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무조차 거짓말을 한다
다시 읽어 보자니, <안토니아스 라인>에 관해 쓴 지난 글에서 나는 평소 가급적이면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단어를 두 번이나 쓰고 말았다. ‘아름답다’라는 형용사가 그것인데, 안토니아를 지모신에 비유하면서 “넓고 ‘아름다운’ 대지에 곡식 씨앗을 뿌리는“이라고 한 번, 그녀의 농장 앞마당 식탁에서의 연회 장면들을 두고 “내가 본 것들 중 가장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말하면서 두 번…….
‘아름답다’는 누구나 너무 자주 쓰는 단어여서 사용하기에 식상하다고 느껴질 뿐만 아니라 품고 있는 내포도 너무 넓다. 어떤 대상을 그렇게만 표현하고 말면 그것의 어떤 측면이 왜 아름다운지를 특정하기가 힘들다. 표현력이 부족할 때 우리는 그저 어떤 긍정적인 대상을 뭉뚱그려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만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대지와 공동체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아름다운지를 상술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 단어를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름다움’은 대체로 거짓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가령 ‘대지’는 정말 아름답기만 할까? 매년 씨를 뿌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안토니아는 풍요의 여신일까 대지의 노예일까? (지구에 사는 한 우리 모두가 예찬해 마지않는) ‘생명’은 또 어떤가? 그것은 생명을 가진 것들 입장에서는(자기 보존에 유용하므로) 아름다울 수 있을지 몰라도, 우주 전체의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열기(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소진되고 말) 같은 건 아닐까? 물론 나는 이런 강박적인 의심을 아도르노에게서 배웠다. 아도르노는 <한 줌의 도덕>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고, 나는 언젠가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는 그 말을 비평 행위의 금과옥조로 삼고 말았다. 이후로 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의심한다.
“활짝 핀 나무조차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한 표현도 다르게 존재하는 현존재의 치욕에 대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 가령 활짝 핀 나무 같은 것으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도 아도르노에게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개인이 세계와 맺는 ‘상상적’ 관계)였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우리의 삶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지시하는 어떤 상태에 비하면 항상 치욕스럽기 때문이다. 한 때 좌파들이 사회적 전망의 붕괴와 함께 대거 생태주의자로 전향했던 사정, 그보다 더 오래 전 사대부란 자들이 정치적 좌절을 이른바 ‘안빈낙도’로 보상받았던(그것은 정신승리가 아닌가) 사정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보다는 주체의 (왜곡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에 가깝다.
지난 글의 논지를 번복하는 것 같아 안토니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여성적인 것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유의 여성성 찬양(괴테, 캠벨)도 마찬가지다. 과장되게 찬양받는 여성성에 맞서 아도르노는 서슴없이 이런 말도 한다. “여성적 성격을 주조해내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남성사회의 산물이다.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형상은 그 반대인 왜곡에서 비로소 생성된다”. “본능에 근거한다는 모든 유의 여성성이란 항상 모든 여성이 폭력적으로 - 즉 남성적인 폭력으로 - 강요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다.”
본능과 자연에 합치한다는 여성성이 남성성의 산물이고, 따라서 여성은 남성이라니……. 저 독한 말들을 안토니아의 공동체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법보다는 자연의 섭리와 유사한 여성적 리듬, 대지에 풍요를 선사하는 지모신의 모성, 인간의 희로애락과는 무관하게 무한히 진행하는 자연의 순환운동……. 만약 그런 위대한 가치들의 기원이 훼손 이전의 자연 자체(그리고 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구적 이성과 폭력적 남성성에 의해 왜곡되어 버린 세계의 상관물로서 ‘발명된’ 것이라면……, 안토니아의 공동체는 아름다운 만큼 참으로 허약하다.
