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부부의 세계>가 막을 내렸다. 단연코 올 대한민국 상반기 최대 화제를 불러온 이 드라마는 28.4%라는 역대 비지상파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기존의 1위는 역시 같은 채널에서 방영된 <SKY 캐슬>의 23.8%였다) 가히 신드롬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작년 말부터 화제를 불러온 <사랑의 불시착>이나 <이태원 클라쓰>,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지상파에서 인기를 끈 <낭만 닥터 김사부 시즌2>나 <스토브리그>, 김은숙 작가의 복귀작 <더 킹: 영원의 군주>도 가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원작인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국내 막장 드라마 스타일과 결합시켜 더욱 독한 맛을 내뿜은 <부부의 세계>는 김희애와 박해준, 박선영, 김영민, 채국희, 이경영 같은 베테랑과 중고 신인 한서희 등 절묘한 캐스팅이 조화를 이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치정과 외도는 지탄받으면서도 꾸준히 소비돼왔다(왼쪽부터 <애인>, <내 남자의 여자>, <아내의 유혹>, <밀회>)

치정과 외도는 통속극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흥행 요소로, 방송윤리위원회나 각종 미디어 시민단체들에 지탄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소비되었다. 과거 <애인>이나 <내 남자의 여자>, <아내의 유혹>, <밀회> 등 여러 역대급 드라마들을 거쳐 나날이 발전(?)하며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력의 늪으로 시청자들을 낚아왔다. 타인이면서 가족이고, 핏줄을 통해 운명공동체가 되어가지만, 반대로 그래서 더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의 악연으로 묶이게 되는 오묘하고 또 오묘한 부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관음적인 시선과 금기를 넘어 욕망과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채워주는 대리만족감은 열광을 넘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퍼졌다. 이런 심오한 불륜의 세계를 담아낸 영화들과 거기서 빠질 수 없는 마성의 영화음악들을 소개해본다.


위험한 정사

음악 : 모리스 자르

불륜을 다룬 영화 중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바로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위험한 정사>다. 개봉 당시 남편들을 일찍 귀가시키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던진 이 치정 스릴러는 흥행과 비평을 모두 거머쥐며 1987년 제작대비 가장 성공한 영화가 되었다. 아버지 후광에 가려져 있던 마이클 더글라스의 입지를 세워준 건 물론, 80년대 가장 압도적인 필모를 가진 여배우 글렌 클로스의 최고 캐릭터로 남았다. 음악을 맡은 건 <아라비아의 로렌스>나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 등 장엄하고 아름다운 대서사시를 관현악으로 풀어내던 마에스트로 모리스 자르. 하지만 그의 후반 필모에선 서먹했던 아들 장-미셀 자르에게 자극이라도 받은 양 신디 사운드의 존재감이 눈에 띈다. <위험한 정사>에서도 화목한 가정을 표피적으로 담아낸 서정적인 피아노 테마나 불안한 전조를 암시하는 트럼펫 외엔 거의 공격적이고 반복적인 불협화음과 차갑고 음산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엠비언트 류의 일렉 톤이 주류를 이룬다. 전위적이고 일탈적이지만 지금은 다소 촌스러운 유행의 희생자처럼 박제된 사운드트랙.


데미지

음악 : 즈비그니예프 프라이즈너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로 누벨바그의 전야를 알렸던 루이 말은 욕망과 금기에 대한 당돌한 시선과 탐미적인 관점으로 동료들과 다른 비극적 페이소스와 강박관념,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들을 다뤄왔다. 그의 후기작인 <데미지>에서도 여전히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욕망과 어두운 상처, 절망과 고통 그리고 치유를 그리고 있다. 음악은 폴란드 출신으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와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즈비그니예프 프라이즈너가 맡아 품격을 더한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 시리즈 사이에 발표한 <데미지>는 프라이즈너 경력상 최절정기에 위치한 작품으로, 클래시컬한 마력과 유로피안 재즈 스타일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애절하면서도 음울한 스코어다. 색소폰과 기타, 피아노 그리고 스트링이 전달하는 멜랑꼴리한 선율은 짧지만 인상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의 접근처럼 위험하게 다가오는 여백을 남기는 잔향은 영화의 주제와 맞물리며 오랫동안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고전적이고 멜로디를 중시하는 프라이즈너의 특징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스코어.


