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젤위거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주디>가 절찬 상영 중이다. 할리우드 고전기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주디 갈랜드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개최한 런던 공연을 둘러싼 이야기를 영화화 한 작품이다. 영광과 고통이 뒤섞였던 주디 갈랜드의 47년 삶에 관한 사실들을 정리했다.


___ 1922년 6월 10일, 프랜시스 에셀 검(주디 갈랜드의 본명)이 두 보드빌(춤과 노래를 곁들인 풍자적인 희극) 극장을 운영하는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고작 3살도 되지 않았을 시절 부모가 운영하는 극장 무대에 처음 올랐다.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각성시키고 잠들게 하기 위해서 10살 된 프랜시스에게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___ 두 언니와 함께 보드빌 트리오 ‘검(Gumm) 시스터즈’로 활동하던 프랜시스는 1933~4년 시카고에서 진행됐던 세계박람회 마지막 날, MC였던 조지 제셀이 지어준 ‘주디 갈랜드’로 개명했다. 언니들까지 성을 갈랜드로 바꿨다. 트리오는 맏언니가 결혼하자마자 해체했다.

주디 갈랜드와 MGM 대표 루이스 B. 마이어

___ 할리우드 굴지의 영화사 MGM은 1935년 ‘갈랜드 시스터즈’로 활동 중인 주디 갈랜드를 발견하고, 즉시 전속 계약을 맺었다. 13살 되던 해였다. 어린이 스타로 불리기도 성인 역을 맡기에도 애매한 나이. 이때부터 갈랜드는 스튜디오로부터 외모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 갈랜드보다 장신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에바 가드너 같은 스타들 옆에 세워두고 열등감을 느끼게 했고, 치아에 장치를 씌웠고, 코에 불편한 보형물을 달아야 했다. MGM의 대표 루이스 B. 마이어는 작은 키의 갈랜드를 두고 “우리 작은 곱추”라고 놀리기까지 했다. 몸무게 압박 역시 커서 치킨 수프, 유분기가 없는 치즈, 생상추 같은 것만 먹어야 했다.

___ 갈랜드가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부른 ‘Over the Rainbow’는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지난 100년 가장 위대한 노래’ 1위로 선정됐다. “극장 저 너머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 속에 깊게 새겨져 있다. 세기에 걸쳐 미국 영화 유산을 풍요롭게 하고 오늘날의 아티스트와 관객을 매혹시켰다”고 평했다.

___ MGM 소속 당시, 할리우드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미키 루니와 여러 작품을 함께 했다. <베이비 인 암스>(1939)를 비롯, 갈랜드가 ‘옆집 여자애’ 역을 맡던 영화들이다. 장년이 된 후에도 그들의 우정은 계속 돼서, 훗날 유족은 루니가 갈랜드의 추도사를 맡아주길 원했으나, 결국 <스타 탄생>(1954)의 상대배우였던 제임스 메이슨이 하게 됐다.

주디 갈랜드와 미키 루니

<리틀 넬리 켈리>

___ 18살이 되던 1940년 처음 성인 역할을 맡았다. 그해 세 번째로 작업했던 <리틀 넬리 켈리>에서 어머니와 딸 역할을 함께 소화했다. 영화 속에서 처음 실제 자기 억양으로 말할 수 있었고, 키스를 하고, 죽기도 했다.

___ 갈랜드가 가장 좋아한 배우는 로버트 도나트였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39계단>(1935)의 주연이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가 휩쓸다시피 한 194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굿바이, 미스터 칩스>(1939)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로버트 도나트

___ 1941년, 작곡가 데이빗 로즈와 결혼했다. 곧 갈랜드는 아이를 가졌지만 임신이 갈랜드의 착한 여자 이미지를 망칠 걸 우려한 MGM 대표 루이스 B. 마이어는 낙태를 강요했다.

___ 10대 소녀를 연기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1944) 캐스팅을 처음엔 거절했다. 현장에서 만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이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의 에스더는 갈랜드의 기존 앳된 캐릭터보다 섹시한 인물이라고 설득해 출연이 성사됐고, 이는 MGM 시절 갈랜드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남았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지그펠트 폴리스>(1945), <구름이 걷힐 때까지>(1946), <해적>(1948) 등 뮤지컬 영화를 함께 작업했다.

___ 조연으로 참여한 <구름이 걷힐 때까지> 촬영 당시, 첫 아이 라이자를 임신하고 있었다. 'Look for the Silver Lining'을 부르는 신에서 갈랜드는 접시 더미에 부푼 배를 감췄다.

<포 미 앤 마이 갈>

___ 갈랜드는 서로 다른 두 영화에서 상대역으로부터 똑같은 대사를 듣는다. <포 미 앤 마이 갈>(1942)의 진 켈리와 <이스터 퍼레이드>(1948)의 프레드 에스테어는 “왜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졌는지 말하지 않았어요?”라고 묻는다.

<이스터 퍼레이드>

___ 프레드 아스테어와 호흡을 맞춘 <이스터 퍼레이드>로 인기는 더 높아졌다. 다만 갈랜드의 일상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뿐만 아니라 모르핀 같은 불법 약물까지 복용했다. 각각 여섯 명의 의사에게 약을 처방 받아서 결국 약물 중독이 심해졌다. 알콜 의존도 마찬가지였다. 이듬해 <바클리스 오브 브로드웨이>(1949)에서 또 한번 아스테어와 캐스팅 됐지만, 갈랜드로 인해 제작이 지연되면서 MGM은 그녀를 정직시키고 그 자리에 진저 로저스를 앉혔다.

