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부산은 태풍 피해도 무찌른 영화 열기로 가득합니다. 영화제 안팎의 행사는 작년에 비해 축소됐다고 하지만, 올해 역시 보고 싶은 영화 티켓을 구하기 위해 밤새 줄을 서는 영화팬들의 모습을 곳곳에서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 20년, 30년 후에도 관객들이 지금처럼 밤새 줄을 서서 보고 싶은 영화를 기다리고, 보다 지쳐 극장에 들어가서는 숙면을 취하고 나와 후회하는 풍경이 지속될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 보기 방식이 개발될까요? 바로 이런 미래의 영화에 대한 고민을 담은 행사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열렸습니다. 지금 세계 영화인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상현실, 즉 VR에 관한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였지요.
지난 10일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열린 '2016 부산국제영화제 VR 국제포럼'에서는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해서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돌며 화제가 되고 있는 VR 단편 영화 <자이언트>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본다'는 표현보다는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더 어울릴, 신기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경험'한다고?
먼저 가상현실을 뜻하는 VR(virtual reality)이 무엇인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가지요. 관객들은 어두컴컴한 밀실 같은 공간에 단체로 들어가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볼까요? 그리고 왜 다같이 극장에 모여서 보는 걸까요? 이 조금은 바보 같은 질문 속에 영화라는 매체의 신비로운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 같은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주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는 주인공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도를 표하기도 합니다. 마블 영화를 볼 때는 어떤가요? 세계를 구하는 슈퍼히어로의 통쾌한 활약을 다같이 깔깔 웃으며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기도 하지요.
이쯤 되면 우린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서 '경험'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죠. 영화가 처음 탄생했을 때도 그랬다지요. 당시 사람들이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화면 밖으로 기차가 튀어나올까봐 깜짝 놀랐다고들 하잖아요. 그런 효과와 비슷한 의미이긴 합니다만, 우리는 이제 가상현실을 뜻하는 VR을 통해서 그 '경험'을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VR은 영화보다는 게임과 광고, 여행 등의 다른 분야에서 더욱 활발히 이용되고 있어요. 일단 예술적인 표현보다는 간접 '경험'을 우선시하는 VR 매체의 특성상 게임이나 여행 등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영화인들이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사실상 영화와 VR은 그 뿌리가 하나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부지런한 영화인들이 영화와 VR의 만남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마션>, <하늘을 걷는 남자>, <벤허> 등 최신 영화들의 한 장면을 관객들이 직접 VR 영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홍보 영상을 만들어 이벤트 형태로 관객들과 만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게 모두 앞으로의 영화와 VR의 산업 연계를 목표로 하는 사전 홍보활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영화와 만나는 VR
<인터스텔라>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VR과 영화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게임이 영화를 죽이지 않은
것처럼 VR 또한,
영화와 상호 보완 관계가
될 것이다.
확실히 VR은 보통의 영화가 줄 수 없는 감각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일단 보통의 영화처럼 사각의 스크린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글 같은 기기를 쓰면 영상이 360도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이기 때문에 관객이 한눈에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집니다. 고개를 어떤 방향으로 돌려도 영상이 펼쳐지게 되죠.
그런데 왠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것 같지 않나요? 대신에 관객이 어떤 사건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생생한 '몰입감'과 실제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는 '상호작용', 그리고 이것이 혹시 진짜 존재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실재감'이라는 가장 중요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시락통 같은 기기를 뒤집어쓰고 VR 영상을 보면 마치 스크린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수많은 감독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답니다. VR로 영화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대체 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즉, 뭘 찍어야 재미있을 것인가! 상상해보건대, VR로 영화를 만들면 관객마다 다른 영화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영상이 펼쳐지니까 정해진 것 없이 자유롭게 보고 싶은 영화 스토리를 골라서 볼 수 있게 될 것이고요.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멀티 엔딩' 영화도 가능할 겁니다.
단적인 예로, 오큘러스 스토리 스튜디오라는 곳에서 제작을 발표한 단편 애니메이션 <디어 안젤리카>(위 포스터)는 딸이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인데, 관객이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관객 각자의 시각적 경험이 달라질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영화가 눈앞에 펼쳐질지 정말 궁금하죠?
앞으로 VR 영화에서는 '한눈'에 보이는 정보의 양이 일반 영화보다 훨씬 많아질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영화는 사각의 스크린이라는 제한된 크기 안에서 배우들이 연기도 하고 풍경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제는 사방이 스크린이고 사방에서 온갖 장면이 펼쳐질 테니까요. 엄청난 영상들이 정신없이 펼쳐지겠죠?
