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짐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음악가라 칭해도 손색이 없는 아티스트다. 영화음악 작업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 세계 곳곳을 돌며 자신이 만든 음악들을 최대치로 즐길 수 있는 콘서트를 진행하면서 마에스트로의 진면모를 보여줬다. 2017년 가을 한국을 찾았던 한스 짐머가 오는 9월 28일, 29일 다시 한번 내한공연을 갖는다. 그의 두 번째 서울 라이브를 기념하며, 한스 짐머 최고의 사운드트랙을 추려 소개한다.


레인 맨

Rain Man, 1988

펑크/뉴웨이브 신에서 활동하던 한스 짐머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성공은 최고의 복수다>(1984)로 영화음악가의 출사표를 던졌다. 멘토와도 같은 작곡가 스탠리 마이어스와의 공동 작업 체제로 영국 영화계에 점차 이름을 알린 그는 할리우드 영화 <레인 맨>으로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된다. <레인 맨>의 음악을 만들 아티스트를 모색하던 배리 레빈슨 감독은 영국 영화 <갈라진 세계>(1998) 속 음악을 인상 깊게 들었던 아내의 추천으로 짐머의 작업을 알게 됐다. 대개의 로드무비가 쟁글대는 기타와 스트링 위주의 사운드를 내세운 것에 반해, 짐머는 (그의 시그니처 사운드라 할 만한) 신디사이저와 스틸 드럼을 적극 활용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코어를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다.


라이온 킹

The Lion King, 1994

알란 멘켄의 음악과 함께 화려한 전성기를 통과하던 디즈니는 <라이온 킹>에 멘켄이 사정상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직접 아프리카를 방문해 합창단과 타악 연주를 녹음해온 <파워 오브 원>(1992)의 한스 짐머에게 스코어를, 영국의 거장 엘튼 존에게 주제가를 의뢰해 <라이온 킹> 사운드트랙을 완성했다. 짐머가 아프리카에 날선 비판을 담은 <파워 오브 원>으로 방문을 금지 당하는 바람에 아프리카에서의 작업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파워 오브 원>에서 협업한 남아프리카 뮤지션 레보 M과 다시 한번 작업하면서 평화와 위기가 공존하는 프라이드 랜드의 우렁찬 에너지를 그려냈다. 스코어뿐만 아니라 엘튼 존이 작곡한 ‘Circle of Life’와 ‘Be Prepared’도 짐머가 편곡을 맡았다. 데뷔 이래 근 10년 만에 처음 작업한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쥔 짐머는 이후 <이집트 왕자>(1998), <쿵푸 판다> 시리즈, <마다가스카> 시리즈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에 참여했고, 25년 만에 제작된 <라이온 킹> 실사 프로젝트의 음악을 만들었다.


씬 레드 라인

The Thin Red Line, 1998

걸작 <천국의 나날들>(1978) 이후 두문불출 하던 테렌스 맬릭 감독은 무려 20년 만에 내놓는 신작 <씬 레드 라인>을 찍기도 전에 짐머에게 음악을 요청했다. 아티스트의 작업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어야만 가능한 결정. 짐머는 <페이스 오프>(1998)의 음악감독 존 파월과 함께 쓴 4시간이 넘는 분량의 스코어들을 보냈고, 맬릭은 현장에 음악을 틀어놓고 촬영에 임했다. 전쟁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투 신의 폭력 묘사보다는 전장에 질식할 듯한 공기를 견뎌내는 병사들의 마음을 그리는 데에 보다 집중한 작품인 만큼 <씬 레드 라인>의 스코어는 짐머의 여타 작업에 비해 묵직하게 들린다. 일본의 전통악기 사쿠하치와 고토를 활용해 이국적인 느낌까지 더했다. 9분 짜리 대곡 'Journey to the Line'은 (놀란의 <덩케르크>를 비롯해) 짐머 특유의 똑딱대는 시곗바늘 소리 모티프의 원형이 되는 트랙으로 그가 음악을 만든 <진주만>(2001), <맨 오브 스틸>(2013), <노예 12년>(2013) 등의 예고편에도 사용됐다.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2000

