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비밀은 없다>를 보는 내내 손예진의 명연에 감탄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손소라 역의 최유화라는 배우에 대해 곱씹었습니다. 어디서 저런 배우가 튀어나온 걸까...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무려 2010년부터 활동해온 배우였습니다. (영화기자로서 순간 부끄러움이...) 최유화의 얼굴을 다시 만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8월 말엔 <최악의 하루>에서, 몇 주 후 <밀정>에서도 그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 인식되면 좀처럼 잊어버리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그녀니까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그녀를 만나, 최유화가 여름, 가을 두 계절이 걸쳐 선보인 세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해 인터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 <밀정>, <비밀은 없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두 달 남짓 사이 <비밀은 없다>, <최악의 하루>, <밀정> 세 편의 영화가 개봉했어요. 개봉 전후, 어떻게 보내셨어요?
영화들이 개봉하기 전 3달 정도 미국에서 지내다 왔어요. 돌아와서 지금 회사(에코글로벌그룹)랑 계약했어요. 개봉한 후엔 시사회나 영화 쫑파티 같은 데 참석하면서 함께 작업했던 분들 오랜만에 만나고 그랬죠. 아, 광고랑 뮤직비디오도 촬영했고요.
개봉작들에 주목이 확 쏠리면서 영화계 사람들과의 조우도 많아졌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아서 만나본 적은 없어요. 일부러 그렇게 안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혼자만의 시간을 너무 좋아해요. 일을 꽤 오래 하긴 했지만, 일반인 친구들이 훨씬 더 많아요. 연기를 늦게(그녀는 26살에 배우로 데뷔했다) 시작해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네요. 평소엔 원래 친했던 친구들이랑 만나다 보니까 시사회 같은 행사가 있어야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게 돼요. 물론 그땐 그 시간엔 되게 충실하되, 따로 만나는 건 우선 순위의 친구들을 보게 돼요.
2010년 <위대한 계춘빈>으로 데뷔했죠. 지난 5년간의 활동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나요?
연기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100% 체험하고 그걸 표현하는 게 아니라서 저마다 감정의 크기도 다른 거잖아요. 조그만 일을 가지고도 더 크게 표현하고, 이런 일을 가지고도 저렇게 대입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시간이 차차 쌓여서 어떤 경험으로 남았을 거예요. 그게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지나면서 돌아보니, 시간의 힘이 있는 거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많든 적든 경험이 쌓이니까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요.
작년엔 매니저 없이 혼자 일했다고 들었어요. 그런 와중에 깨달은 바도 클 것 같아요.
작년에 전 회사를 나와서 혼자 일하던 시기가 부쩍 많이 성숙해진 시간인 거 같아요. <밀정> 촬영 때 매니저 없이 혼자 차를 운전해서 남양주 영화 촬영소까지 가야 했어요. 오랫동안 장롱면허였는데 부랴부랴 운전을 다시 배워서 남양주까지 그 먼 거리를 어찌저찌 처음 간 거죠. 보통 촬영장에 가면 매니저들이 미리 자리를 마련해주는데, 혼자 다닐 땐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제가 케어해야 했으니까 사람들의 삶이 더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촬영 다 마치고 미국에서 석달 간 지내던 시간도 좋았고요.
미국엔 여행 차원으로 가신 건가요?
운 좋게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찾게 돼서 그 근처에서 살았어요. 너무 행복해서 하루하루 날짜를 셌어요. 90일짜리 이스타 비자였으니 “시한부의 인생은 이런 걸까?” 하면서. 그냥 걷다가 잔디에 눕고 싶으면 눕고, 공연 보러 다니고, 서점도 찾아다니고, 그렇게 하루하루 보냈어요.
<비밀은 없다>, <최악의 하루>, <밀정>
세 영화의 작업 순서는 어떻게 되죠?
<비밀은 없다>는 찍은 지 거의 2년 정도 됐을 거예요. 음... 제가 기억력이 좀 심하게 짧아서... (웃음) <도리를 찾아서> 보면서 완전히 공감했어요. 도리가 진짜 중요한, 자기 부모님을 안 잊으려고 하다가 결국 찾아내잖아요. 진짜 중요한 건 결국 안 잊을 건데, 세세한 것들은 그때 팍 집중하고 끝나면 금방 잊어요. 책이나 영화나 여러 번 본 게 아닌 이상 한번 보고는 당시의 느낌만 기억하지, 캐릭터 이름이나 줄거리 같은 건 자세히 기억하진 않아요. 아무쪼록 <최악의 하루>를 <밀정>보다 먼저 찍었을 거예요. 영화에서 머리 안쪽이 탈색돼 있는데 그게 원래 제 머리였거든요. 그거 다 찍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한 다음에 <밀정>을 찍었죠. <최악의 하루>랑 <밀정>이 겹치진 않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을 거예요.
