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촬영 중인 봉준호 감독

한국인 사상 최초 황금종려상 수상자 봉준호 감독은 한국 영화계 신기록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바로 제작비가 가장 많이 투입된 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그가 연출한 <설국열차>는 약 450억 원이 투입됐는데, 글로벌 프로젝트였다고 감안해도 그 규모는 역대 한국 영화 중 최고라고 한다. 그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제작비가 9억 8000만 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지금 상업 영화계에서 맹활약하는 감독들은 데뷔작을 얼마로 찍었을까. 그들의 데뷔작 당시 풋풋한(!) 사진들과 함께 제작비를 정리해봤다.

※ 데뷔작은 상업 영화를 기준으로 하며, 제작비는 ‘박스오피스모조닷컴’과 언론을 통해 공개된 제작비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도 억 단위 출발선에 섰다

안소니 & 조 루소 형제

<웰컴 투 콜린우드> (2003) / 800~1200만 달러

<웰컴 투 콜린우드> 조 루소(왼쪽), 안소니 루소

조 루소, 안소니 루소는 현재 영화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다. 길지 않은 경력에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굵직한 작품을 모두 성공시키며 역대 흥행 감독 2위에 올라섰다. 이들은 본인들이 집필한 <웰컴 투 콜린우드>로 상업 영화에 데뷔했다. 후줄근한 어르신들이 금고 한 번 털어보겠다는 이 하이스트 코미디 무비는의 제작비는 800만 달러(약 94억 원)에서 1200만 달러(약 142억 원) 정도로 추정된다(당시 기사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기됐다). 넉넉한 예산은 아니지만, 데뷔작치고는 충분한 편이다. 이 기사의 출발선을 루소 형제로 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제는 마블의 든든한 선봉장이 된 루소 형제


스티븐 스필버그

<슈가랜드 특급> (1974) / 300만 달러

<슈가랜드 특급> 골디 혼(왼쪽)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관객들의, 그리고 감독들의 우상인 스티븐 스필버그.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영화를 자체 제작하며 영화계에 성큼 다가갔다. 그의 데뷔작은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자비 500달러를 들여 제작하고 동네 극장에서 상영한 <불빛>(1964), TV 방영용으로 연출한 <대결>(1971), 첫 상업 영화 <슈가랜드 특급>(1974)이 있다. <슈가랜드 특급> 이전 <대결>도 평가가 좋았고 드라마 연출도 꾸준히 했기에 300만 달러(약 35억 원)를 제작비로 확보할 수 있었다. 상업영화로는 턱없이 적은 돈이지만, 1974년임을 감안하면 꽤 큰 금액이다. 당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자 로만 폴란스키도 <차이나타운>을 600만 달러로 제작했으니까. 거기에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역대급 가성비 수상에 성공했다.

<더 포스트>


제임스 카메론

<피라냐 2> (1981) / 14만 달러

두 번째 작품 <터미네이터> 촬영장에서 린다 해밀턴(왼쪽)에게 연기 지도 중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

데뷔작을 지우고 싶은 감독 1. 제임스 카메론은 <피라냐 2>로 데뷔했지만, 실상 제작자에게 완전히 휘둘리며 뜻대로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애초 B급 영화 제작사의 작품이라 주어진 예산은 14만 달러(약 1억 7000만 원). 저예산에 감독 뜻대로 찍지 못하는 촬영장이라 카메론 감독에겐 지금도 천추의 한처럼 남아있다. 그나마 <피라냐 2> 이후 절치부심하여 집필한 SF영화 시나리오를 팔면서 연출권까지 보장받았다. 그렇게 탄생한 게 <터미네이터>. <터미네이터>는 640만 달러(약 75억 원)로 제작됐는데, 스톱모션 특수 효과와 드라마틱한 전개로 저예산답지 않게 수준급 완성도를 보여주며 ‘제임스 카메론 비긴즈’를 알렸다.

최근 연출작인 <아바타> 촬영장


박찬욱

<달은… 해가 꾸는 꿈> (1992) / 1억 원

세 번째 작품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장의 박찬욱 감독

데뷔작을 지우고 싶은 감독 2. 박찬욱은 <달은… 해가 꾸는 꿈>이란 작품으로 연출직에 앉았다. 보스의 연인을 사랑한 조폭을 주인공으로 멜로 누아르를 표방한 영화다. 한때는 ‘이승철의 영화’로 세간에 오르내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박찬욱의 데뷔작’으로 의도치 않게 주목받고 있다. 박찬욱 본인이 인정하는 흑역사라고. <달은… 해가 꾸는 꿈>의 제작비는 1억. 처음부터 “1억으로 찍을 수 있는 영화 시나리오를 가져오라”는 요청에 맞춰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 영화에 대뜸 당시 대스타 이승철이 출연했으니, 예산이 어떻게 쓰였을지는 대강 알 듯하다.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촬영장


쿠엔틴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 (1992) / 120만 달러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저수지의 개들> 미스터 브라운 역으로 출연해 “왜 내 이름은 똥색이야?”라는 명대사도 남긴다.