상상된 게토에서
사실 이런 의심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상기해보면 전쟁 직후에 설립되어 최소한 198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안토니아의 공동체에는 달력도 시계도 없었고, 그 흔하디흔한 전화기도 자동차도(농기구는 있다) 없었다. 게다가 마을의 이름도 불명확하고, 지리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말하자면 그녀의 공동체에는 시공이 없다. 그런 점에서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휘슬스톱 카페’도 마찬가지인데, 늙은 화자 니니의 회고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 실제의 장소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진(실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얼마간 과장되고 미화된) 향수의 산물로 들릴 때가 많다.
바로 그 점이 휘슬스톱 카페와 안토니아의 농장에 유토피아적 계기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맞는 말이겠지만(가능했거나 가능할 다른 세계에 대해 상상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삶을 추문으로 만들어 놓는 위력!),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상상된 공동체가 우울증의 소산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지젝에 따를 때 우울증자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잃어버린 무엇으로서 소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는 방식은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서) 존재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영영 사라져 버린(그래서 이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 말하자면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이라거나 자연의 리듬과 일치하는 지모신의 섭리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토니아의 농장과 루스의 카페가 위태위태해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데, 얼마간의 마술과 신화시대의 허구, 그리고 자연과 여성성이란 이름의 대항이데올로기소로 지탱되고 있는 이 공동체들은 마치 고립된 섬처럼 ‘아름답고’, 안쓰럽다. 왜냐하면 이 작은 공동체에서 한 발만 경계를 벗어나도, 현실 세계 속에서는 여전히 KKK단원들이 흑인들을 린치하고, 또다른 프랭크 베넷이 아내를 구타하고, 피터가 소녀를 겁탈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도시로 떠난 빅 조지의 아들(아티스)은 개죽음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여전히 남성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두 공동체는 그저 게토처럼 그 안에 작은 해방 공간 하나를 만들어 놓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남자의 말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세계는 남성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거니와 이 문장은 ‘세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떤 삼단 논법이 가능할 듯하다. 서양적 사유 속에서 세계에 구조를 부여한 이는 신이다. 그는 ‘말씀’(word, 언어)으로 세계에 구조(빛과 어둠, 높음과 낮음, 뭍과 물, 가축과 들짐승, 남과 여)를 부여한다.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든 피조물은 원초적 남자 아담, 그렇다면 아무래도 신은 남자 같다. 신의 성별을 둘러싼 기나긴 신학적 논쟁은 사양한다. 나로서는 다들 ‘아버지’라 부르는 신을 여성으로 상상하기는 무척 힘들다. 정신분석학자라면 신에게 ‘원초적 아버지’란 이름을 붙여주었으리라(반고씨도 단군도 모두 남성이었으니, 동양적 사유라고 별반 다를까마는……). 그러니까 삼단논법은 이렇다. 말로 세계에 구조를 부여한 것은 신이다, 그런데 신은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남자의 말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굳이 기독교의 창조신화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가령 60~70년대 한국 남성작가들의 작품을 미투 이후의 관점에서 필사해보려 했던 내 제자(여학생)의 노고 같은 것을 상상해 보면 될 듯하다. 어휘와 말의 체계를 새로이 고안하지 않는 이상, 필사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천 년 동안 말은 (편견과 독단과 몰이해로 가득한) 남성형이었고, 그 말에 따라 세계가 구조화되고 재구조화되기를 반복해왔으니까…….