<비밀은 없다>는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어요?
<쎄시봉>(2015) 할 때 CJ 관계자가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님 신작에 너랑 너무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고 귀띔해주셔서 작품을 알게 됐어요. 회사에 시나리오가 들어와서 보는데 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디션 보는 날에도 (최유화가 연기한 손소라처럼) 배에 뭘 넣어서 임산부처럼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갔어요. 임산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최악의 하루>와 <밀정>은요?
영화 개봉 전에도 후반 편집 때 친한 감독님들끼리는 서로 공유를 한대요. 김지운 감독님과 김종관 감독님 두 분 모두 그때 <비밀은 없다>를 좋게 보시고 이경미 감독님 통해서 오디션을 제안하셨어요. <비밀은 없다>가 저한테 너무 큰 작품인 셈이죠.
세 감독님 모두 어떤 이유로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직접적으로 막 칭찬을 받고 그러진 않았어요. 왜, 진짜 너무 서로 좋아하는 사이들이면 너는 이래서 좋아, 저래서 좋아 굳이 얘기하지 않잖아요. “다음 작품 있으면 당연히 같이 해야지” 정도로 말하는 정도지. “제 장점이 뭐예요?”라고 물어본 적도 없어서 솔직히 모르겠어요. 감독님들 직접 인터뷰 하실 때 한번 물어봐주세요.(웃음)
세 캐릭터 가운데 누가 가장 최유화 씨와 닮았을까요?
<밀정>의 김사희요. 비서라는 직업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서 처음에 좀 헤맸는데, 김지운 감독님이 “김사희는 퇴근할 때 뭐 할 거 같아?”라고 물으시며, “김사희는 그냥 너야. 너 문화생활 많이 즐기잖아. 퇴근하면 친구들이랑 좋은 것 보러 다니고, 멋도 낼 줄 알고, 그런 게 김사희야”라고 조언을 덧붙여주셨어요. 순간 확 훤해지는 거예요. 현장에서도 다 저를 김사희라고 불렀어요. 촬영 다 마쳤을 때도 “사희야, 너무 수고했어!”라고 해주시고. 그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 정말 기분 좋더라고요.
<최악의 하루>에선 일본어를, <비밀은 없다>는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해요. 특별히 준비한 과정이 있나요?
외국어였지만 오히려 <최악의 하루>는 준비하기에 수월했어요. 이와세 료 씨가 일본 사람이라서 일본어 통역하는 선생님이 늘 함께 계셨는데, 그 분한테 밀착해서 배울 수 있었거든요. 더군다나 그 선생님의 말투가 꼭 제가 연기한 현경 같아서 편했어요. 품은 <비밀은 없다>가 더 많이 들었죠. 제가 아는 대구 사람들의 연락처를 받아서 대사를 한 번씩 읽어달라고 하고, 나중엔 직접 대구에 내려가기도 했어요. 대구 사투리라는 게 모두 저마다 달라서 그 표준을 맞추느라 무지 애먹었어요.
손소라와 현경의 캐릭터 구축 과정은 어떻게 하셨나요?
손소라는 뭉크의 그림을 떠올렸어요. 아주 어두컴컴한 이미지의 그림이요. 사실 살면서 너무 겪기 싫은 일이잖아요, 있어서도 안 될 일이고. 그래서 손소라는 언제나 울음을 참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손소라가 원래 독한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연기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 가난하지도 않은 집에서 자라서 교사가 된 아주 평범한 여자인데,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점점 독해진 거죠. 운 좋게도 제 첫 촬영이 손소라가 김종찬(김주혁)에게 반하는 신이라 손소라의 감정을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었어요.
<비밀은 없다>는 감정선이 뚜렷해서 오히려 접근하기 편했다면, <최악의 하루>는 표정도 희미한 채 한국말로 해도 어려운 대사를 일본어로 발화하는 게 전부라 더 어려웠어요. 제 신 외에 다른 모든 장면들이 재미있잖아요. 그렇게 빵빵 터지다가 제가 나오는 장면에서 별안간 욕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편집되는 숏 없이 딱 영화에서 보이는 것만큼 찍었거든요. 사실 비주얼에 크게 신경 쓸 대목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시선을 붙들어서 관객들이 그 대사를 들을 수 있도록 현경은 무조건 예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현경은 료헤이(이와세 료)의 환상 같은 인물이죠.
