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와 탕웨이의 호연이 돋보이는 2007년 작 <색, 계>가 11월 9일 재개봉했다. 이 맹렬하고 서글픈 멜로드라마를 다시 스크린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한편, <색, 계> 바로 전 이안 감독이 연출한 또 다른 사랑 이야기 <브로크백 마운틴>(2005)은 왜 재개봉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봉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작품들도 버젓이 재개봉하는 요즘, 아마도 21세기에 나온 퀴어 영화 가운데 <캐롤>(2015)과 함께 가장 뜨거운 지지를 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재개봉 소식이 여태껏 들리지 않았다는 건 꽤나 신기한 일이니까. 이번 수요명화는, 두 카우보이의 절절한 멜로드라마 <브로크백 마운틴>을 돌이켜보는 시간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애니 프루가 1997년 발표한 동명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1963년 와이오밍, 이제 막 성인이 된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은 여름 한철 양떼 방목장에서 일하기 위해 처음 만난다. 그들은 눈 덮인 봉우리와 푸르른 초원이 눈을 가득 메우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동고동락하게 된다. 늘 뚱한 얼굴에 과묵한 에니스와 껄렁껄렁 붙임성도 좋은 잭. 한적한 가운데 건조하게 시간을 보내던 둘의 관계는, 꽤나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에 관한 대화를 한 후부터 꽤나 돈독해진다. 어느 추운 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을 청하던 에니스와 잭은 몸을 섞는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지나 여름은 끝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로부터 4년 후 재회하게 된 그들은 이따금씩 만나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낚시를 핑계로 여행을 떠나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20년간 연을 이어간다.


조용하지만 힘 있는 드라마

영화 역시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은 채 두 남자의 질긴 인연을 천천히 늘어놓는다. 에니스 쪽에 서사의 무게를 보다 더 얹고 진행하는 영화는, 가족 혹은 잭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그의 성격처럼 묵묵히 감정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이 매순간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인색한 건 아니다. 적막하고 평화로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문득 격렬하게 사랑이 시작됐던 것 같이, 꽁꽁 감춰뒀던 감정들이 폭발하듯 튀어나오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초반 40분까지 이어지던 1963년 8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시간들이 끝나고, 푸석푸석한 결혼 생활과 짤막한 밀애를 나누는 과정이 지난하게 이어지지만, 그 순간들의 격정으로 인해 <브로크백 마운틴>은 밋밋해지는 법이 없다.


대자연에서 시작된 사랑

<브로크백 마운틴> 제3의 주인공은 바로 풍경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하늘의 구름이 이상하리만큼 커다랗게 펼쳐져 있다는 걸 발견한다. 이 거대한 풍경은 단순히 관상용에 그치지 않고, 두 주인공의 사랑이 와이오밍이라는 공간에 철저히 갇혀 있음을 일깨워준다. 브로크백 마운틴 주변의 탁 트인 풍경들이 아름다운 한편, 막막함을 자아내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대자연 아래서 '육체적으로' 출발한 두 사람의 사랑은 이 그림 같은 풍경에서만 가능하고, 그 곳을 나가면 자신의 욕망에 비껴난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방목 작업이 끝나고 어정쩡하게 잭과 이별한 에니스가 홀로 구역질에 시달리는 신, 바로 어제와 같은 넉넉한 구름이 하늘에 떠 있지만 그 모습은 에니스가 주저앉은 벽 사이에 가려져 있다. 그리고 에니스와 그의 아내 엘마(미셸 윌리엄스)의 결혼식 신이 곧장 따라붙는다.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
<쿵후 선생> / <결혼 피로연> / <음식남녀>

이안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테마는 ‘가족’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제일 잘 알아’라는 이름의 초기 3부작 <쿵후 선생>(1992), <결혼 피로연>(1993), <음식남녀>(1994)로 일찌감치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자신의 뿌리인 대만을 배경으로 한 이 가족드라마들은, 가족 간의 욕망과 의무 사이의 갈등을 파고들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끝내 사려 깊은 결말로 마무리된다. 시대와 공간의 배경을 옮겨 19세기 유럽 귀족사회를 그린 <센스, 센서빌리티>(1995)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대의 미국으로 시선을 옮긴 <아이스 스톰>(1998) 속 가족의 초상은 황폐하기 그지없었고, 이후 한동안 가족드라마와는 거리를 둔 채 장르의 색채가 물씬한 작품들로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21세기 무협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와호장룡>(2000)과 미국을 대표하는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은 블록버스터 <헐크>(2003)를 거친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다시 가족의 황량한 모습을 보여준다.

엘마와 로린

애니 프루의 원작보다 두 주인공의 아내인 엠마와 로린(앤 해서웨이)의 존재가 더 커졌다. 남편의 미지근한 태도에 상처 받던 엠마는 다시 만난 에니스와 잭이 키스 하는 걸 목격하고는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로린은 자신을 옛친구라고 소개하는 에니스의 이름을 듣고 사무적인 말투로(이때 앤 해서웨이의 연기가 정말 좋다) 잭의 사인을 말해준다. 이는 전작들처럼 가족 문화 자체에 대한 이안의 시선이라기보다, 에니스와 잭이 평생 자신의 욕망에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기능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처음 떠난 그 순간 이후로 그들은 결국 제대로 된 동거 생활을 꾸리지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에니스의 선택 때문이다. 늘 적극적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잭과 달리, 에니스는 생계와 가족을 핑계로 더 가까운 거리를 유보한다. 하지만 관객은 에니스의 머뭇거림이 어린 시절 동네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게이의 주검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동성애를 향한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할 수 없는 한편, (미국 마초의 상징인) 카우보이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 또한 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건 에니스와 잭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동성이라는 키워드를 더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강력한 파토스로 똘똘 뭉친, 지극히 보편적인 마음. 이안 감독의 오랜 프로듀서 제임스 샤무스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포스터가 <타이타닉>의 그것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말한다. <타이타닉>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로맨스라는 사실을 떠올리자면 그 의도가 보다 힘있게 다가온다.

잭이 고스란히 간직해온 20년 전의 피 묻은 셔츠를 보며 "맹세할게" 하고 말하는 순간은 언제 봐도 절절하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윌리 넬슨의 'He Was a Friend of Mine'과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The Maker Makes'를 들으며 극장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펑펑 쏟는 경험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재개봉을 촉구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