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룸>

닮은 듯 다른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세계. 시각과 청각을 동원한 영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똑같지만, 애니메이션만의 과장된 표현법과 리드미컬함, 실사영화 특유의 디테일한 연기나 장면 구성은 각 매체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몇몇 감독들은 두 분야 모두 도전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보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실사영화까지 장악한 감독들을 소개한다.


<르네상스> → <더 룸>

크리스티안 볼크만

크리스티안 볼크만 감독

<르네상스>(왼쪽), <더 룸>

케이트(올가 쿠릴렌코)와 맷(케빈 얀센스)은 이사한 집에서 비밀의 방을 발견한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방. 이 기묘한 방의 이야기를 다룬 <더 룸>은 크리스티안 볼크만 감독이 무려 13년 만에 선택한 장편 차기작. 그의 전작은 2006년에 공개한 <르네상스>. 2054년, 대기업 아바론에 의해 모든 행동이 기록되는 파리에서 과학자 일로나 납치 사건을 맡게 된 경찰 카라스의 수사극이다. <르네상스>의 극명한 흑백 대비를 보여주는 비주얼은 모션 캡처 후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완성시켰다. 덕분에 <르네상스>는 7년이란 기나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이후 볼크만 감독은 프랑스 가수 자즈(ZAZ)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했고, <더 룸>을 집필·연출했다. <르네상스>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비주얼로 승화한 감독답게 <더 룸>에서도 인간의 욕망과 첨예한 갈등을 선명하게 내비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그는 찰리 채플린의 명작 <키드>의 100주년을 기념할 SF 애니메이션을 제작 중이다.


<일루셔니스트>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실뱅 쇼메

실뱅 쇼메 감독

<일루셔니스트>(왼쪽),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너무나도 매혹적인 실뱅 쇼메의 작품. 때론 그의 이름을 몰랐을 때가 나았던 것 같다. 차기작을 보기까지 항상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첫 단편 <노부인과 비둘기>에서 첫 장편 <벨빌의 세 쌍둥이>까지 6년, 그다음 <사랑해, 파리>는 (옴니버스 영화인데도) 3년, <일루셔니스트>까지 4년, 첫 실사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까지 3년. 그리고 지금까지 6년 넘게 장편 차기작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연출할 당시, 그는 대사를 최소화하고 음악과 움직임으로 감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 실사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는 대사가 많아지긴 했지만, 실어증에 걸린 피아니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테마를 그대로 이어갔다. 애니메이션을 작업한 자신의 딸에게 “영화야말로 마법이란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는 그는 영상 매체의 로맨티시스트임이 틀림없다. 현재 실뱅 쇼메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1000마일>을 작업하고 있다. <벨빌의 세 쌍둥이> 속 자전거 대회 ‘투르 드 프랑스’처럼 이탈리아의 자동차 경주 ‘밀레 밀리아’를 그릴 예정이다.


<아이언 자이언트>, <인크레더블> →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브래드 버드

브래드 버드 감독

<인크레더블>(왼쪽),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할리우드에는 ‘빵형’이 둘 있다. 하나는 브래드 피트, 하나는 브래드 버드.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으로 뽑히는 <아이언 자이언트>가 그의 장편 데뷔작. 소년 호가드(엘리 마리엔탈)가 숲에서 거대한 로봇 아이언 자이언트(빈 디젤)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 <아이언 자이언트>는 흥행 실패에도 명작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으며 회자되고 있다. 픽사로 자리 옮긴 후 브래드 버드 감독은 <인크레더블>, <라따뚜이>로 2연속 안타를 치면서 스튜디오의 전성기를 연 인물 중 하나가 됐다. <라따뚜이> 차기작으로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선택했는데, 아무리 천재 애니메이터라도 블록버스터 실사 영화는 무리 아니냐는 우려도 받았다. 그러나 <미션 임파서블> 특유의 팀플레이를 맛깔나게 살렸고, 부르즈 할리파의 수직적 이미지와 두바이의 모래 폭풍 비주얼을 극대화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기세를 이어갔다. 차기작으로 디즈니랜드의 ‘투모로우랜드’를 모티브로 한 <투모로우 랜드>를 연출했는데, 아쉽게도 이 영화는 흥행과 작품성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 덕분에(?) 다시 픽사로 복귀해 <인크레더블 2>로 능력을 입증했다. 차기작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으며, 그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제의를 받기 전 준비한 실사영화 <1906>의 향방이 묘연하다.

