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표현을 쓰기로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조디악>을 본 사람과 <조디악>을 보지 않은 사람. 인정한다. 너무 유치했다. 좀더 범위를 좁히자. 세상에는 데이빗 핀처 감독을 <세븐> <파이트 클럽> <소셜 네트워크>으로 기억하는 사람과 <조디악>으로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세븐>과 <파이트 클럽>이 10월26일 재개봉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알고 있다. 이미 이 영화들을 본 사람들도, 제목만 들어본 사람들도 극장 스크린으로 다시 보기를 원한다. 왜냐면 재밌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에디터는 둘 중 어떤 영화를 더 보고 싶냐고? 보기에 없는 예상가능한 답변을 내놓는다. <조디악>을 다시 보고 싶다.
<조디악>은 <세븐>과 <파이트 클럽>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 “그런 영화가 있었어?”라고 물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이 ‘도대체 <조디악>이 무슨 영화야?’라고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디악>은 2007년 8월15일 개봉했다. 고작 18만여명(영진위 통합전산망 기준)이 극장을 찾았다. 해외 박스오피스에서도 <조디악>은 실패작에 가깝다. 데이빗 핀처 감독이 연출한 10편의 영화 가운데 흥행 성적 꼴찌다.
그럼에도 <조디악>을 데이빗 핀처 감독의 이름 바로 다음에 놓는 (에디터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글의 머리에 언급한 구분법에 따르면 <조디악>을 본 사람이다. <세븐> <파이트 클럽> <소셜 네트워크>를 앞에 둔다면? 아직 <조디악>을 보지 않은 사람일 확률이 크다. <조디악>을 본 다음에 그 순위가 바뀌지 않는다는 건 (에디터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얼마나 대단한 영화길래 이러냐 싶을 거다. ‘흥행에도 실패했다며?’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평론가 취향의 어려운 영화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 거기에 어떤 평가를 덧붙이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행위다. 누군가에게는 걸작, 누군가에게는 망작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마어마하게 재밌게 본 영화를 누군가 폄하했거나, 진짜진짜 재미 없게 본 영화를 누군가 극찬하더라도 절대 흥분하거나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다.
자, 이제 <조디악>에 대한 평가를 들어볼 시간이다. 에디터의 평가는 아니다. 유명 감독의 의견이 더 신뢰가 있을 것 같다. 2011년 4월 <씨네21> 800호 특집에 실린 영화평론가 허문영, 정성일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씨네산책’ 대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아, 그전에 잠깐 언급해야 할 내용이 있다. <조디악>은 국내에 개봉할 때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보고 만든 거 아니야?”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살인의 추억>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루듯 <조디악>은 1969년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벌어진 일명 ‘조디악’ 킬러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살인범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에 자신의 정보가 담긴 암호문을 게재하라고 협박한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살인을 저지르겠다고 선언한다. 샌프란시스코는 발칵 뒤집힌다.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점이 꽤 있다. 실제로 일어났던 미제 사건이라는 점이 그렇고 DNA 검사 기술 문제가 형사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도 똑같다. 심지어 <조디악>에도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와 “범인은 평범하게 생겼어요”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그 진술자가 아이라는 점도 <살인의 추억>과 같다.
<살인의 추억>과 <조디악>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면서 <조디악>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평가를 들어보자.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위 장르인 ‘연쇄살인물 영화의 5대 걸작’ 가운데 하나로 <조디악>을 꼽았다.
“<세븐>도 물론 멋진 영화였지만 <세븐>을 보다가 <조디악>을 보면 <세븐>은 완전 아기 영화, 유치원 애가 똥 싸는 영화예요. 두 영화 사이의 그 12년 동안에 이 사람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런 거장의 리듬, 호흡을 갖추게 됐을까.”
봉준호 감독의 이 말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세븐>이 걸작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조디악>이 품고 있는 영화적 색깔이 전혀 다르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옳다. 계속해서 봉준호 감독의 얘기를 들어보자.