혹시 손소라와 김사희의 전사 같은 것도 설정해두셨나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손소라는 진짜 평범한 여자였어요. 그러다가 평소 팬이었던 아나운서 출신의 정치인 김종찬을 만나고 반한 거죠. 그런데 그 사람도 자길 좋아하니까... 그냥 진짜 순간의 끌림이었는데,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던 거예요.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닌 거죠. 민진(신지훈)이를 부러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제가 보면 중학생 애들이 가장 잔인하거든요. 나쁜 짓을 할 때에 멈춤이 없어요. 하필 그 시기의 애들을 가르치다가 그런 흉을 당한 거죠.
김사희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맞는 걸 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잘 살 수 있게끔 순간순간 선택을 하는 여자. 마지막 폭탄 테러에 가담할 때도 돈을 받잖아요. 물론 한국 사람이긴 하니까 조국을 택한 것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대의 이런 것보다 자기가 더 잘 살기 위해서. 그런 사람이 나쁜 건 아닌 거잖아요.
<밀정>에선 대부분 송강호 씨와 같이 붙어다니죠.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없었나요?
저희가 중국에서 촬영하다 보니까 스탭들이 같은 호텔에 묵었어요. 송강호 선배님이랑 마주칠 일이 많았는데, 하루는 제가 선배님한테 드레이크(Drake)의 음악을 들려드렸어요. ‘Hotline Bling'이 유명할 때였거든요. 송강호 선배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시고. 김광석 노래였는데... 또 까먹었어요.(웃음) 아무튼 세대와의 교합이라고 해야 하나? 전 되게 뿌듯했어요. “유화는 진짜 유화만의 리듬이 있다”고, 귀여워해주셨던 거 같아요.
올해 들어 최유화 씨 팬이 더 늘었을 텐데, 이른바 ‘최유화 정주행’에서 어떤 작품을 특히 권하고 싶으세요?
일단 배우로서의 첫 작품인 드라마 <위대한 계춘빈>이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날것으로 연기했어요. 연기가 전공이 아니라서 그냥 자유롭게 생각 닿는 대로 했어요. 제 딴엔 “얘는 이런 애니까 커피 두 잔을 주는 척하면서 쓱 빼야지” 혼자서만 생각하고 연기하면, 상대역이었던 정경호 오빠는 바로 캐치하고 황당한 표정으로 그 행동을 살려준 적도 있어요. 그런 자유로움이 좋았어요. 그리고 <러브픽션>. 하정우 오빠, 공효진 언니 모두 제가 너무 좋아하는 배우라 촬영 내내 그저 재미있었어요. 게다가 완전 쌩얼로만 나오니까, 그때 사람들이 저를 가장 많이 알아봤어요. 원래 제가 연하게 안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저를 몰라보는 편이거든요.
연기에 대해 갈팡질팡할 때 길잡이가 돼주는 작품 같은 게 있나요?
캐릭터에 따라 접근 방법이 다를 수 있어서 특정 작품의 연기를 보진 않아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이 연기한 걸 가지고 영감을 받지는 않으려고 해요.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연기를 보게 되지만, 그때그때 인상만 기억할 뿐이에요. 오히려 영화보단 음악과 그림으로 감정을 끌어낼 땐 있죠. <비밀은 없다> 할 땐 미스터 허드슨(Mr Hudson)의 ‘There Will Be Tears’를 듣거나 뭉크의 그림들을 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지속시켰어요.
새로운 회사가 다니엘 헤니, 수현 씨가 소속된 곳이고, 외모도 굉장히 서구적이잖아요. 해외진출을 노려봄직도 한데요.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하고 싶죠. 좋은 작품, 좋은 감독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외국에선 배우에게 나이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 가장 끌려요. 겉모습만 어려 보이면 오랫동안 어린 역할을 할 수 있대요. 한국은 왜 그렇게 나이를 신경 많이 쓰는 걸까, 그게 늘 의문이었어요. 늘 그런 생각을 하다 <밀정> 때 김지운 감독님도 저한테 미국이나 유럽 되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해외에 대한 생각이 좀 더 트였어요.
올해 더 공개될 작품은 없는 건가요?
이제는 없어요. 얼마 전 두 작품을 오디션 봐서 최종까지 갔는데, 모두 떨어졌어요. 정말 좋은 캐릭터였는데, 너무 아쉬워요! 다시 시작해야죠.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