 클레오는 아이들과 떠나는 소피아의 여행에 동행한다. 소피아의 남편에게 자신의 물건을 찾아갈 기회를 주기 위한 여행이다. 휴양지의 해변에서 아이들이 파도에 휩싸였을 때, 클레오는 파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익사 직전의 아이들을 구해낸다. 뒤늦게 돌아온 소피아와 아이들, 클레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클레오는 자신은 사산한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고백한다. 배 속의 아이를 잃은 대신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을 구한 후, 항상 따로 서 있던 클레오는 마침내 소피아의 가족과 하나가 되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오가 자신의 일터 옥상으로 올라갈 때, 카메라는 클레오를 따라가다 멈추고, 영화는 멀리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영화 도입부의 비행기와는 다르게, 나는 이 장면에서 소피아의 아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을 떠올렸다. 수영을 못하는 클레오가 파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죽음의 공포와 파도의 일렁임과 익사 직전 아이들의 절망이 느껴지는 해변 장면은 시각예술인 영화의 최대치를 경험하게 한다. 나는 <로마>를 보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그래비티>(2013)가 아닌 <로마> 같은 종류의 영화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잘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의문조차 들었다. 나에게 <로마>는 클레오의 인디오 외모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영화

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것이 나의 어떤 감수성을 자극했다. 그래서 나는 <로마>를 만든 것이 클레오의 아이가 아니라, 소피아의 아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거북하다.

윤웅원 건축가


세계는 완벽히 계산되어 만들어졌다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리얼리즘

<로마>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파도를 떠올린다. 바닥 청소를 하는 인물이 주기적으로 물을 뿌릴 때마다 화면 위쪽으로 물결이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착시를 유도한 사운드는 철저히 디자인됐다. 잠시 후 카메라가 고개를 들면 배수구가 보이고, 그제야 우리는 그 파도가 인물의 행동과 중력이 만난 결과임을 깨닫는다. 사람의 움직임과 자연의 힘이 충돌하고 조응하며 만들어내는 차이와 반복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래비티>(2013)부터 보여준 운동의 본질이기도 하다. 더불어 4분34초의 이 숏에서 물에 비친 하늘은, 이곳이 벽은 있으나 지붕은 없는 안과 밖의 중간지대라는 점을 알린다. 한집에 살지만 가족은 아닌 경계인으로서 외부 계단을 이용하는 주인공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에게 계급이나 거대 시스템(항공기)은 중력만큼이나 거스를 수 없는 환경이다. 그 속에서 그저 살아내는 한 인물과 그녀가 처한 조건이 한 호흡에 담긴다.

이처럼 장면마다 고밀도 농축을 꾀하는 알폰소 쿠아론의 관심은 늘 그랬듯 무엇을 어디에 조합하느냐에 있다. 그러니 카니발에 참석한 주인공이 상류층의 공간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올 때 하필이면 오리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다거나, 남자친구를 찾아 질척이는 땅을 딛을 때 마침 인간 대포가 날아간다고 해서 ‘어떻게’를 궁금해할 일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쿠아론이 합성의 천재라는 걸 벌써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현대 미술계는 이 질문 -그 시점 그 자리에 무엇을 배치하는가- 을 던지는 각축장이 돼 있지 않나. 이제 12분29초짜리 해변 롱테이크로 들어가보자.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쿠아론은 “교각을 만들어 바다 안쪽까지 트랙을 설치해 촬영했다. 때마침 높은 파도가 몰아쳐왔다”는 정도만 말했지만, 특수시각효과(VFX)와 관련된 속사정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할리우드 리포터> 인터넷판 2018년 12월18일자 기사는 이 영화의 시각효과감독 데이브 그리피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해당 장면이 “드라마와 공포감의 확장을 위해 여러 테이크를 삽입”한 것이며 “여러 개의 숏을 이어붙였고 디지털 방식으로 합성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파도 속 아이들은 재배치됐고, 인물들이 모여 껴안을 때 물에 반사된 빛은 따로 촬영됐다. 그러니 시간 맞춰 잘도 날아가는 비행기, 딱 필요할 때 등장하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데이브 그리피스는 VFX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디지털 합성’ 전문가로, <정글북> <에이리언: 커버넌트> 등에서 합성 감독(compositing supervisor)을 맡은 인물이다. 수영을 못하는 주연배우와 제법 할 줄 아는 아역배우들이 적절한 날씨와 최적의 카메라 움직임을 만나 역사적 장면을 탄생시켰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핵심은 20세기에 영화 예술을 찬양하던 태도로는 접근조차 어림없는 게 쿠아론의 영화들이란 점이다. <인디와이어> <버라이어티> 등은 70년대 멕시코시티의 풍경을 구현하기 위해 거대한 블루스크린이 사용됐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유튜브에서도 확인된다. 극중 시력이 왜곡된 독일군이 자기 편 전투기를 격추하는 코미디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나서는 클레오의 뒤편에서 장난감 장사꾼이 떠든다. 장난감은 공중에 떠 춤추고 있다. “실 안 보이죠. 속임수 아니에요.” 그렇다. 극장을 나서는 우리는 <그래비티>가 대기권 밖에서 촬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짜’라고 생각한 적 없다. 우리는 종잇장만큼의 차이로 “합성이네”와 “실감나네” 사이