B급 같은 A급의 대명사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로 데뷔했다. 갱스터 장르와 홍콩 누아르를 결합시킨 수다극(!)인 이 영화의 제작비는 120만 달러(약 14억 원). 나오는 배우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출연료도 상당했을 것 같은데, 저예산은 저예산이다. 전체적으로 한 장소에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기에 다른 부분에서 아낀 듯싶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후에도 이름값에 비하면 꽤 저렴한 영화를 많이 찍었다. 가장 비싼 영화가 <장고: 분노의 추적자>로 제작비 1억 달러를 들였다고 한다. 제일 많이 들인 만큼 제일 많이 벌었다.

<헤이트풀8> 촬영장


1억 미만 제작비로도 수준급 데뷔

이병헌

<힘내세요, 병헌씨> (2013) / 6000만 원

<힘내세요, 병헌씨> 촬영장의 이병헌 감독

올해 최고의 흥행을 거둔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 <극한직업>이 적은 제작비로 최고 매출을 기록했듯, 이병헌은 그동안 소소한 코미디 영화에 주력했다. 데뷔작 <힘내세요, 병헌씨>도 무척 특이한 영화인데, 제목처럼 본인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코미디 영화로 승화한 것.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도 영화의 재미를 더하면서 예산을 절감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힘내세요, 병헌씨>는 6000만 원의 제작비로 완성됐다.

<극한직업> 촬영장


류승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 6500만 원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석환 역으로 출연도 했다.

류승완은 (긍정적인 의미로) ‘쌈마이’의 대가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마찬가지였다. 16mm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는 처절하면서도 질펀한 패싸움 장면들을 담아내면서 그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소개됐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6500만 원으로 제작됐는데, 처음부터 장편으로 기획된 게 아니라 단편들을 찍다가 옴니버스로 완성된 거라 제작비 효율은 조금 떨어지는 듯하다. 카메라 고장, 현상 불량, 영사기 고장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만큼 독특한 감성으로 주목받으며 ‘충무로 액션 키드’ 류승완의 막이 올랐다.

<군함도> 촬영장


이 정도면 자수성가의 대가

피터 잭슨

<고무 인간의 최후> (1987) / 2만 5000달러

<고무 인간의 최후>에 출연 중인 피터 잭슨 감독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감독으로 호명됐을 때, 영화 좀 본다는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피터 잭슨이?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이전에 B급 고어 코미디로 유명했기 때문. 데뷔작 <고무 인간의 최후>도 그런 류의 작품이었다. 인간을 햄버거 패티로 만들겠다는 외계인의 침공에 맞선 청년들의 이야기는 피 튀기는 고어와 할리우드를 겨냥한 코미디가 접목돼 컬트 코미디로 자리 잡았다. 그해 칸영화제에서도 <고무 인간의 최후>를 초청해 상영하기도 했다. <고무 인간의 최후>는 2만 5000달러(약 3000만 원)로 제작됐는데, 제작비가 뿅 나타난 것이 아니라 피터 잭슨과 출연진들이 일해서 번 돈으로 주말에 촬영을 진행했다고. 그래서 영화 완성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호빗: 다섯 군대 전투> 촬영장


크리스토퍼 놀란

<미행> (1996) / 6000달러

두 번째 작품 <메멘토> 촬영장의 크리스토퍼 놀란(왼쪽)

대중적인 인지도와 예술적 성취를 모두 잡는 크리스토퍼 놀란, 데뷔작 <미행>은 1년간의 촬영을 거쳤다. <고무 인간의 최후>처럼 <미행>도 주말에만 촬영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무 인간의 최후>보다 짧고(69분), 특별히 기교가 필요한 영화는 아니었기에 1년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전체적인 전개 방식도 오히려 이런 분산 촬영 방식에 적합했을 것 같다. <미행>의 제작비는 6000달러(약 750만 원). 이랬던 감독이 지금은 제작사에서 전권을 보장하고 월급도 최고 수준으로 챙겨주니, 당시 영화를 봤던 관객이라면 감개무량하겠다.

<덩케르크> 잭 로던에게 연기 지도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로버트 로드리게즈

<엘 마리아치> (1992) / 7000달러

엘 마리아치를 연기한 카를로스 가야르도(왼쪽),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에피소드 부자다. <엘 마리아치> 하나만으로도 책(<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십 분짜리 영화교실>)을 낼 만큼 다사다난한 촬영 현장을 경험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이것. <엘 마리아치> 제작비 확보를 위해 생동성 시험에 참여했다. 스테디캠이나 돌리 트랙을 빌릴 예산이 안돼서 휠체어로 트래킹했다는 것도 유명하다. 그가 이 영화에 투자한 돈은 7225달러(약 900만 원). 거의 모든 분야를 로드리게즈 감독 홀로 작업해서 완성한 <엘 마리아치>는 콜럼비아 픽처스의 눈에 띄면서 소규모 개봉에 성공했고, 제작비의 300배인 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로드리게즈 감독이 최근 연출한 <알리타: 배틀 엔젤>은 제작비가 2억 달러에 육박했으니, 무려 200만 배나 증가한 셈이다.

<알리타: 배틀 엔젤> 촬영장에서 제작자 제임스 카메론(왼쪽)과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