“<조디악>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느릿하고 어떤 흥분이 없어요. <살인의 추억>은 어떻게든 흥분시켜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잖아요. 감정적이고 찔찔 싸고, <조디악>은 차분히 가라앉아서 리듬을 장악하는데 완전히 충격이었어요.”
<살인의 추억>과 <조디악>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송강호의 존재 유무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 <조디악>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건 기자 폴 에이브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은 신문의 만평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 사건 담당 형사 데이빗 토스키(마크 러팔로)는 지극히 다르다. <조디악> 속 캐릭터들은 극도로 차가운 느낌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냉정함을 맡고 있는 서태윤의 극단적인 버전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세븐>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이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 사람 영화야 늘 재미는 있었지만 <조디악> 보고 호흡이나 리듬이 정말 부러웠어요. 놀라운 경지였지요.”
<세븐>과 <조디악>의 호흡은 전혀 다르다. <세븐>은 데이빗 핀처의 스타일이 녹아 든 감각적인 영상이 일품이라면 <조디악>에서는 자신의 스타일과 작정하고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이 그 데이빗 핀처가 맞나 싶을 정도다. 이동진 평론가는 “<조디악>은 데이빗 핀처가 처음 만든 리얼리즘 영화일 거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이 언급하는 호흡이나 리듬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루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조디악>은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157분)의 영화다. ‘조디악’의 살인은 초반에 몇 차례 등장하고, 후반부에 ‘조디악’을 쫓던 기자 폴과 형사 데이빗이 모두 사건을 포기하고 거의 폐인이 돼버렸을 때, 만평가 로버트가 유일하게 범인 가까이 갔을 때, 스릴러 장르의 긴장감이 생성된다. 나머지 시간은? ‘조디악’이 남긴 암호문을 해결하고 범인의 단서를 찾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이런 ‘지루한’ 시간은 <세븐>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살인의 추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감독 김선의 표현을 빌리면 <조디악>은 ‘만연체’로 쓴 영화다.
영화의 엔딩도 <조디악>을 흥행과 연결짓기 어려운 요소였다. <살인의 추억>처럼 <조디악>은 미제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범인을 잡지 못한다. 그저 암시만 주고 만다. 말하자면 ‘안알려줌’ 영화다. 보통의 수사물에서 볼 수 있는 ‘범인은 바로 너’라는 식의 쾌감이 <조디악>에는 없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범인을 잡지 못하는 과정을 지리멸렬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결국 사건 발생 이후 20여년이 지난다. 그제서야 영화는 ‘범인은 저 사람일 거야’ 하고는 끝을 내고 만다. 이 지리멸렬함이 <세븐>의 데이빗 핀처와 <조디악>의 데이빗 핀처를 가르는 기준이다.
<조디악>에는 영화 속 영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형사물 <더티 해리>(1972)가 나온다. ‘조디악’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더티 해리>를 보러 간 형사 데이빗은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다른 형사들은 데이빗에게 “야, 네가 놓친 범인, 영화 주인공이 잡더라” 하며 놀린다. 조디악의 암호문을 푸는 데 집착하고 집요하게 범인을 쫓는 만평가 로버트는 로비에 홀로 앉아 있던 데이빗에게 말한다. “범인은 결국 총을 맞고 죽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조디악> 속 <더티 해리>를 보는 아이러니컬한 감정은 비단 형사 데이빗만 느끼는 게 아니다. <조디악>을 보는 관객도 참담한 심경을 체험하게 된다. <조디악>에는 차갑고 서늘하고 답답해 죽을 것만 같은 지리멸렬한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영화 속 시간이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간은 봉준호 감독이 얘기한 리듬과 호흡으로 만들어진다. <조디악>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 <조디악>을 끝까지 보지 못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조디악>을 추천한다. 지루함을 참는 이에게 광명이 있으라.
덧, 봉준호 감독이 꼽은 ‘연쇄살인물 영화의 5대 걸작’의 다른 4개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1979), 조나단 드미의 <양들의 침묵>(1991), 아르투로 립스타인의 <짙은 선홍색>(1996),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