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화 무술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무술 가운데 '영춘권', '홍가권', '칼리 아르니스', '시스테마', '크라브 마가', '케이시 파이팅 메소드'의 무술 특징을 다뤄보는 21세기 영화 무술의 지형도, 2부를 시작한다. 앞서 1부에서는 아이언맨도 엽문을 따라했다는(?) 영춘권과 홍콩 무협영화의 홍가권에 대해 다뤄봤다. 아직 1부를 못 봤다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고 2부를 이어 보시길.


칼리 아르니스(Kali Arnis), 실랏(Silat)
<아저씨>
<레이드 2>

칼리 아르니스(Kali Arnis), 실랏(Silat)의 뿌리는 하나라는 설이 있다. 고대 인도의 무술 칼라리파야트(Kalarippayattu)가 필리핀으로 전파되면서 칼리 아르니스(Kali Arnis)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지로 퍼지면서 실랏(Silat)이 되었다는 유력한 설이 그것이다.
두 무술의 기법에서 보이는 상당한 유사성은 그 기원의 밀접함을 짐작케 하며, 실제로 이 둘을 같이 가르치는 도장이 많다.(단, 실랏은 칼리보다 무게 중심을 낮게 잡는다.) 칼리 아르니스의 경우, 무술 자체는 이전부터 전승되어왔으나 <사망유희>(1978)에 출연한 무술가 댄 이노산토의 스승이었던 프로로가 칼리(Kali)라는 이름을 널리 퍼뜨렸으며, 1960년대 필리핀 정부가 무술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아르니스(Arnis)라는 단어를 정착시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칼리와 실랏은 단타와 꺾기, 방어와 동시에 반격을 넣는 수기 중심의 초근접전 공방에 특화된 무술로 20세기에 고안된 군용 특공무술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특히 무기술에서 짧은 스틱이나 크리스, 카람빗(갈고리 형태로 휘어진 단검. 대개 손잡이 끝에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고리가 달려있다.) 같은 단검을 활용한 나이프 파이팅 기술이 현대 특공무술에 미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본 슈프리머시>

현대 군용무술에 끼친 영향과 파급력으로 인해 칼리와 실랏은 훈련받은 비밀 요원들의 무술로 자주 등장한다. <본 아이덴티티>(2002)는 칼리와 실랏이 접목된 성공적인 사례로 현대 액션영화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신호탄이었다. 스턴트 코디네이터였던 제프 이마다는 제이슨 본의 무술로 칼리와 실랏에 절권도를 절충한 안무를 고안해냈고, 정해진 무기 외에도 주변의 사물을 있는 대로 활용하는 칼리의 호신술 컨셉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볼펜을 적의 손에 꽂아버리거나 <본 슈프리머시>(2004)에서 말아 쥔 신문과 전선까지 사용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인 경우.(단, <본 얼티메이텀>에서 본이 잠시 고전하게 만드는 맞수 데시의 기술에는 카포에라의 기법이 일부 녹아들어있다.)

한국 영화에서는 <아저씨>(2010)가 칼리와 실랏을 끌어들인 시효격인 작품.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의 영향도 역력하나, 영화임에도 실제 급소로 날아오는 공격, 피하지 못하는 경우 치명타가 되지 않도록 다른 신체부위로 빗겨내는 등 실전성을 부각한다는 측면에서 <아저씨>의 액션은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는 진일보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킬러 람로완이 쓰는 카람빗 나이프의 등장은 <아저씨>의 액션이 칼리 아르니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

<레이드: 첫번째 습격> 개봉 당시 국내 내한했던 배우 이코 우웨이스, 야얀 루히안

실랏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영화로는 가렛 에반스의 <메란타우>(2009)와 <레이드: 첫번째 습격>(2011), <레이드 2>(2014)가 대표적이다. 웨일즈 출신 영국인인 가렛 에반스는 일본계 인도네시아인 여성과 결혼해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뒤 다큐멘터리를 위한 준비과정에서 실랏을 알게 되었고, 이 무술을 과거 자신이 열광했던 1980~90년대 홍콩 영화의 바탕에 접목할 발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레이드> 시리즈의 성공은 실랏의 인지도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주인공을 맡은 이코 우웨이스, 무술감독 야얀 루히안은 <레이드> 시리즈의 팬이었던 J.J 에이브람스의 요청으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2015)에 카메오 출연까지 하게 된다.


