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감독은 음악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수십 년 지나 까마득히 잊고 있던 노래도 마치 요즘 것처럼 대중을 홀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2019년 현재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는 감독 조던 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영화 연출 데뷔작의 음악감독을 영화음악 경험이 전무한 마이클 아벨스의 클립만 보고 기용하는 센스를 가졌다. 오리지널 스코어를 제외한, <겟 아웃>과 <어스>에 쓰인 음악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Run Rabbit Run"
Flanagan and Allen
로건(러키스 스탠필드)이 한밤 중 길을 걷다가 납치당하는 프롤로그, 괴한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언뜻 흥겹게 들리는 음악이지만, 로건의 걸음을 따라붙는 자동차의 움직임이 "도망가렴 토끼야"라는 노랫말과 맞물려, 그가 봉변을 당할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영국 출신 듀오 플래너건 앤 앨런이 부른 노래는 1939년 10월에 열린 한 풍자극을 위해 작곡돼, 히틀러를 비꼬는 내용으로 개사돼 2차 세계대전 당시 큰 인기를 누렸다.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2016)에서는 타임 루프를 만들고 독일군이 폭탄을 떨어트리는 순간에 사용됐다.
"Redbone"
Childish Gambino
주술처럼 들리는 스와힐리어가 맴도는 'Sikiliza Kwa Wahenga'와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음악이 툭 바뀐다. 영화/드라마 팬에겐 도널드 글로버로 더 친숙할, 차일디시 감비노의 R&B 넘버 '레드본'(Redbone)이다. 랩에 치중한 음악을 선보였던 기존의 방향과 달리, 글로버와 그의 오랜 음악 파트너 루드비히 고란슨은 싸이키델릭한 사운드의 R&B로 선회해 2016년 앨범 <"어웨이큰, 마이 러브!"(Awaken, My Love!)>를 내놓았다. 크레딧을 지우고 들으면 마치 70년대에 히트한 슬로우잼처럼 들리는 '레드본'은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포트레이트 오브 트레이시'(Portrait of Tracy)와 붓시 콜린스 밴드의 '아이드 래더 비 위드 유'(I'd Rather Be with You)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I've Had) The Time of My Life"
Bill Medley and Jennifer Warnes
우유와 시리얼을 따로 먹으며 웹서핑에 열중할 때, 로즈(앨리슨 윌리엄스)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크게 듣고 있어 바깥의 난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제니퍼 그레이 주연의 <더티 댄싱> 주제가 '(아이브 해드) 더 타임 오브 마이 라이프'((I've Had) The Time of My Life)가 이어폰 바깥으로도 꽤나 크게 들린다. "당신 덕분에 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누렸어요" 하는 노래를 새로운 희생양을 검색하고 듣고 있다니, 크리피 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도나 썸머에게 처음 제안됐던 이 곡은 여러 사람을 거쳐 빌 메들리와 제니퍼 원스의 듀엣으로 완성됐다.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의 주제가상을 받았고, <더티 댄싱> 사운드트랙은 미국에서만 1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I Like That"
Janelle Monáe
자넬 모네이의 '아이 라이크 댓'(I Like That)은 <겟 아웃>의 '레드본'(Redbone)이 사용된 방식과 똑같이 배치됐다. 오싹한 주술 같은 노래가 오프닝부터 긴장을 움켜쥔 후, 곧장 나른한 노래와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 라이크 댓'이 얼마나 편안했는지,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와 두 아이는 차에서 노래를 들으며 편안히 자고 있다. 2007년 뮤지션으로 데뷔한 모네이는 2014년 배우 일을 시작한 이래 4년 만에 세 번째 정규 앨범 <더티 컴퓨터>(Dirty Computer)를 발표해, 음악과 연기 모두 끝내주게 해내는 당대 최고의 엔터네이터임을 증명했다. 오거나이즈드 노이즈가 만든 비트 위에 새겨진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똘똘 뭉친 노랫말에 갈채를 보낼 수밖에.
"I Got 5 On It"
Luniz
<어스>를 대표하는 노래, 두말할 것 없이 루니즈의 '아이 갓 파이브 온 잇'(I Got 5 On It)이다. 불안한 마음을 품고 산타 크루즈 해변으로 향하는 애들레이드는 카스테레오로 이 곡을 틀어,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들에게 리듬을 타보라면서 자기 긴장을 누그리고자 애쓴다. 10달러 짜리 마리화나를 반반 나눌 테니 5달러만 달라는 가사는 물론 영화와 아무 관련이 없다. 예상해보건대 '아이 갓 파이브 온 잇'이 <어스>에 주요하게 쓰인 건, 마이클 마셜이 부른 후킹한 후렴부도 아닌, (클럽 누보의 '와이 유 트리트 미 쏘 배드'(Why You Treat Me So Bad)에서 샘플링한) 반복적인 건반 사운드 때문인 것 같다. 신나면서도 불길하게 들리니까. 이 곡을 음악감독 마이클 아벨스가 편곡한 '태더드'(Tathered) 버전이 영화 클라이맥스에도 사용됐다.
