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다 <어벤져스: 엔드게임>뿐인 상영관 목록을 보다가 이번주 영화음악감상실은 선곡이 빛나는 구작을 소개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곧바로 정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2003)이다.


Bang Bang (My Baby Shot Me Down)

Nancy Sinatra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숨을 헐떡이는 브라이드(우마 서먼)의 흑백 클로즈업. 잠시의 대화 끝에 “이거 당신 아이야”라고 고백하자마자 머리에 빌(데이빗 캐러딘)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그리고 음악과 함께 새까만 바탕과 흰 글씨의 단조로운 크레딧이 지나간다. 유혈이 낭자한 풍경과 몸을 들썩이게 하는 총성이 무색하게도, 2분 40초짜리 트랙이 통째로 쓰인 '뱅 뱅(마이 베이비 샷 미 다운)'(Bang Bang(My Baby Shot Me Down))은 내내 들뜨지 않은 채 기묘한 나른함을 유지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 낸시 시나트라가 부른 이 곡은 불과 몇 개월 전 셰어가 발표한 노래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다채로운 악기가 풍성하게 모인 셰어의 버전과 달리, 낸시 시나트라의 ‘뱅 뱅'은 트레몰로 이펙터를 머금은 기타와 음울한 보컬이 전부다. "뱅 뱅, 내 사랑이 날 쏴버렸지” 하는 후렴구와 결혼식장을 떠올리게 하는 3절의 가사가 <킬 빌>의 프롤로그와 정확히 조응한다.


Twisted Nerve

Bernard Herrmann

코트, 백, 장갑, 그리고 안대까지 온통 하얗게 차려입은 엘 드라이버(대릴 한나)는 휘파람을 불며 혼수상태인 브라이드의 병실을 찾는다. 경쾌하되 어쩐지 불길하게 들리는 멜로디가 방문의 목적이 살인임을 예감케 한다. 이 시퀀스를 장식하는 휘파람 멜로디는 1968년 발표된 공포영화 <트위스티드 너브>의 메인 테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대표작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 등을 만든 버나드 허먼의 작품이다. 처음엔 휘파람과 건반만 울리다가 서서히 악기들이 더해지고, 결국은 버나드 허먼 특유의 고막을 찢을 기세로 쏟아지는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맺는다. 타란티노의 2007년작 <데쓰 프루프>에선 애버내시(로사리오 도슨)의 벨소리로도 쓰였다.


The Grand Duel (Parte Prima)

Luis Bacalov

이탈리아 영화음악가 루이 바칼로프는 타란티노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비견할 만큼 열띤 흠모를 드러내온 아티스트다. <킬 빌>뿐만 아니라 속편 <킬 빌 2>,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의 중요한 대목에 바칼로프의 음악을 배치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쓴 <킬 빌>에선 세르지오 레오네의 조감독 출신인 지안카를로 산티의 <위대한 결투>(1972)의 음악을 빌려왔다.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가 어떻게 무시무시한 킬러가 되었는지 돌아보는 애니메이션 챕터 문을 ‘더 그랜드 듀얼(파트 프리마)'(The Grand Duel (Parte Prima))와 함께 연다. 하모니카와 플루트의 황량한 소리로 시작해 보컬 하모니와 오케스트레이션이 더해지는 과정이 (대사와 효과음을 강조하기 위해) 몇 파트로 쪼개어져 배치됨으로써, 오렌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훗날 그 복수를 실행하는 드라마틱한 과정의 분위기를 한꺼번에 수식한다.


回復する傷

Lily Chou-Chou

가까스로 몸을 회복한 브라이드는 복수를 실행하기에 앞서 일본 오키나와로 간다. 전설적인 일본도 장인 핫토리 한조에게 찾아가기 위해서다. 넉살 좋은 스시집 주인처럼 보이던 그는 브라이드의 목적을 알게 되자 자신이 만든 검을 모아둔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때 릴리 슈슈의 '회복하는 상처’(回復する傷)가 흐른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1999)의 주인공이 열광하던 바로 그 릴리 슈슈다. 실존하는 밴드는 아니고, 음악감독 코바야시 타케시가 영화를 위해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사운드트랙도 릴리 슈슈의 컴필레이션인 것처럼 제작됐다. 타케시의 몽롱한 사운드에 이 그룹에 보컬로 참여하며 데뷔한 사류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스미는 ‘회복하는 상처’는 다양한 일본도들이 놓인 낡은 다락방의 기묘한 풍경을 꾸민다. 제목 때문인지, 핫토리 한조의 칼을 보는 순간 브라이드의 몸도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The Lonely Shepherd

Gheorghe Zamfir

대가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른 걸까. 빌을 죽이겠다는 브라이드를 알아본 핫토리 한조는 곧장 그에게 자기 생애 최고의 걸작을 선사한다. 한국 관객에겐 명상 음악 정도로 기억될 '더 론리 셰퍼드'(The Lonely Shepherd)가 이 중요한 순간을 깔린다. 팬플루트의 구슬픈 소리가 비감보다는 숭고함을 극대화한다. 독일의 음악가 제임스 라스트가 작곡하고 루마니아의 팬플루트 아티스트 게오르게 잠피르가 연주한 더한 작품은 1977년 발표돼 독일의 음악 차트 22위에 올랐고, 자국에서 이미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 잠피르는 이 곡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오렌 이시이의 일당을 모두 해치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브라이드와 그의 딸이 살아 있다는 빌의 선언이 이어진 후 엔딩 크레딧과 함께 '더 론리 셰퍼드'가 다시 한번 장엄하게 울린다.