시스테마(Система: Systema), 크라브 마가(Krav Maga)
<회사원>

러시아의 격투기 시스테마는 소비에트 시절 스페츠나츠 등의 특수부대가 익히던 군용무술을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다른 무술의 영향이 덧대어져서 체계를 다듬은 무술이다. 크라브 마가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경찰과 군대를 상대로 무술을 지도하는 수석 교관이었던 이미 리히텐펠트가 복싱, 무에타이, 칼리, 영춘권, 가라테의 타격기와 유도, 주짓수, 합기도, 레슬링의 유술을 접목해 창시한 무술. 현대에 군사 훈련과 호신술의 목적으로 다듬어진 신종 무술이기 때문에 역사가 오래 되어 체력의 단련과 수양의 측면이 강조되는 전통무술에 비해, 백병전에서의 살상 내지 상대를 무력화하는 실전에서의 효율성에 중점을 둔다. 시스테마는 몸의 긴장을 푼 상태에서 상대의 움직임이 보이는 흐름을 따라가며 정확히 급소를 가격하는 걸 목표로 하며, 중국 무술의 발경과 흡사한 타격과 유술의 기법을 쓰는 등 상당기간의 수련이 필요한 반면(시스테마의 기법들은 상당부분 중국 내가권의 요결과 흡사하다), 크라브 마가는 빠른 시간 내에 보급하기 위한 훈련의 효율성,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대응을 위해 비교적 단순한 동작의 단타와 꺾기로 짜여 있는 것이 특징.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2012), 공유 주연의 <용의자>(2013)에서 시스테마에 기반을 둔 무술 안무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유술에 가까운 시스테마의 특성상 동작이 눈에 띄어야 시각적 쾌감을 살릴 수 있는 액션영화에 맞게 타격기 중심의 다른 무술을 조합해서 짠 액션이므로 이 점을 유념하면서 보아야 한다. 단일 무술만 가지고서는 영화 액션의 합과 동선을 설계하기가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테이큰>

크라브 마가의 경우 CIA, FBI, 델타포스의 훈련에도 도입되고 호신술로도 민간에 널리 전파된 만큼 시스테마보다 대중매체에서의 노출빈도가 높은 편이다. 마이클 앱티드의 <이너프>(2002)에서 제니퍼 로페즈가 수련받아 구사하는 모습으로 처음 영화에 적용되었으며, <테이큰>(2008)에서는 리암 니슨의 건장한 체구와 맞물려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솔트>(2010)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구사하는 무술 또한 크라브 마가. <본 레거시>(2012)를 보면 애런 크로스 역의 제레미 레너가 실제 크라브 마가 수련자이기에 영화상에서 크라브 마가 특유의 신속하고 직관적인 타격술을 관찰할 수 있으며 한국영화에서는 <동창생>(2013)과 <잡아야 산다>(2016)가 크라브 마가를 도입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애니메이션으로는 심슨 일가족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온 <심슨 가족> 시즌 21 에피소드 16에서 바트 심슨이 크라브 마가를 수련한 소녀에게 가라테로 대들다가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케이시 파이팅 메소드(Keysi Fighting Method)
<다크나이트 라이즈>

케이시 파이팅 메소드는 스페인의 집시 출신 무술가 후스토 디에게스와 영국인 앤디 노먼이 1980년에 창안한 격투기 스타일이다.(앤디 노먼은 나중에 따로 독립하여 디펜스 랩(Defence Lab)을 세운다.) 길거리 싸움의 경험과 특수 부대 시절에 배운 군용무술, 댄 이노산토로부터 전수받은 절권도 등 여러 무술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신종 무술로 양 옆으로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보호하는, 팔극권의 양의(两仪)와 흡사한 기본자세를 취한다.
머리를 향해 오는 공격을 양손으로 방어하고 허리를 회전시켜 팔꿈치로 공격하거나, 그대로 상대방의 몸 중심을 파고들어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동시에 상대의 급소와 관절을 차례대로 공략해나가는 전투기법이 인상적이다. 초근접전에 적합하게 팔꿈치, 무릎의 활용도가 높으며 박치기도 케이시의 주요한 공격으로 종종 쓰인다.

창시된 지 얼마 안된 무술임에도 대중영화에서 케이시의 출연빈도와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와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배트맨의 무술로 도입된 것인데, DVD/ Blu-ray의 서플먼트에 수록된 스턴트 팀의 안무를 보면 영화에서는 액션 분량의 상당수를 날려버렸음이 드러난다. 이보다 케이시의 격투 스타일과 실전 운용을 잘 보여주는 건 최근 톰 크루즈 주연의 액션 영화들. <미션 임파서블 3>(2006)의 말미에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싸울 때 손을 머리 뒤로 한 채 허리를 축으로 삼아 팔꿈치로 가격하는 동작이 바로 케이시의 기술이다. <잭 리처>(2012)에서도 욕실과 좁은 복도에서 두 명의 적을 제압하거나 술집 밖에서 다수의 불량배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관절을 가격해 부수는 장면은 케이시 방식의 격투를 영화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낸 명장면이다.

영화평론가 조재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