<즐거운 여름> 현장의 라이자 미넬리와 주디 갈랜드

___ <바클리스 오브 브로드웨이> 하차 이후 한동안 휴식을 가져 한층 나아진 모습으로 <즐거운 여름>(1949)을 작업했다. 빈센트 미넬리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라이자의 첫 영화이기도 한 <즐거운 여름>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이듬해, 15년에 걸친 MGM과의 끔찍했던 계약이 종료돼 할리우드를 떠났다.

___ 할리우드 고전기 최고의 스타 프레드 아스테어, 진 켈리 모두와 영화 속에서 춤을 춘 여성 배우들 중 하나다. 갈랜드 외에 리타 헤이워드, 시드 차리시, 베라 엘렌, 데비 레이놀즈, 레슬리 캐론 등이 있다.

___ 대배우 캐서린 헵번과 절친이었다. 헵번은 갈랜드의 우울증이 가장 극심했을 때 회복될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켰다.

갈랜드와 헵번

___ 1951년, 영국/아일랜드 투어를 시작했다. '전 세계 가장 위대한 엔터네이터'로 불린 알 존슨의 노래와 보드빌 리바이벌의 레퍼토리로 이뤄진 공연은 4달간 진행돼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투어를 마친 갈랜드는 이 공연을 통해 새 삶이 시작된 것 같다며 만족을 드러냈다. 그해 빈센트 미넬리와 이혼하고, 이듬해 투어 매니저였던 시드니 러프트와 결혼했다.

시드니 러프트와 라이자 미넬리와 함께

___ 갈랜드와 러프트는 영화사 '트랜스코나'를 설립해, 워너 브러더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자넷 게이너 주연의 <스타 탄생>(1937)의 리메이크를 제작했다. 갈랜드가 직접 주인공을 연기해 4년 만의 할리우드 복귀를 알렸다. 하지만 작품의 유명세에 비해, 당시 할리우드 최대 제작비라 할 만한 5백 만 달러가 투입된 탓에 워너 브러더스에 수익을 가져다주는 데엔 실패했다.

___ <스타 탄생>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생애 처음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셋째 아이 출산으로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해 유력한 후보였던 갈랜드의 집엔 이미 카메라가 줄지어 섰는데, 결국 오스카는 <갈채>(1954)의 그레이스 켈리에게 돌아갔다. 막스 브라더스의 그루초 막스는 갈랜드에게 "당신이 수상하지 못한 건 보스턴 경비회사 사건 이래 가장 큰 강도짓"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는 주디 갈랜드 /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레이스 켈리

___ CBS 방송국은 1955년 포드 사가 스폰서로 참여한 특집쇼 <포드 스타 주빌리>의 첫 무대를 주디 갈랜드 스페셜로 꾸몄다. 갈랜드는 얼굴을 검댕을 칠한 모습으로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가 'Over the Rainbow'를 불러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후 14년 사이, 갈랜드는 딱 2번 TV쇼에서 'Over the Rainbow'를 선보였다.

___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주인공 스칼렛(비비안 리)의 동생 역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앤 루더포드가 캐스팅 돼 곧장 <오즈의 마법사> 촬영을 시작했다. <면도날>(1946)의 소피 역 또한 갈랜드가 맡을 뻔한 캐릭터였다. 조앤 우드워드에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안긴 <이브의 세 얼굴>(1957)은 갈랜드가 자신의 삶과 너무 닮았다는 이유로 거절한 작품이었다.

___ 갈랜드가 1961년 4월 23일 카네기홀에서 가졌던 공연은 '쇼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이라 불렸다. 두 장으로 디스크로 구성된 실황 앨범 <Judy at Carnegie Hall>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13주간 차지하면서 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을 비롯한 4개 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___ 가수 멜 토메는 갈랜드가 기억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서 음악을 한번만 들어도 전체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___ 커리어와 개인사에 관해 낱낱이 밝히는 자서전을 출간하는 걸로 3만 5천 불을 받았지만 결국 무산됐다. 라이자 미넬리에 따르면 갈랜드는 자서전 제목을 ‘아-함’(Ho-Hum)으로 지으려고 했다고.

___ 1960년대에는 종종 있던 콘서트 수익 대부분을 국세청에서 가져간 데다, 매니저까지 갈랜드와 그의 클라이언트에게 수십만 달러를 횡령해 꾸준히 빚에 시달렸다. 그는 갈랜드가 잭 파의 심야 프로그램에 출연해 받은 캐딜락까지 자기 소유라 우기기까지 했다고. 재정적인 어려움은 가정 생활마저 위기로 몰아넣었다.

사망 3개월 전, 미키 딘스와의 결혼식에서

___ 1969년 6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세코날(신경안정제) 과다복용. 장례식은 사망 5일 후 매디슨 가의 장례식장에서 열려, 하루 동안 2만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았다.

___ 1950~60년대 게이 커뮤니티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다. 동성애가 논의조차 거의 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갈랜드의 게이 팬덤은 두터웠다. 그의 죽음은 현대 동성애자 권리 옹호 운동을 시작한 스톤월 폭동을 촉발한 요인으로 여겨져 왔다. 언젠가 한 기자로부터 게이 팬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자, 갈랜드는 "별 신경쓰지 않아요. 전 그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___ 갈랜드의 둘째 딸 로나 러프트가 쓴 책을 바탕으로 한 TV 드라마 <주디 갈랜드>(2001)가 제작됐다. 태미 블랜차드가 10대의 갈랜드를 주디 데이비스가 성인 갈랜드를 연기해, 2살에 처음 대중 앞에 선 갈랜드가 4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펼쳐놓는다. 곳곳에 갈랜드가 남긴 명장면을 고스란히 재연하는 신들이 등장한다. 르네 젤위거의 <주디>를 본 이들이라면 비교 삼아 봐도 좋겠다.

<주디 갈랜드>의 태미 블렌차드와 주디 데이비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