Green Hornet

Al Hirt

도쿄에 도착한 브라이드는 <킬 빌>의 아이콘과 같은 노랑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렌 이시이의 일당을 뒤쫓는다. 알 허트의 '그린 호넷'(Green Hornet)이 도쿄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바이크의 속도감을 한껏 증폭시킨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960년대 인기리에 방영된 유명 탐정 히어로물 <그린 호넷>의 테마로서 만들어진 곡이다. <그린 호넷>의 사운드트랙은 제작되진 않고, 재치는 넘치는 제목의 1966년 앨범 <더 혼 미츠 "더 호넷">(The Horn Meets "The Hornet")에 수록됐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알 허트의 트럼펫 소리가 청엽정에서의 성대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 긴장감을 조성한다. 정신을 쏙 빼놓는 음악 가운데서도 유독 안정된 오렌 일당의 표정이 브라이드의 추격을 직감한 것처럼 보인다.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

布袋寅泰

토모야스 호테이의 연주곡 '배틀 위드아웃 오너 오어 휴머니티'(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는 오렌의 무리가 청엽정에 들어올 때 흐른다. 한국인에겐 강호동의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서 게스트를 소개할 때 나오는 BGM으로 친숙한 곡이다. 둔탁한 드럼 비트 위를 가로지르는 박력 있는 기타 소리가 오렌의 존재감에 무게를 더한다. '배틀 위드아웃 오너 오어 휴머니티'는 <신 의리 없는 전쟁>(2000)을 위해 만들어졌다. 타란티노가 존경해 마지않는 거장 후카사쿠 킨지(타란티노는 그의 유작 <배틀 로얄>을 200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선정했다)의 대표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일본의 전설적인 밴드 보위(BOØWY) 출신의 기타리스트 토모야스 호테이는 음악감독뿐만 아니라, 직접 주연으로 참여해 연기까지 선보였다. 호테이는 <킬 빌>에서 파란 화면의 액션 신으로 오마주를 바친 <사무라이 픽션>(1998)에도 주연과 음악으로 참여한 바 있다.


Woo Hoo

The 5.6.7.8’s

로큰롤 넘버 '우 후'(Woo Hoo)는 여성 3인조 밴드 The 5.6.7.8’s가 1996년 발표한 곡이다. 1960년대 미국의 걸그룹 로네츠의 앨범 커버를 패러디 한 EP에 수록된 노래는 락-어-틴스가 1959년 내놓은 동명의 로커빌리 트랙을 리메이크했다. 로큰롤 특유의 단순한 연주에 이렇다 할 노랫말이 없이 그저 "우후 우후후~ 우후 우후후~" 추임새만 반복하는데도 저절로 몸이 들썩여진다. The 5.6.7.8’s는 직접 청엽정의 밴드로 출연해 '우 후'를 비롯한 노래 3개를 연주한다. 일본에 방문한 타란티노는 어느 옷 가게에서 우연히 이 노래를 듣게 됐고, 출국 일정 때문에 음반점에 들르지 못해 그 자리에서 원가의 몇 배를 지불하고 CD를 구입했다고 한다.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 Esmeralda Suite

Santa Esmeralda

브라이드와 오렌 이시이가 1:1로 맞서는 대결 신의 음악 활용은 타란티노의 감각이 크게 두드러진다. 전투력으로는 누구 못지않은 두 고수가 비장하게 칼날을 부딪히는 장면에서 디스코 밴드 산타 에스메랄다의 ‘돈 렛 미 비 미스언더스투드'(Don't Let Me Be Misunderstood)를 배치했다. 눈발이 흩날리는 새하얀 일본식 정원에 플라멩코를 위시한 라틴 풍의 리듬이 넘실거린다. 근데 그게 또 묘한 합을 만들어낸다. 두 킬러 모두 한 칼 한 칼 신중히 공격을 가하고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닮은 음악은 그들 속내의 불타는 전의를 따라가고 있다. 불세출의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시몬이 1964년 발표한 ‘돈 렛 미 비 미스언더스투드’는 애니멀스, 조 카커, 무디 블루스, 신디 로퍼 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리메이크 됐고, 산타 에스메랄다의 리메이크는 그들 가운데서도 크게 성공한 케이스로 손꼽힌다.


修羅の花

梶芽衣子

일본에 대한 타란티노의 편애로 똘똘 뭉친 <킬 빌>의 클라이막스는 엔카가 장식한다. 배우 겸 가수 카지 메이코의 노래 '수라의 꽃'(修羅の花)은 메이코가 주연을 맡은 1973년 영화 <수라설희>의 주제가로 쓰였다. “원망의 길을 걷는 여자, 눈물은 이미 버렸습니다”하고 (분명 절제하고 있지만) 통곡하듯 부르는 노래는 어머니의 원한을 갚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로 성장한 여자의 기구한 삶을 잘 드러낸다. 분명 이 스산한 노래는 브라이드의 성공을 축하하기보다 핫토리 한조의 검에 머리가 잘린 오렌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처럼 들린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