"Toast'
Koffee
애들레이드의 딸 조라(샤하디 라이트 조셉)는 음악 취향이 좋다. 늘상 휴대폰을 만지작대면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이어폰에서 자그맣게 들리는 노래들이 모두 훌륭하다. 산타 크루즈 모래사장에서 혼자 덩그라니 멍 때리고 있을 땐 '토스트'(Toast)를 듣고 있었다. 자메이카 출신의 커피는 18살에 발표한 '토스트'로 작년 메이저 신에 출사표를 던졌다. 마찬가지로 자메이카에서 나고 자란 DJ 월시 파이어가 만든 레게 리듬에 "내가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에너제틱한 노래가 물 흐르듯 흐른다. 산타 크루즈 해변이 너무 우중충해 보여서 '토스트'가 더 작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Forever"
"Reality Check"
Noname
조라의 또 다른 플레이리스트. 도플갱어 무리가 아직 별장에 찾아오기 전 여지 없이 핸드폰을 쥐고 침대에 누워 있거나 집안을 돌아다니는데, 그때마다 노네임을 듣고 있었다. 요즘 가장 주목 받는 여성 래퍼 노네임이 2016년 처음 발표한 믹스테이프 <텔레폰>(Telefone)에 실린 두 곡 '포에버'(Forever)와 '리얼리티 체크'(Reality Check)다. 근래 양산되는 트랩 사운드의 유행과는 거리가 먼, 따뜻하고 귀여운 소리가 아기자기하게 얽힌 비트 위에 노네임의 나긋나긋한 래핑이 새겨져 있다. 트렌드에 맞네 안 맞네 따지는 게 한없이 무가치해지는 그저 좋은 음악.
"Good Vibrations"
The Beach Boys
'굿 바이브레이션즈'(Good Vibrations)는 천재 브라이언 윌슨이 공들이고 또 공들여 완성해낸 명곡이다.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앨범으로 추앙받는 <펫 사운즈>(Pet Sounds)를 작업하던 중 만든 이 곡은, 앨범이 나온 뒤에도 완성되지 못했다. 걸작 음반을 내놓은 뒤에도 브라이언 윌슨은 쉽게 만족하지 못했고, 신경쇠약을 앓는 와중에 8개월간 여러 스튜디오를 전전하며 본인이 애초 그린 사운드를 실현시키는 데에 매진했다. 그 결과, 변칙에 변칙을 거듭하는 멜로디, 무성한 듯 완벽하게 짜여진 하모니, 흔히 들을 수 없었던 별의별 악기들의 쏟아지는 명곡이 세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Fuck tha Police"
N.W.A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즈'에 한술 더 뜨는 조던 필의 우악스러운 유머가 돋보이는 초이스. 흑인과 공권력의 불화가 극에 달한 80년대 후반에 발표된 이 서슬퍼런 노래가 이다지도 어처구니 없이 쓰일 줄 누가 알았을까. '퍽 더 폴리스'(Fuck tha Police)가 발표되자마자 살벌한 가사 덕분에 보수주의자들의 거센 항의에 FBI의 경고까지 받았지만, N.W.A는 굴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경찰 X먹어"라고 외쳤다. 그렇게 힙합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그룹으로 남았다. 이 곡에 얽힌 자세한 사연이 궁금하다면 N.W.A 전기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2015)을 보길 권한다.
"Les Fleur"
Minnie Riperton
소울 밴드 로터리 커넥션에서 활동하던 미니 리퍼튼은 1970년 첫 솔로 앨범 <컴 투 마이 가든>(Come to My Garden)을 발표했다. '레 플뢰르'(Les Fleurs)는 그 처음을 장식하는 노래다. 재즈 피아니스트 램지 루이스가 1968년 발표한 이 곡에 코러스로 참여한 리퍼튼은 그로부터 2년 후 첫 앨범의 첫 곡으로 '레 플뢰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원곡의 작/편곡자였던 찰스 스테프니가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맡아, 오리지널보다 훨씬 거센 박력을 발산했다. 벼락처럼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레이션과 겹겹의 열창이 '나의 정원에 오세요'라는 앨범 타이틀마저 에로틱하게 만드는 미니 리퍼튼의 관능적인 목소리를 묻어버릴 만큼 강력하게 울린다. <어스> 마지막에 목도하는 그 장관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명석한 선곡이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