은밀한 유혹

음악 : 존 배리

재정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부부에게 아내와 동침하게 해주면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공식적인 불륜 제의가 온다면 거기에 응할 것인가? 부부 간의 신뢰와 사랑에 대해 도발적인 화두를 던지며 화제를 불러 모았던 작품으로, 비평적 폭탄을 받았음에도 데미 무어와 우디 해럴슨, 로버트 레드포드 등 스타 파워로 크게 흥행했다. 음악적인 감각이 탁월해 뛰어난 선곡 센스를 보이며 매번 영화음악가를 바꿔 작업하는 애드리안 라인 감독은 007 시리즈로 유명한 또 다른 마에스트로 존 배리와 작업했다. 자극적인 로그라인과 달리 존 배리는 유려하고 서정적인 피아노를 메인에, 풍성한 스트링으로 뒷받침하며 따스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구사한다. 때론 이런 존 배리의 음악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아우라가 불륜에 대한 면죄부를 던져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두 요소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존 배리가 작곡에 참여하고 리사 스탠스필드가 부른 주제가 ‘In All the Right Places’를 비롯해, 시나 이스턴, 로이 오비슨, 브라이언 페리, 씰, 프리텐더스 등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합류한 사운드트랙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퍼펙트 머더

음악 : 제임스 뉴턴 하워드

히치콕의 그 유명한 <다이얼 M을 돌려라>를 90년대식으로 리메이크한 작품. 앞선 <위험한 정사>나 <장미의 전쟁>, 에로틱 스릴러 <원초적 본능>, <폭로> 등 이쯤 되면 가히 치정극 전문(?) 배우라 할 수 있는 마이클 더글라스와 기네스 펠트로우, 비고 모텐슨이 출연하고, 액션 스릴러에 일가견이 있는 앤드류 데이비스가 연출을 맡아 무난한 리메이크의 정석을 보여준다. 원작에서 할리우드 황금기를 구가했던 거장 디미트리 티옴킨이 담당했던 음악은 <팩케이지>와 <도망자>에서 데이비스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제임스 뉴턴 하워드가 물려받았다. 배신과 기만, 긴장과 음모가 도사린 티옴킨의 어두컴컴한 고전을 하워드는 자신의 세련된 감각에 맞춰 기능적이고 모던한 스릴러 스코어로 도식화했다. 그런 면에서 액션 부분만 빠진 <도망자>의 영화음악과 쌍둥이처럼 겹쳐져서 들려 그의 역량을 생각해보면 다소 아쉽게 다가온다. 여성 허밍과 스케일을 보여주는 오케스트라 긴장감의 일렉트릭 사운드가 믹스돼 할리우드 기성품 같은 무색무취의 범죄 스릴러 공식을 충실히 이행한다.


정사

음악 : 조성우

90년대 말 한국영화는 멜로물이 강세였다. 윤회와 판타지를 섞은 <은행나무침대>부터 PC통신 시절의 <접속>, 정통적인 <편지>나 <약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데뷔작 <정사>도 있었다. 동생의 약혼자랑 사랑에 빠진다는 흔하디흔한 불륜 플롯이었지만, 이미숙과 이정재의 감성 연기와 천박하지 않은 고급스런 연출로 성인 멜로드라마에 지평을 열었다. 음악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약속>,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으로 90년대 말 한국영화음악의 중흥기를 견인했던 영화음악가 중에 한명인 조성우가 담당했다. 일상의 권태로움과 불륜의 불안함을 담아낸 오보에와 정갈하지만 위태로운 파고를 암시하는 스트링, 애수를 머금은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그간 한국 멜로물에서 접해보지 못한 충격과 전율을 안겼다. 여기에 <흑인 오르페>의 주제가로 널리 알려진 아스트루드 길베르토의 보사노바 ‘카니발의 아침’과 카시아 엘러의 ‘삼바의 박자 속에서’, 메르세데스 소사와 프랜시스 카브렐이 함께 부르는 듀엣곡 ‘내 마음을 당신께 바치려합니다’ 등 삽입곡들도 인기를 끌었다.