그런 세계에 맞서 (신화와 자연의 힘을 빌려서라도) 해방구로서의 게토 한두 군데나마 얻는 일은 중요하다. 루스와 잇지의 휘슬스톱 카페, 그리고 안토니아와 다니엘의 농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게토 밖의 세계는? 남성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세계의 나머지 전체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고 말했던 이는 내가 신뢰하는 철학자 데리다, 실로 세계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그 바깥은 없다면, 그 안에서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여성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혀
‘여성은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제인 캠피온 감독이 영화 <피아노>의 무대를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의 뉴질랜드로 삼고, 주인공 에이다를 ‘자발적 실어증자’로 등장시킨 이유도 이 질문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영국사(아마도 남성사가들의 역사)는 이 시기를 복원해야 할 황금기로 기록하지만, 실제로는 이 시기가 영국이 가장 제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더욱이 여성에게는 지극히 위선적인 방식으로 각종의 규율 장치들이 그들의 심신 모두에 작동하던 시기였다. 에이다가 입은 (결국 베인스가 하나하나 벗게 만드는) 코르셋과 여러 폭의 겹치마는 바로 그 규율 장치들이 예절이나 도덕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신체 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에이다가 자발적으로 실어증의 상태 속에 스스로를 유폐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빅토리아 시기 영국에서(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성적인 언어 바깥의 언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녀는 자발적으로 입을 닫는다. 침묵 속으로의 자기 유폐, 그러나 그녀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가 그녀의 성대, 건반이 그녀의 혀다. 스튜어트의 숙모가 감지한 것처럼, 그녀의 연주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언어로 할 수 없는 말, 말 너머의 말, 그러니까 그녀의 연주는 악곡을 악보에 따라 두드리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여성이 남성의 언어 바깥에서 ‘기를 쓰고 하(려)는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뉴질랜드 식민지 개척자 스튜어트에게 시집갈 때, 그 험한 기상과 지리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도 납득이 된다. 성대와 혀를 포기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스튜어트가 놀부나 전두환이나 히틀러처럼 대놓고 악인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아내의 몸과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릴 줄 아는 얼마간의 인내심도 있고, 노동을 쉬지 않는 성실함도 있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그가 ‘푸른 수염’(‘여성을 자르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 이 동화는 극중극의 형태로 영화 속에서 상연된다. 결국 스튜어트도 에이다의 손가락을 자르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참 기지 넘치는 복선이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에이다의 피아노 연주(말 너머의 말)를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아노를 베인스의 80에이커 땅과 교환했으며, 그녀가 불륜을 범했다는 이유로 질투에 불타 피아노를 부쉈고, 아내의 손가락(그것은 그녀의 혀)을 잘랐으며, 무엇보다도 총(남근이겠다)을 주고 식민지의 땅을 사들이는 제국주의자였으니까……. 따라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푸른 수염인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대부분의 남성은 의지와 무관하게 저절로 푸른 수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 원주민 베인스는 다르다. 그는 에이다의 연주를 (남성적 언어 바깥의 말이므로 아마 이해할 수 없었겠고 또 앞으로도 온전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하염없이 듣는다. 겹겹으로 그녀의 신체를 포획하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을 하나하나 벗게 하는 대신, 그럴 때마다 검은 건반 하나씩 만큼 성대를 열어준다. 에이다가 자신이 원하는 (다분히 성적인) 행위를 허락할 때마다 스튜어트에게 땅을 주고 구입한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돌려주겠다는 그의 거래는 그러므로 매매춘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혀, 그는 에이더에게 말을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스튜어트의 도끼에 잘려나간 그녀의 손가락 대신 금속 손가락을 만들어 주는 것도 그다. 말하자면 베인스는 에이다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는데(에이다는 피아노의 건반에 사랑의 말을 적어 그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 바깥에서 그녀에게 혀와 성대를 돌려주고, 부단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자다.
결말을 미리 알려주자면,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 속 기성품을 모델로 게토에 마련된 해방구의 해피엔딩이 아니다. 상징적 죽음(그녀는 바다에 피아노를 매장해야 하는 순간 연결된 밧줄에 발을 들이밀었다가, 가까스로 물 위로 부상한다. 상징적 죽음이자 언어적 세계로의 입사식이다)을 겪은 후 베인스와 영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이제 말을 배운다. 베인스는 여전히 그녀 곁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여성의 혀가 남성의 말 속으로, 남성의 귀가 여성의 말 속으로 더듬더듬 들어서는 공동체……. 둘의 언어는 점근적으로 닮아간다. 둘이 만드는 그 공동체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도래하고 있는 공동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