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창조하는 직업인 만큼, 사진에도 기가 막히는 감각을 선보이는 감독들이 있다. 그들이 포착한 단일한 프레임은 어떤 모습일까?


<그녀에게>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눈이 시릴 듯한 컬러의 활용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극대화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작년 4월 뉴욕에서 열린 사진 데뷔 전시 <Waiting for the Light>을 통해 공개된 작품들 역시 색에 대한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영화 속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에너지를 격정적으로 만들었다면, 사진엔 꽃과 꽃병과 과일이 자리하고 있다. 크고 작게 위로 뻗은 오브제들이 단정하게 모여 색채의 향연을 이룬 형상은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모란디를 향한 화답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알모도바르는 가장 좋아하는 스페인의 화가 마루야 말로의 초현실적 정물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트윈 픽스>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비드 린치

<트윈 픽스: 더 리턴>

영화는 물론 회화와 음악에까지 손을 뻗는 데이비드 린치는 사진집 <The Factory Photographs>과 <Nudes>를 발표한 바 있다. 음산함은 린치의 영화를 볼 때 난해함만큼이나 흔한 감상인데, 서사 자체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사진 작업엔 불가사의한 사연보다는 음산한 기운이 한껏 두드러진다. 금발 여자들의 누드를 관음하거나, 오래된 공장 지대를 바라볼 때도, 육체의 빛과 어둠이 명징해서 모두 밤의 시간 안에 놓여 있는 것 듯한 풍경은 서늘한 공기를 퍼트린다. <The Factory Photographs>가 <이레이저 헤드>(1977)와 <엘리펀트 맨>(1980)의 세계를 닮았다면, <Nudes> 속 여인들은 <트윈 픽스>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의 세계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란을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역시 꾸준히 새 영화를 발표하는 와중에 시인,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작업을 내놓았다. 2000년대 중반엔 1978년부터 2003년까지 틈틈이 찍은, 드넓고 황량한 길과 눈 덮인 공간 속 나무 등을 담은 풍경 사진을 짤막한 시 구절을 함께 선보인 전시를 세계 각지를 돌며 개최했다. 이 전시는 2005년 가을 한국에서도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라는 이름으로 열린 바 있다. 이란 서민들의 삶에 밀착한 리얼리즘 영화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 영화의 형식을 탐구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 그답게 자연의 단순한 모습 하나하나 범상치 않게 담아냈다. 마지막 영화 <24 프레임>(2017)이 고정된 프레임 아래 그 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움직이는 24개의 이미지가 모인 작품이라는 점은 살아생전 키아로스타미에게 사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다.


<올드보이> <아가씨>

박찬욱

<아가씨>

박찬욱은 갤러리처럼 인스타그램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친분을 과시하는 사진이나 제 영화를 홍보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흔적 같은 건 일절 없다. 2018년 8월 1일 첫 게시물 이래,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했던 낯선 풍경들을 담은 이미지만 드문드문 올리고 있다. 코멘트는 사진을 찍은 장소와 연도가 전부. 연출 작업이나 프로모션 일정으로 세계를 오고가는 만큼 여러 나라의 순간들이 있지만, 뚜렷한 랜드마크가 없으니 사진만 보면 경기도 파주인지 스위스 몽트뢰인지 구분할 수 없다. 박찬욱은 지난 11월 카메라 브랜드 '라이카'로 촬영한 작품들이 모인 전시에 참여하며 "단순히 취미활동이 아닌 심각하게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관객들도 진지하게 보고 비판도 하고 칭찬도 해줬으면 한다"며 사진가로서 포부를 밝혔다. https://www.instagram.com/pcwpcwpic/


<송곳니>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지독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과감한 프레이밍으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감독 이전에 무용 비디오, TV 광고를 연출했던 그는 요즘 사진으로도 만만치 않은 경력 쌓고 있다. 2016년 5월 모델 테일러 힐과 함께 한 화보로 처음 패션지 화보를 작업했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가 공개될 즈음엔 영화 주연인 엠마 스톤을 모델로 세운 화보를 발표했다. 두 화보 모두 집 안에서 범상치 않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자를 담아, 란티모스 영화처럼 묘하게 유머를 발산한다. <보그>의 (란티모스의 나라) 그리스 판에는 집에서 한여름을 나고 있는 여자들을 담은 화보 'Sea'를 선보였다. 근래엔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구찌가 그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로마의 레다 갤러리에서 촬영한 크루즈 컬렉션 화보 <Oviparity>는 책으로도 발간됐고, 말을 등장시켜 독특한 분위기를 더한 2020년 봄/여름 시즌 화보가 올해 초 공개된 바 있다.