해피 엔드

음악 : 조영욱 & 김규양

정지우 감독의 데뷔작으로 불륜은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행복이 끝나는 걸 의미심장하게 드러내는 <해피 엔드>는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돼 상영됐다. <접속>으로 흥행 배우에 올라선 전도연의 연기 변신과 주진모의 질퍽하고 파격적인 베드 씬, 실직한 가장의 숨겨진 광기를 머금은 최민식의 호연이 어우러지며 파국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덤덤히 그려내고 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도래한 90년대 말부터 음악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낸 조영욱의 폭넓은 선곡과 프로듀싱 능력에, 김규양이 작업한 감성적이며 클래시컬한 스코어가 조화를 이루며 위기에 놓인 부부의 세계를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사운드로 표현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물론, 슈베르트의 피아노 삼중주 그리고 헌책방에서 흘러나왔던 김해송과 콜럼비아 관현악단의 ‘청춘 계급’과 포크계의 거장 그레이엄 내시, 소울풀한 보컬의 퍼시 슬레이지와 칼라 토마스 그리고 오티스 레딩까지 빈티지한 삽입곡들이 전달하는 감성은 무미건조한 일상과 소통되지 않는 관계들에 있어 중요한 암시와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화양연화

음악 : 마이클 갈라소 & 우메바야시 시게루

스타일리스트 왕가위 감독의 변화를 알렸던 <화양연화>는 배우자들의 외도를 알아챈 중년 남녀의 고통과 연민이 사랑과 이별로 이어지는 과정을 담아낸 멜로물이다. 몽환적이면서도 화려한 색감으로 60년대 홍콩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화면과 적재적소에 어울린 음악이 왕가위만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음악은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어떤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고 말한 왕가위답게 자신이 듣고 자란 다양한 경극들(사랑탐모, 상원기자, 서상기, 정심 등)의 여러 수록곡과 30년대 최고의 가수였던 쪼우 쒸엔이 46년 영화 <장상사>에서 부른 ‘화양적연화’는 물론,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와 ‘Aquellos Ojos Verdes’ 등을 통해 이국적이면서도 독특한 풍취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양연화>에서 가장 각인이 되는 건 스즈키 세이준의 1991년 영화 <유메지>에 쓰였던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유메지의 테마’다. 왈츠 풍의 유려한 곡조는 반복적으로 활용되며 두 사람의 심리 상태와 변화된 상황을 기묘하게 이입하게 만든다. 여기에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갈라소의 스코어와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반추한다.


언페이스풀

음악 : 얀 A.P. 카취마렉

히치콕을 숭배하던 클로드 샤브롤의 1969년작 <부정한 여인>을 이런 장르의 달인인 애드리안 라인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원작에선 남편 역인 미셸 부케의 탁월한 심리 묘사가 일품이었다면 새로운 버전인 <언페이스풀>에선 아내 역인 다이안 레인의 호연이 빛을 발한다. 잭 니체나 모리스 자르, 존 배리와 엔니오 모리꼬네 등 일류 영화음악가들을 섭외해 음악에 지대한 공을 들이는 감독답게 이번 작품에선 <네버랜드를 찾아서>로 깜짝 오스카상을 수상했던 폴란드 출신의 얀 A.P. 카취마렉에게 영화음악을 맡겼다. 엔니오 모리꼬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듯한 탐미적이고 심리적인 선율은 여성 캐릭터에 더 밀접하게 접근해간다. 관능적일 정도로 유려한 피아노와 모호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여성 허밍, 아코디언과 섬세한 스트링이 어우러져 행복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집요하리만치 반복적이며 서서히 다가오는 위기와 어둠에 비해 아름답고 조용하게 흐르지만, 의도된 루즈함과 호소력 깊은 곡조는 반어적으로 불안함을 극대화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