VR에 대한, 그리고 VR 영화에 대한 소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이제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소개한 실제 VR 단편영화 <자이언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몇 해 전, 페이스북의 창시자 마크 주커버그가 'VR 산업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다!'라면서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자, 산업 전체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요. 영화계에서도 VR 영화를 위해 제임스 카메론,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등 거장 감독들이 다양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중입니다. 우리도 최근 정부에서 VR 산업에 4000억원 이상의 거액을 투자하겠다는 발표가 있었을 만큼, 이 분야는 미래 산업의 최전방에 놓인 '창조경제'의 일환인 것이죠.
아직까지는 VR로 영화를 만드는 데 여러 기술적인 제약이 있어 단편 영화를 넘어 장편 영화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비롯해서 여러 장비들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죠.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밀리카 젝 감독의 <자이언트>는 VR 영화 제작 기술의 빠른 발전에 힘입어 완성된 최신 기술 도입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영화를 보다!
VR 단편 <자이언트>
세르비아 출신의 밀리카 젝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세르비아에서 겪었던 분쟁 지역의 공포에 대해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감정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10여 편의 단편 영화,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면서도 그녀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던 와중에 그녀는 VR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접하게 됐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을 담아낼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느꼈던 전쟁터 한복판의 공포라는 것은 아무리 잘 표현한들 온전히 전달하기란 불가능하잖아요? 영화 역시도 어지간히 잘 만들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테지요.
올해 선댄스 영화제 뉴 프런티어 부문에서 처음 공개된 VR 단편 <자이언트>는 원인모를 재난 상황이 닥쳐오자 한 가족이 지하실로 대피한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이 낯설고 무서웠지만 아빠가 들려주는 '거인'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잠시 그 공포를 잊게 되지요. 밖에서는 이상한 굉음이 들려오고 천장이 흔들거립니다. 그 상황에서 엄마와 아빠는 '거인'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고 있지만 사실은 마음 속으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약 5-6분 정도 분량의 짧은 순간을 보여주는 영화는 VR 기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요. 관객들은 지하실 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구호물품과 잡동사니가 즐비한 지하실 풍경을 둘러볼 수 있게 됩니다. 외부 충격이 전해져 올 때마다 쌓아뒀던 지하실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와중에도 아빠는 딸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관객들은 정면을 바라보며 비통한 표정을 한 가족의 대화에 시선을 집중할 수도 있고, 움직이는 주변 사물들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위의 스틸컷에서 보이는 구도 그대로 VR 기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밀리카 젝 감독은 <자이언트>를 VR로 보게 될 관객들이 지하실이라는 밀실의 폐쇄성, 재난 상황에서의 급박한 긴장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영화 상영 자체를 어두컴컴한 밀폐 공간에서 했습니다. 비좁은 공간에서 VR 기기를 쓰고 <자이언트>를 보는 관객들은 그 폐쇄적 공포를 보다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 의도에 부합하는 완성도 뛰어난 단편 영화가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자이언트>가 VR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려는 몇 가지 시도는 박수받을 만합니다. 예를 들어서, VR이라면 응당 제공해야 할 것 같은 액션의 짜릿한 쾌감은 <자이언트>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오직 어두컴컴한 폐쇄 공간 안에서 가족들이 흐느낄 뿐이지요. 역동성? 물론 없지요. 카메라가 움직이지 안은 채로 배우들이 약간의 동작만 할 뿐입니다. 신기로운 체험? 물론 없습니다. 오직 극한의 위험에 놓인 가족 옆에 우리가 실제로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데 모든 최첨단 기술력이 동원된 것입니다.
게임 엔진으로 만든
실사 영화
밀리카 젝 감독의 <자이언트>가 VR 분야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실제 배우들을 그린 스크린 위에서 연기를 시켜 찍은 다음, 배경을 단순히 CG로 그려 합성한 것이 아니라 게임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 상영한다는 것입니다. 게임 엔진을 이용한 작업과 일반 CG 작업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쉽게 이해가 가능할 것이지만 그건 나름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첨부하자면, 이 영화는 엔비디아 쿼드로 M6000 GPU 기반의 HP Z840 워크스테이션에 의해 제작 및 상영됐습니다.)
게임 엔진을 기반으로 만든 <자이언트>와 같은 실험을 통해서 앞으로는 VR 영화의 속성, 즉 몰입감과 실재감과 상호작용 모두가 구현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앞서 설명한 VR 영화의 특징 가운데 관객 모두가 '다른' 영화를 볼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죠. 이야기와 관객과의 상호작용이 '실시간'으로 발생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게임을 즐기는 것과 똑같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물론 <자이언트>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자이언트>가 그 가능성을 실험해봤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버드맨>과 <레버넌트>를 함께 작업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 감독이 VR 단편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했다는 기사를 전해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몇 년 전부터 VR이 대세가 되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듣곤 했는데요. 이런 거장 감독들이 진정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기술과 제대로 접목시키면 얼마나 멋진 작품이 탄생하게 될까요?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이 될 날도 머지않았네요. VR 단편 <자이언트> 역시 일반 관객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씨네플레이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