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왜 한국은 흥행 순위를 관객수 기준으로 할까’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흥행 순위, 박스오피스 순위는 매출액 기준입니다. 가까운 일본도 그렇고요. 중국도 그렇습니다. 궁금한 건 못 참습니다. 영화산업 전문가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서편제> 100만 돌파라는 분기점
전문가들의 의견을 살펴보기 전에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려보겠습니다. 언제부터 한국 영화에서 관객수를 의미있게 인식하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에디터의 기억으로는 1993년이 큰 분기점이었습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기억이라는 건 믿을 게 못 되지만 9시 뉴스에서 첫 꼭지로 소식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신문 지면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서 위의 광고를 찾아냈습니다. 지금은 천만 영화가 많지만 그때는 100만 명이라는 숫자도 어마어마해보였습니다. 당시에는 멀티플렉스라는 게 없었죠. 스크린 수도 그만큼 적었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흥행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영화의 흥행에 대한 기사에서 관객수를 언급하는 경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영화, 흥행, 관객수’를 키워드로 찾아낸 1939년 8월27일 <동아일보> 기사(위 이미지)입니다. ‘비등하는 흥행인기’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영화가 연극보다 흥행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흥행일수, 입장인원과 더불어 입장료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대인은 무엇보다도 구경은 하여야 한다는 말이 사실로 반영되는 듯하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왜 예전엔 서울 관객수만 표시했지?
좀더 가까운 시간으로 이동하겠습니다. 1999년 4월7일 <매일경제> 기사입니다. ‘서울관객 200만 돌파’라는 부제가 있군요. 그런데 예전 영화들은 어째서 전국 관객이 아니라 서울 관객 집계만 했던 걸까요. 예전엔 티켓을 스마트폰 앱으로 예매하진 않았겠죠. 극장에 가서 사야했습니다. 한마디로 디지털, 전산화가 안 됐습니다. 그러니 일일이 관객수를 사람이 확인했습니다. 극장과 영화사에서 나온 입회인이 크로스 체크를 했다고 합니다. 단, 서울에서만요. 지방까지는 안 내려갔나 봅니다.
이제 본론으로 가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이 오늘의 사소한 궁금증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지금이야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물론 매출액, 점유율, 예매율 등 다양한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4년 서비스를 시작한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하 통합전산망)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전국의 극장 99%가 통합전상망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영화 흥행 관련 기사에서 통합전산망이 항상 기준이 됩니다.
극장 매출액은 아무도 몰랐다
2004년 이전엔 어땠냐고요. 그런 거 없습니다. 한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할 때 정확히 몇명의 관객이 입장했고, 수익을 얼마나 거둬들였는지 알 수가 없던 거죠.
김형호 영화산업분석가가 자세한 설명을 들려줬습니다. “예전에는 매출 계산이 정확하게 안됐습니다. 지방과 서울의 티켓 가격도 달랐고, 지방 극장에는 ‘단매’(單賣)라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극장과 배급사 간에 관객수대로 돈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일정 금액으로 처리했었죠.”
최현용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 소장도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통합전산망이 생기기 전에는 매출을 알 수가 없었죠. 게다가 극장 매출이 다 현금이었고, 매출 집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영화진흥위원회 산업정책연구팀의 양소은 연구원에게도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같았습니다. “과거에 매출은 파악이 안 되고 집계가 안 되는데 반해 관객수는 파악이 되니까 관객수를 흥행 순위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의 문석 전 편집장에게도 물어봤습니다. 그 역시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멀티플렉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기 전 영화산업은 (단관) 극장들이 주도했습니다. 자신들의 극장에서 틀 영화에 투자하는 방식이었죠. 극장에서는 전통적으로 관객수를 앞세웠습니다. 매출은 감춰져 있어서 극장과 영화제작사가 어떻게 나누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투명하게 하려고 등장하게 된 게 통합전산망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과거 영화산업계의 불투명성 때문에 매출이 아닌 관객수가 흥행의 기준이 된 것 같습니다. 속시원한 해결은 못해도 그럭저럭 궁금증은 해소했습니다.
박스오피스 순위, 매출 기준이 더 좋은 건가요?
사실 박스오피스 순위는 매출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박스오피스라는 말 자체가 극장표를 파는 매표소니까 극장표 판매 매출이 기준이 되는 게 어원과도 맞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관객수 기준 흥행 순위에 문제는 없을까요. 사소한 궁금증이 또 다른 궁금증을 낳고 말았습니다.
김형호 분석가는 한국의 시스템이 나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통합전산망이 단순 매출 총액만을 제공하는 미국의 박스오피스 모조와 같은 사이트보다 좋다고 보았습니다. “(화폐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미국 박스오피스 순위를 보면 시대에 따른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 수로 계산하면 이런 문제는 안 생깁니다. 오히려 우리 방식이 더 정확할 수 있죠. 또 우리는 관객수와 매출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일인당 평균 관람료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매출액을 기준으로 삼으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겠네요.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를 매길 때 수십년 전 매출액과 지금의 매출액을 단순 비교하는 건 어렵겠죠.
최현용 소장도 국내에서는 관객수로 집계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두 기준에 특별한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느끼는 건 관객수 단위이기 때문에 영화를 홍보할 때 관객수가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매출액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손익분기점 등을 산출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VOD 매출도 흥행 수익에 포함해야 하나요?
최 소장은 여기에 덧붙여 한국의 특수 상황도 알려줬습니다. “미국의 경우 영화 한편당 극장 매출이 40%이고, 케이블TV, VOD 등 기타 매출이 60%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극장 매출이 80%가 넘습니다. 그러니까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굳이 총매출을 확인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의 말처럼 극장의 매출과 관객수만 놓고 보면 박스오피스 순위의 기준이 매출이냐 관객수냐는 크게 문제가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봉 이후는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한 영화의 역대 흥행 순위를 정할 때(통합전산망 기준) 지금은 온라인, IPTV 등의 매출을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포함한다면? 정확한 매출을 알 수 없습니다. 최 소장은 “현행 통합전산망에는 온라인 VOD 등의 경우 매출 기준이 아니고 이용건수만 제공합니다. 한 건당 3000원짜리인지 만원짜리인지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온·오프라인 통합전산망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씨네21> 송경원 기자는 오늘 주제와 관련된 한 포럼에서 관객수가 아닌 총매출 기준이 더 진보된 흥행 집계 방식이라는 주장을 들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2편의 천만영화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5천원짜리 티켓의 영화와 만원짜리 영화는 산업적 가치가 다르다’는 게 요지입니다.
박스오피스 순위, 매출이냐 관객수냐 어려운 문제입니다. 점점 매출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온라인이나 IPTV도 흥행 수익 계산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도 찬반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 한국은 흥행 순위를 관객수 기준으로 할까’라는 사소한 궁금증으로 시작한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단순히 언론에서 관객수로 순위를 매기기 시작한 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건지도 모릅니다. 혹은 돈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 미국 등의 정서와 달라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매출을 기준으로 박스오피스 순위를 발표하면 “그래서 몇명 봤는데?”라고 물어볼 것 같긴 합니다. 어쨌든 오늘의 주제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고민해볼 문제였습니다.
박스오피스 순위, 관객수 기준 또는 매출액 기준, 당신은 생각은 어떤가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