<투모로우 랜드>


<니모를 찾아서>, <월-E> →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

앤드류 스탠튼

앤드류 스탠튼 감독

<월-E>(왼쪽),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

커리어 곤두박질. 앤드류 스탠튼의 실사영화 연출은 참패였다. 그는 픽사에서 존 라세터와 공동 연출한 <벅스 라이프>의 성공 이후 단독 연출작 <니모를 찾아서>로 픽사의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토이 스토리 3>가 경신하기 전까지 7년이나 유지했다). 또 현대인들의 무력한 일면을 강조하면서도 무성영화에 가까운 연출로 감성을 자아내는 <월-E>로 픽사의 명작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성을 선보였다. 그의 변화무쌍한 연출력에 주목한 디즈니는 소설 <화성의 존 카터> 실사화 수장으로 앤드류 스탠튼을 앉혔다. 걸출한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감독이니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영화사에 남을 만한 대실패. 영화는 그럭저럭 괜찮은 오락영화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원작의 인지도 부족, 때때로 과한 연출, 티켓 파워 없는 출연진 등이 겹치면서 역대급 흥행 참패를 겪었다. 그래도 앤드류 스탠튼은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가 있었기 때문에, 픽사의 차기작들에 각본이나 기획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6년, 자신에게 화려한 꽃길을 열어준 <니모를 찾아서>의 속편 <도리를 찾아서>로 재기했다. <도리를 찾아서>는 <토이 스토리 3>에 이어 월드 와이드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앤드류 스탠튼 감독에게 애니메이션 거장이라는 영광을 돌려줬다. <기묘한 이야기>, <베터 콜 사울> 등 미국 드라마 에피소드 연출에 손을 댄 걸 보니, 언젠가 다시 그는 실사영화로 돌아올 듯하다.


<슈렉> → <나니아 연대기>

앤드류 아담슨

앤드류 아담슨 감독

<슈렉 2>(왼쪽),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앤드류 아담슨이 계속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면, 애니메이션 시장의 판도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까? 비주얼이펙트 아티스트로 일하던 앤드류 아담슨은 비키 젠슨과 함께 <슈렉>을 연출했다. 디즈니식 동화를 완전히 비틀면서 전 세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고, 때마침 아카데미 시상식에 신설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최초의 감독으로 기록됐다. 뒤이어 개봉한 <스피릿>과 <신밧드 : 7대양의 전설>의 흥행 실패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위태로울 때, 그가 다시 메가폰을 잡은 <슈렉 2>는 그해 최고 흥행 수익(9억 1983만 달러)을 올리며 회사를 한숨 돌리게 했다. 모두가 주목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됐지만, 앤드류 아담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과감한 도전을 한다.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서막을 열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연출을 맡은 것. 첫 실사영화 연출작으로 세계 3대 판타지 작가 중 한 명인 C.S. 루이스의 서사시를 맡았으니 우려의 눈길도 많았지만, <나니아 연대기> 특유의 종교적이고 동화스러운 판타지 세계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고 평가받았다. 이어진 속편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도 대규모 전투 장면을 깔끔하게 스크린에 옮기면서 안정적인(나쁘게 말하면 다소 애매한 특색의) 연출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앤드류 아담슨은 블록버스터 대신 <미스터 핍>과 <태양의 서커스 월드 어웨이>의 공연 실황 영상을 연출하고 휴식기를 가졌다. 지금은 어린이 동화 <큐리어스 조지> 실사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의 비주얼 이펙트 노하우가 실사영화를 만나 어떤 시너지를 낼까.


<돼지의 왕>, <사이비> → <부산행>

연상호

연상호 감독

<돼지의 왕>(왼쪽), <부산행>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그렇게 풍족한 편이 아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에만 몰두해도 성공하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연상호 감독은 그런 한국 애니메이션이 낳은 독특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대다수 관객들은 <돼지의 왕>으로 그를 처음 만났겠지만, 이 영화가 나온 2011년보다 휠씬 전 1997년부터 단편 작업을 해왔다. 단편 <지옥 -두개의 삶>과 <사랑은 단백질>을 거친 연상호는 첫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을 완성시켰다. <돼지의 왕>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받고, 이듬해 칸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연상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차기작 단편 <창>과 장편 <사이비>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낸 연상호에게 실사영화 연출 제의가 들어왔다. 그 영화가 2016년 유일한 천만 관객 돌파 영화 <부산행>이다. <부산행>과 느슨하게 연계된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다소 격한 혹평을 받을 때, <부산행>은 연상호의 날카로운 사회 비판이 드라마와 액션에 잘 버무려져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의 기세를 몰아 바로 차기작 <염력> 연출에 돌입했다. 그리고 <염력>은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했지만 대성공한 <부산행>과 정반대로 기대작이란 타이틀 아래에서 쓸쓸히 참패를 맛봤다. 현재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반도>란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강동원, 이정현, 이레 등이 출연하는 이번 작품이 연상호에게 다시 흥행의 기쁨을, 관객들의 찬사를 들려줄 수 있을까.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