를 오가는 왜곡된 시력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구현보다는 재현을 중시하는 쿠아론의 카메라

다시 말하자. 쿠아론의 관심사는 현장에서의 고유성을 포착하는 리얼리즘이, 아니다. 그의 구현(presentation)이 관객의 수용 단계에서 어떻게 재현(representation)되느냐가 골자다. 흥미로운 건 <로마>는 <그래비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 놓인 화면인 척하고 있다. 말하자면 ‘VFX 리얼리즘’이다. 영화에는 ‘척하는’ 것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정의의 사무라이인 척하는 남자친구, 출장 간 척하는 남편, 우주의 기운을 받는 척하는 차력사, 권총 놀이를 하며 “죽은 척해야지”라며 억지 부리는 아이. 진짜인 척하는 동물 박제…. 지금 쿠아론은 쉴 틈 없이 ‘어디까지가 진짜인가’를 묻고 있는 중이다. 관객은 분별해야 하는 과제들 앞에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사슴 박제보다 개 머리 박제를 볼 때 더 끔찍하다. 사람과 가까운 동물이기 때문인데, 새 박제는 끔찍하지 않은가? 식당에 내걸린 물고기 모형은? 그렇다면 하인으로 부리던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머리를 박제한다면 어떤가? 이제 <로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불교적 세계관, ‘경계’와 ‘분별’이라는 화두와 마주친 우리는 좀더 근원으로 들어갈 것을 주문받는다. 클레오가 사는 집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작은 불상(佛像)은, 그녀가 생명을 구하고 돌아온 뒤 한결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움직임에 ‘항상 같음’이란 없다. 초반 클레오의 실내 조명 관리 장면에서 360도를 등속 회전해 제자리로 돌아온 화면은 불 켤 데 켜고 끌 데 끄고 난 뒤 달라진 집 안을 비춘다. 한 바퀴 자전해 같은 자리에 온 것 같지만 어제의 지구와 오늘의 지구를 이루는 만물은 조금씩 변해 있는 것이다. 대개 식재료이지만 가끔 생명을 상징하는 달걀이 클로즈업된 다음 클레오가 돌보는 아이는 말한다. “내가 늙었을 때 클레오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어.” 연기(緣起·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부터 윤회(輪廻)까지 언급하는 아이(혹은 감독 자신)의 대사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 구원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세계관을 놀랍도록 압축한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해변 장면에서 비슷한 대사가 한번 더 반복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래서 <로마>의 카메라는 트라이포드의 중심축에서만 회전하고, 설치된 트랙 위에서만 수평이동한다.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지구처럼. 수십년 전 휠체어에 올라 자유롭게 움직인 고다르의 카메라와 비교해도 커다란 차이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활발하지만 단 한번도 축과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트랙을 따라 달리는 장난감 차를 가지고 놀며 무한 공간을 유영하는 우주영화를 욕망한다. 이 집의 자동차는 무심한 벽, 그저 제 길을 가던 화물차 혹은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군악대 사이에 자꾸만 끼이는 일을 겪은 뒤에야 일종의 ‘해탈’ 여행에 마지막으로 쓰인다(차종은 ‘은하계’란 의미의 갤럭시다). 요컨대 <로마>는 인물의 행동과 우주의 섭리 혹은 행위자가 처한 조건들의 ‘사이’를 들여다보는 영화다. 그 카메라는 자연법칙에 근거해 철저하게 통제된다. 여기에 정밀한 합성이 디자인된 것은 물론이다. 쿠아론은 하나의 숏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합성을 연구함으로써 진리에 다가서는, 희귀한 첨단을 걷는 작가다. <로마>는 21세기 현대영화 중에서도 어떤 한쪽 끝으로 나아간 리얼리즘이며, 우리의 태도 또한 20세기의 그것을 버렸을 때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다.

송형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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