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이야기에서 시작하다
1950년대는 미국 만화에서 호러/오컬트/범죄 장르의 전성기였다. 마블 코믹스(당시 타임리 퍼블리케이션스)도 시류에 편승하여 <저니 인투 미스터리>, <테일즈 오브 서스펜스> 등의 타이틀을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스트레인지 테일즈>라는 타이틀도 있었다. 이는 호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버무려져 있고, 오헨리 단편식 반전이 있는 옴니버스식 타이틀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초로 넘어오면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호러 장르의 인기가 급감했고 제작진은 이 타이틀의 정체성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 스탠 리와 잭 커비는 판타스틱 포, 토르, 헐크, 스파이더 맨 등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면서 마블 코믹스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스파이더 맨의 그림을 담당한 것은 스티브 딧코라는 작가였는데, 50년대에 이미 호러 장르에서 두각을 보이던 그의 그림체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잭 커비 등의 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굵은 선이 들어간 시원시원한 그림체와 달리, 그의 그림은 뭔가 괴기스러운 뉘앙스가 있었고, 선은 가늘고 불규칙한 대신 세부 묘사가 뛰어났다.
1963년, <스트레인지 테일즈>는 마블의 또 다른 슈퍼히어로 휴먼 토치를 전면으로 내세운 슈퍼히어로 타이틀로 변모해 있었다. 휴먼 토치의 스토리가 지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5~8페이지 분량의 오컬트/미스터리 스토리로 채웠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바로 그 5장짜리 스토리에서 탄생한 캐릭터다.
미세 수술 의사에서
흑마술의 대가로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이름은 역시 <스트레인지 테일즈> 제목에 맞추기 위해 고안한 이름이다. 그의 첫 등장 스토리는 스탠 리가 각본을 쓴 것이 아니라, 거의 100% 스티브 딧코의 작품이었다. 흑마술, 오컬트, 동양적 분위기, TV에서 볼 수 있던 마술사의 외모 등 당시 유행하던 요소들과 스티브 딧코의 성향이 충분히 녹아들어 간 작업물이었는데, 마블에서 이미 중견 작가이던 스티브 딧코는 점점 사이키델릭 해져 가고 있던 그만의 스타일을 외부의 간섭 없이 닥터 스트레인지에 적용했다. 독자들은 그가 만드는 장면들이 마치 환각제를 하고 나서 볼 수 있는 풍경들과 비슷하다고 표현하였다.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원래 고난도 수술 전문인 유능한 신경외과 의사다. 그가 사고로 두 손을 잘 못 쓰게 되자, 치유 방법을 찾아 동양을 배회하다가 에인션트 원을 만나 흑마술을 전수받는다는 설정이다. 기원 스토리의 설정 자체는 평이했다. 점점 기괴해지고 사이키델릭 해지는 스티브 딧코의 스타일과 치고받고 싸우는 기존 슈퍼히어로물과는 차별화된 마법, 초자연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악마와 우주 등을 모티프로 한 빌런들과의 대결 등의 요소가 적지만 두터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는 작품의 매력이었다.
의외로 미지와 초자연, 환각의 느낌 등에 관심이 있던 10대 소년층에게 어필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몇 편으로 끝날 예정이었던 닥터 스트레인지의 기묘한 모험은 쭉 이어져 나갔고, 60대 말에는 또 다른 신인 인기 캐릭터이던 닉 퓨리와 <스트레인지 테일즈>의 지면을 양분하다가, 결국에는 <스트레인지 테일즈>가 <닥터 스트레인지>로 제목이 바뀌어 발간되게 된다.
만년 마이너리그의 히어로
닥터 스트레인지의 전성기는 1960년대와 70년대다. 그 이후에도 디펜더스의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고, 엑스맨과 어벤저스 등과도 협연하는 듯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엄연히 말하면 마블의 대표급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는 (마법사이면서) 무술의 달인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메인스트림의 타이츠를 입은 근육질 히어로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주류급이나 리더급이 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강력한 적수들과 싸울 때 마법과 시공간 변형 능력을 사용하면서 강력한 조력 역할을 했다.
2005년 마블이 영화사를 설립하고 <아이언 맨>을 기획하기 시작했을 때, 닥터 스트레인지도 잠시 물망에 올랐었다. 재정난을 겪으면서 스파이더 맨과 엑스맨 등의 메인 캐릭터들의 영화화 판권을 타사에 전부 팔아넘긴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B급 히어로들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초자연 장르인 <블레이드> 시리즈의 성공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결국 좀 더 인지도가 있던 아이언 맨이 영화화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이후에 블랙 팬서 등 비슷한 인지도의 B급 캐릭터들과 함께 ‘추후 영화화 가능성 있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게 되었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승승장구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내자 이제 B급 캐릭터들에게까지 순번이 온 것이다!
쉽사리 영화화하기 힘든 거대한 스케일의 초자연 장르라는 한계는, 이제 다른 기존 슈퍼히어로물과 확실하게 차별화할 수 있는 장점이 돼서 돌아왔다. 스티브 딧코와 여러 후임 작가들의 환각적인 비전이 대형 스크린에서 어떻게 재현될지 기대된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