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이 놀라운 연기를 보여줄 때가 있다. 위대한 배우가 제 아무리 혼신의 연기를 선보인데도 구현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해낸다. 우연한 기회로 연기의 길을 걷게 된 배우들의 시작을 되짚었다.


행 S. 응고르

<킬링 필드>

(The Killing Fields, 1984)

<킬링 필드>는 1963년부터 13년간 이어진 캄보디아 내전을 취재하고 퓰리처상을 받을 <뉴욕 타임스> 기자 시드니 쉔버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시드니를 돕는 현지 통역인 프란 역엔 당시 연기 경력이 전무했던 행 S. 응고르가 캐스팅 됐다. 응고르는 캄보디아에서 산부인과 의사 일하던 중 1975년 크메르 루즈에 붙잡혀 4년간 강제 노동과 고문에 시달렸고, 태국으로 탈출해 난민으로서 미국에 이주한 바 있었다. 캄보디아의 야만적인 역사로부터 얻은 상처를 고스란히 품고 있던 응고르가 시드니 역의 샘 워터스턴과 함께 보여준 우정은 <킬링 필드>를 아우르는 휴머니즘의 핵심이다. 응고르는 첫 연기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간간이 영화에 출연하며 인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96년 LA 자택 근처에서 갱단에게 살해당했는데, 크메루 루즈의 수장 폴 포트의 지령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윌리엄 쉬멜

<사랑을 카피하다>

(Copie conforme, 2010)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야심작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프랑스의 대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함께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했던 윌리엄 쉬멜 역시 연기 경력이 없었다. 그의 본업은 오페라 가수다. 1980년대 들어 주목 받기 시작해 오페라 가수로서 줄곧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오던 쉬멜은, 2008년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발에서 공연된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작업하면서 키아로스타미와 연을 맺었고, 곧 <사랑을 카피하다>에 '노래하지 않는' 캐릭터로 캐스팅 됐다. 영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 이탈리어에 능통한 덕분에 프랑스어/이탈리아어/영어가 뒤섞인 영화에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었다. 오페라가 노래 솜씨는 물론 연기력까지 요하는 분야이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진짜 부부인 척하는 역할극을 하는 가운데 피어나는 감정을 보여줘야 하는 까다로운 연기를 능수능란하지도 어설프지도 않게 적절한 톤을 유지하며 선보였다.


프랑수아 베고도

<클래스>

(Entre les murs, 2008)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클래스>는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베고도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베고도는 파리 20구의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의 경험을 풀어쓴 준자전적인 소설을 영화화 한 <클래스>에서 주인공 마랭까지 연기했다. 조금은 무례해 보일 정도로 자유로운 태도의 학생들과 토론을 이어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적인 화법으로 담아낸 영화에서 베고도와 학생들(그들 역시 비전문배우였다) 사이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처음엔 사람 좋은 얼굴로 수업에 임하다가 점차 학생들과 감정의 골이 깊어질수록 폭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변화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건 베고도 스스로가 이 갈등의 경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쿠벤자네 왈리스

<비스트>

(Beasts of the Southern Wild, 2012)

역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배우는 누구일까? 바로 <비스트>의 주연 쿠벤자네 왈리스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의 제니퍼 로렌스에게 밀리긴 했지만, 왈리스의 후보 지명은 그 자체로 사건이었다. 촬영 당시 월리스가 8살이었다는 점보다 <비스트>가 생애 첫 연기였다는 점이 세상을 놀래켰다. 캐스팅 과정도 흥미롭다. 제작진은 뉴올리언즈의 폐교를 빌려 오디션을 진행했지만 주인공 허쉬파피에 걸맞는 배우를 찾지 못했다. 오디션 지역이 8개로 확대되고, 4개월로 예정된 일정은 1년으로 늘었다. 4천 명의 아이들을 만난 끝에 쿠벤자네 왈리스를 만났다. 하지만 시나리오에 설정된 6~9살의 소녀보다 어렸던 왈리스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왈리스는 처음에 보여준 천부적인 개성을 유감없이 뽐내면서 영화의 마술적인 에너지를 가능케 했다. 허쉬파피의 아버지를 연기한 드와이트 헨리 역시 오디션 장소에서 멀지 않은 위치한 빵집의 주인이었다.