리들리/토니 스콧 형제는 한스 짐머가 이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시절부터 그와 많은 작품을 함께 해왔다. <글래디에이터>는 <델마와 루이스>(1991) 이후 오랜만에 리들리 스콧과 한스 짐머가 다시 만난 작품이다. <이집트 왕자>에서 이스라엘의 소프라노 오프라 하자와 작업했던 짐머는 다시 한번 하자의 목소리를 빌리려 했지만, 하자가 43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게 되어 마이클 만의 <인사이더>(1999)에 인상적인 음악을 선사한 리사 제라드를 초대했다. 비록 제라드가 영화의 메인 테마를 쓰진 않았음에도 짐머는 그의 존재가 <글래디에이터> 작업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 판단에 제라드의 이름을 함께 크레딧에 올렸다. 왕위를 이어받을 황제의 충신에서 노예로 전락하게 된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검투사로 생존하면서 복수를 다짐하는 이야기에 제라드 특유의 신비한 보컬이 더해져 다채로운 무드를 살릴 수 있었다. 영화가 2000년 개봉작 중 흥행 4위를 오를 만큼 성공한 덕분에 사운드트랙의 판매고도 좋았지만, 홀스트의 <행성>과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연작을 표절했다는 시비에 오르기도 했다.


<다크 나이트> 3부작

'The Dark Knight' Trilogy

2005/2008/2012

다크 나이트

<배트맨 비긴즈>의 음악은 영화음악계의 두 명장 한스 짐머와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공동 작업이다. 먼저 영화의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한스 짐머가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오랫동안 바랐던 제임스 뉴튼 하워드와 공동 작업을 제안하면서 성사된 프로젝트다. 짐머와 하워드는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테마를 각기 다른 곡조로 만들어 캐릭터의 정체성을 살리고자 했고, 근 12주간 LA와 런던을 오가며 작업한 끝에 <배트맨 비긴즈>의 음악을 완성했다. 협업은 <다크 나이트>까지 이어졌다. 배트맨보다 큰 존재감을 자랑하는 조커의 테마 'Why So Serious?'는 저 유명한 오프닝에 사용돼 뭇 관객을 사로잡았다. 전자 첼로, 바이올린 솔로, 기타, 스트링이 어우러진 9분의 대곡은 짐머의 음악적 뿌리와도 같은 크라프트베르크를 연상케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자신이 시리즈에 더 보탤 공이 없다는 판단한 제임스 뉴튼 하워드 없이 한스 짐머만 음악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짐머는 팬들과의 Q&A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사운드트랙이 3부작의 모든 것을 끌어모아 작별을 고한다는 점에서 셋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밝힌 바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

'Sherlock Holmes', 2010~11

가이 리치 감독은 <다크 나이트> OST를 틀어놓고 편집을 진행할 만큼 한스 짐머에 푹 빠져 있었다. 짐머 역시 리치의 제안에 퍽 기뻐했지만 <다크 나이트>를 답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찌감치 리치에게 <셜록 홈즈>의 음악은 <다크 나이트>와는 사뭇 다를 것이고, 영국 켈틱족의 펑크 밴드 포그스가 루마니아 오케스트라를 만난 듯한 음악이 될 거라고 설명했다. 짐머가 꺼내든 비장의 무기는 빈티지 악기와 집시 음악의 무드였다. 반조, 헝가리의 전통악기 침발롬, 끼긱대는 바이올린, 거기에 200달러에 구입한 음 나간 피아노 등이 악기로 동원돼 엉뚱한 탐정 콤비와 19세기 말 런던의 분위기를 구현했다. 이듬해 발표된 후속작 <그림자 게임>을 위해 짐머와 리치는 슬로바이카,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방문해 집시 음악을 보다 깊게 조사하고, 그 분야 장인들의 연주를 녹음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인셉션

Inception, 2010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성공으로 이끈 한스 짐머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후 <인셉션>,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크>(2017)까지 협업을 이어나갔다. <인셉션>은 그 중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놀란의 요청으로 짐머는 영화 촬영 중에 스코어를 작곡했고, 일렉트릭 사운드가 물씬한 결과물로 완성됐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든 사운드트랙의 기타 연주를 <인셉션>에 녹여내고 싶었던 짐머는 80년대 가장 위대한 영국 밴드로 손꼽히는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자니 마를 초청했다. 신디사이저와 스트링 사운드를 유영하는 자니 마의 연주는 그리움과 슬픔으로 가득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심경과 뒤틀리는 시공간을 극대화 하는 역할을 해냈다. 마지막 트랙 'Time'이 오랫동안 한스 짐머 콘서트의 피날레를 장식해온 것만 봐도 짐머가 <인셉션> 사운드트랙에 갖는 애착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그래미 등에 영화음악상 후보에 올랐지만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소셜 네트워크>(2010)에 밀려 결국 무관에 그쳐야만 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