<구모> <스프링 브레이커스>

하모니 코린

<스프링 브레이커스>

사진작가 래리 클락이 연출한 영화 <키즈>(1995)의 시나리오를 쓰며 등장한 하모니 코린은 2년 후 <구모>로 감독 데뷔한 이래 회화/사진 작업을 병행하며 미술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해왔다. 코린의 첫 사진집은 18살의 맥컬리 컬킨을 찍은 <The Bad Sons>다. <나 홀로 집에 2>가 개봉한 지 5년이 지난 1998년, 코린이 연출한 소닉 유스의 'Sunday' 뮤직비디오를 작업할 때 찍은 사진들로 구성됐다. 2002년엔 작가 크리스토퍼 울과 협업한 <Pass the Bitch Chicken>을, 2009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모습을 불규칙적으로 나열한 <Pigxote>를 내놓았다. 작년 매튜 매커너히와 함께 한 새 영화 <비치 범>을 발표한 코린은, <스프링 브레이커스>(2012)에 출연한 바 있는 래퍼 구찌 메인을 비롯해 이기 팝, 해리 스타일스 등 팝스타를 모델로 세워 구찌 화보들을 연달아 작업했다. 올해 초엔 패션 아이콘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는 래퍼 트래비스 스캇의 프로젝트 앨범 <Jackboys>의 아트워크를 담당하기도 했다. 개인 작업엔 색채는 물론 피사체의 형상도 흐릿한 이미지를 추구했던 것과 달리, 근래 패션/음악 산업에서 발표한 사진은 가히 컬러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완벽한 이미지에 대한 고집으로 악명 높은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시작점엔 사진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교내 사진가로 활동했던 큐브릭은 사진잡지 <Look>에 작품을 팔면서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고, 체스 게임에 참가해 수입을 충당하던 18살에 <Look>의 스탭 포토그래퍼로 몸 담게 됐다.뉴욕 지하철의 풍경, 치과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 한밤 중의 시카고, 복싱 선수 월터 카르티에의 일상, 배우 벳시 폰 퓌르스텐버그의 화보 등 다양한 콘셉트의 포토 에세이를 내놓으면서 스토리텔링 포토그래퍼로 이름을 날렸다. 이야기와 이미지를 함께 연출하는 감각을 쌓은 큐브릭은 23세가 되던 1951년 영화 작업을 시작해 2년 후 장편 데뷔작 <공포와 욕망>을 발표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 <그녀>

스파이크 존즈

<그녀>

스파이크 존즈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라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그보다 이전에 사진가로 활동했다는 건 꽤나 낯선 사실이다. BMX 자전거에 빠져 BMX 가게에서 일했던 16살의 존즈는 선수들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BMX 잡지 <Freestylin'> 편집진 눈에 띄어 소속 사진가로 스카웃 됐다. BMX 신에 몸 담으면서 스케이트보드 신과도 교류하게 돼 스케이트보드 매거진 <Transworld Skateboarding>에도 참여하고 10대를 대상으로 한 서브컬처 잡지들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오랫동안 뮤직비디오/영화/광고 작업에 매진해온 존즈는 올해 4월 힙합 그룹 비스티 보이즈의 활동기를 정리하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생애 첫 사진집 <Beastie Boys>를 발표했다.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빔 벤더스

<파리, 텍사스>

길 위의 시인. 빔 벤더스를 대표하는 수식어다. 벤더스 영화 속 캐릭터는 목적도 없이 자취를 옮기며 때마다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깨닫는 시간을 통과하곤 했다.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지만 개인의 내면에 더 집중하기에 풍경이 두드러지는 법이 없었는데, <파리, 텍사스>(1984)를 작업하던 80년대 초부터 꾸준히 진행해온 사진 작업은 온전히 공간에 집중한다. 낮과 밤의 공기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독일, 호주, 일본, 쿠바, 이스라엘 등 세계 곳곳의 이름 모를 공간은 1986년 파리 퐁피두 센터의 전시 이래 꾸준히 크고 작은 전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