야기라 유야

<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2004)

"매일 수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마지막까지 인상에 남은 건 야기라 유야의 얼굴이었다." 2004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쿠엔틴 타란티노의 말이다. 야기라 유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 출연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14세. 중간고사 기간과 겹쳐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야기라는 현재까지도 칸 최연소 수상자로 남아 있다. 야기라 역시 <아무도 모른다>가 생애 첫 연기였다. 어릴 적 친구가 아역배우로 활동하는 걸 보고 기획사에 들어갔고, 처음 본 오디션에 덜컥 합격했다. 남매를 연기한 배우들과 근 1년간 같이 살며 얻어낸 사실적인 공기는 고스란히 연기와 영화 자체에 스며들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특별한 대본도 없이 그때 그때 배우들에게 디렉션을 주는 방식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그 가운데서도 부모와 사회의 보필 없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 마주하는 수많은 감정들을 건조한 얼굴 아래 모두 발산하는 건 순전히 야기라 유야의 몫이었다.


브리아 비나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7)

아이폰으로 촬영해 화제를 모은 전작 <탠저린>(2015)에서 비전문배우를 기용한 바 있는 션 베이커 감독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다시 한번 아마추어를 주연으로 내세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스코트 무니의 엄마 핼리 역의 브리아 비나이트다. 마리화나가 그려진 비키니와 모자를 만들던 비나이트가 직접 디자인 한 옷을 입고 올린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보고 캐스팅 한 것이다. 배우 사만다 콴에게 3주간 연기를 배우고 촬영에 들어간 비나이트는 미혼모 핼리의 다층적인 면모를 고루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누가 조금만 속을 긁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바로 상대를 공격하는 무모함과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결코 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성애가 핼리의 미숙한 태도에 어른거렸다. 올해 중 비나이트가 출연한 세 편의 신작이 개봉할 예정이다.


알렉스 R. 히버트

<문라이트>

(Moonlight, 2016)

<문라이트>는 마이애미의 한 소년이 성장하며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따라간다. 유년, 청소년, 성인의 샤이론을 각자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데, 영화는 세 배우들이 모두 한 사람의 눈빛을 가졌다고 믿게 만드는 마법을 선사한다. 알렉스 히버트가 연기한 유년시절의 샤이론은 그 시작점이다. 아담하고 유약한 몸 때문에 'little'이라 불리는 샤이론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가 아닌, 동네에서 마약상으로 이름을 떨친 후안(매허샬라 알리)이다. 아이들을 피해 어둠에 숨어 있던 샤이론은 가림막을 뜯어내고 나타난 후안을 아버지처럼 따른다. 언제나 주눅들어 있던 그는 후안이 내어주는 넓은 품 안에서 용기와 희망을 더듬는다. 학교 연극 선생님이었던 교장 역의 배우 타니샤 사이델의 추천으로 난생 처음 오디션을 보게 된 히버트는 절망과 희망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샤이론의 나약한 얼굴을 각인시켰다. <문라이트>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히버트는 마블의 <블랙 팬서>(2018)와 쇼타임의 드라마 <더 치>에 참여하며 현재 주목 받는 흑인배우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2018)

구태여 이름의 의미를 되뇌일 필요도 없다. 그저 스틸 한 장만을 보자마자 우리는 <행복한 라짜로>의 주인공 라짜로가 선인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다. 커다랗고 짙은 이목구비에 묻어나는 선한 기운과 과하지 않게 다부진 체격은, 자본가에게 착취 당하는 사람들마저 착취하는 존재를 둘러싼 신비로운 우화에 빠져들 만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평생 영화에 출연하는 자신을 상상에도 붙여보지 않았던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수업을 듣고 있는 (그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교실에 찾아온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스탭의 눈에 띄어 <행복한 라짜로>에 출연하게 됐다. 로르바케르와 그의 스탭이 타르디올로를 라짜로 역에 캐스팅 한 이유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영화 마지막을 보고 나면 그 예상이 옳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