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 메인 예고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 <춘몽>이 10월13일 개봉한다.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 한예리와 '연기도 하는' 감독 양익준, 윤종빈, 박정범이 만난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절찬리에 상영되며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평소 꿈 장면을 자주 삽입해온 온 장률 감독은, 아예 '춘몽'이라는 제목을 내걸어 봄의 따스한 공기 아래 청하는 낮잠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깨고 나면 명확히 남지 않는 꿈처럼 이렇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영화를 이루는 공기가 참 포근했다고 기억할 만한 작품이다.


春夢, 봄날의 꿈

서울 은평구 수색동의 조용한 동네. 한물간 건달 익준(양익준), 어수룩한 건물주 아들 종빈(윤종빈), 임금체불에 해고까지 당한 탈북자 정범(박정범) 3인방은 조선족 예리(한예리)가 운영하는 고향주막을 뻔질나게 찾는다. 예리는 어머니를 여의고 모녀를 버리고 간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왔다가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수발하고 있다. 익준, 종빈, 정범은 각자의 방식으로 예리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예리는 그들의 구애에 웃음만 흘릴 뿐이다.

<춘몽>은 전반을 아우르는 중심 사건 없이, 예리와 수색동 3인방이 하릴없이 동네를 어슬렁대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제목처럼 봄날에 꾸는 꿈같은 영화는, 그들의 나른한 일상 속에서 드문드문 벌어지는 순간들을 파편적으로 드러낸다.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예리의 아버지가 입을 떼고, 3인방과 달리 홀로 공을 차고 오토바이를 타는 주영(이주영)은 예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마치 꿈에서 과거 경험했거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대상과 상황을 목격하는 것처럼, 특별한 순간이 불쑥 나타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사라진다. <춘몽>은 유기적인 맥락을 추구하기보다 갑자기 찾아오는 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화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낯선 순간에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뿐이다. “꿈이니까.”

장률이 가벼워졌다고?
장률 감독. <춘몽>의 주요공간인 '고향주막' 앞에서.

장률 감독은 2005년 두 번째 장편 <망종>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상을 수상하며 널리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경계>(2007), <중경>(2007), <이리>(2008) 등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과거의 상처를 떠안고 황량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느린 리듬 아래 절제된 대사와 미니멀한 미장센을 통해 그려냈다. 재중동포인 장률은 한국, 중국, 몽골 등 작품의 무대를 옮겨다니며 국가의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 줄곧 포커스를 맞춰왔다. 2011년 교편을 잡으며 한국에 정착한 그는, 한국에 사는 14명의 이방인들의 공간을 비춘 다큐멘터리 <풍경>(2013), 한 남자가 하룻동안 경주를 여행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을 아늑하게 담은 극영화 <경주>(2013) 등을 발표했다.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무거운 톤으로 담은 지난 작품들과 달리, 장률의 열 번째 장편영화 <춘몽>은 경쾌하다고즈넉한 분위기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경주>보다 한결 가벼울 뿐만 아니라 여러 순간 폭소를 유발하기도 한다. 어딘가 비어 보이는 익준, 종빈, 정범 세 사람이 하나마나한 말들을 주고받는 과정은 객석의 웃음을 보장한다. 네 주인공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장률의 첫 장편 <당시>(2004)를 보다가 익준이 “1분 동안 계란 까는 것만 보여주는 영화라고 비웃는 대목은, 기존의 장률의 영화들과 <춘몽>의 차별점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려하되 인간미라곤 없어 보이는 상암동 DMC와 이웃하고 있는 수색동의 군상을 비추는 영화는, 그들이 일상에서 경험해야 할 팍팍한 세상에는 좀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정범이 악덕업주에게 돈을 떼이고 괴로워하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끼어들긴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은 판타지처럼 유쾌하게 지나갈 따름이다.

익숙한 얼굴들
<똥파리> / <춘몽>
<용서받지 못한 자> / <춘몽>
<무산일기> / <춘몽>

수색동 3인방은 양익준 감독, 윤종빈 감독, 박정범 감독이 연기했다. 세 감독 모두 첫 장편 연출작에서 직접 배우로 참여한 이력이 있다. 장률 감독은 직접 연기를 해본 감독이라는 점을 빌어 그들을 캐스팅했을 뿐만 아니라, 각자 연기한 캐릭터의 면면을 빌려와 <춘몽> 속 인물에 반영했다. 익준은 껄렁한 행색과 욕설을 남발하는 <똥파리>의 상훈을, 종빈은 매사에 굼뜨고 어벙한 <용서받지 못한 자>의 지훈을, 정범은 한국 땅에서 부조리를 조용히 견뎌내는 <무산일기>의 승철을 닮았다. 셋 모두 지독한 결말로 치닫는 영화지만, 거기에서 빌려온 <춘몽>의 캐릭터는 저마다 다른 에너지로 나른한 이야기에 생기를 부여한다.

<푸른강은 흘러라> / <해무> / <춘몽>

전작과의 접점은 한예리에게서도 발견된다. 조선족 여중생 숙이를 연기한 첫 장편 <푸른강은 흘러라>(2008) 이후 메이저와 인디를 오가며 존재감을 키워온 그녀는 2014<해무>에서 조선족 여성 홍매 역을 맡았다. 장률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춘몽> 기자회견에서 한예리가 조선족 특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상업영화(윤종빈), 독립영화(양익준, 박정범) 신에서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 분한 세 남자가 졸졸 따라다니는 예리를 두 신을 가로지르는 배우한예리가 연기한다는 상황 자체가 영화적이다. 불구의 몸으로 겨우 목숨만 붙들고 있는 예리 아버지의 배우가 영화제작자이준동이라는 점 역시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외에도 반가운 얼굴들이 많다. 장률 감독의 전작 <경주>에 출연한 신민아와 김태훈, 이번에 처음 장률 영화에 출연하는 김의성과 유연석, <춘몽> 포스터에 캘리그라피를 선사한 조달환 등이 주인공들이 오며가며 마주하는 인물들로 특별출연했다. 뮤지션 백현진과 강산에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불쑥 나타날 때 느끼는 반가움 역시 꿈의 속성과 닮았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