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가 빅토르 최를 보여주는 방식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빅토르 최를 영화에 등장시키는 방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빅토르는 친구 리오샤와 나란히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는 록스타 마이크가 친구들과 휴양 중인 해변을 향해 가는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마이크가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공연장에 잠입하려 사다리를 오르는 레닌그라드의 젊은 무리처럼 빅토르도 마이크를 동경하는 무수한 젊은이 중 하나처럼 보인다. 와이드 화면은 종종 인물을 소외시키는데, 빅토르는 넓고 광활한 풍경의 일부로 무심하게 카메라를 지나쳐 간다. 빅토르와 리오샤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시작할 때도 카메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쓴 가사를 논평하는 마이크와 펑크의 모습을 비춘다. 마이크가 빅토르 가까이 이동하자, 그제야 카메라도 빅토르쪽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부추김 끝에 여전히 산만한 분위기에서 이미 시작되어버린 빅토르의 음악은 감동적이다. 노래도 물론 좋지만, 영화가 노래를 들려주는 방식 때문이다. 이미 시작된 휴가의 부산함 속에서 음악이 불쑥 흘러나오듯, 우리가 어떤 음악과 맞닥뜨리는 순간은 대부분 예고 없이 찾아온다. 고정하는 대신 끊임없이 흐르며 유영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의 음악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두루 비춘다. 관객은 빅토르와 대면하여 ‘인간 빅토르’를 파악할 기회를 얻는 대신, 그와 노래로 교우한 사람들의 주관적인 시선과 단면을 통해 ‘빅토르의 노래’를 듣게 된다.
친구들은 빅토르의 노래를 곧장 따라 부른다. 마이크가 후렴구 가사에 아이디어를 주자 즉흥적으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클럽 무대의 관객 반응과 명확히 대조된다. 공연 중 작은 행위나 소리도 통제되기에 관객은 자리에 얌전히 앉아 음악을 감상한다. 그러나 영화는 당시 소련의 억압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힘을 과도하게 쏟지 않는다. 억압당하는 무대를 비판하는 대신 환상의 개입이나 삶 속에 분포하는 다양한 무대를 조명하는 것으로 당대 뮤지션들의 내적 열망에 바짝 다가간다. 해변에서 부르던 빅토르의 노래는 그날 밤 친구들이 바다와 불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으로 점프하면서 이들의 배경음악으로 변형된다. 이 순간 그의 노래는 누군가의 삶의 이미지와 단번에 합치된다. 누군가에게 나의 얘기 혹은 진솔한 인생 노래로 평가받는 그의 음악은 그것을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삶의 이미지와 만나 비로소 온전해진다.
<레토>가 빅토르 최의 전기영화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는 홀로 있는 빅토르의 내면이나 그가 노래를 만드는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빅토르를 알 수 있는 창구는 그가 향유하고 만들어낸 음악 그리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뿐이다. 빅토르의 음악은 종종 사람들에게 어떤 경계를 넘도록 유도한다. 그가 첫 음반을 녹음할 때, 부스 밖 동료들은 어느 순간 도어스의 <앨라배마 송>처럼 다 같이 코러스를 부르자고 모의하며 부스 안으로 난입한다. 영화는 안과 밖, 현재와 과거, 환상과 실제의 경계를 빈번하게 오가며 ‘무대’의 틀을 깨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영화도 빅토르 최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폐쇄된 연결고리가 아니라, 음악으로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향유했던 이들을 위한 너른 여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