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영화가 있다. 코엔 형제가 1998년 발표한 코미디 <위대한 레보스키>도 그중 하나다. 코엔 형제의 팬들 사이에서도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위대한 레보스키>는 근래 사카이(Sacai), 팔라스(Palace) 같은 인기 브랜드의 디자인에 인용되면서 22년이 지난 지금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음악을 중심으로 <위대한 레보스키>를 곱씹어보자.


Tumbling Tumbleweeds

SONS OF THE PIONEERS

<위대한 레보스키>는 남자 보컬들의 하모니가 돋보이는 노래 'Tumbling Tumbleweeds'와 함께 문을 연다. 카메라가 마른 땅 여기저기 자라 있는 잡초들을 훑으면, 어떤 근사한 남자의 목소리가 영화의 주인공 제프리 레보스키(제프 브리지스), 아니, '듀드'를 소개한다. 부모가 준 이름이 아닌 "주변 어느 누구도 스스로에게 붙이지 않을" 이름을 쓰는 남자와 그가 살던 곳에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곳을 흥미롭게 여겼다는 말.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동안 잡초를 계속 훑다보면 둥글게 뭉친 잡초 덩어리 하나가 힘없이 굴러가고, 저 멀리선 LA의 야경이 비춰진다. 이 오프닝에 'Tumbling Tumbleweeds'가 쓰인 이유는 자명하다. 진짜로 회전초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걸 찍기 때문이다. 1933년부터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컨트리 보컬 그룹 선스 오브 더 파이오니어(Sons of the Pioneers)가 1934년 발표해 이듬해 웨스턴 영화 <구르는 회전초>에 수록돼 큰 성공을 거뒀다. 이 노래는 내레이션의 주인공인 카우보이 복장을 한 '이방인'(샘 엘리엇)이 대뜸 볼링장 바에 나타나 듀드와 대화를 나누는 신에서도 쓰였다. <위대한 레보스키>를 서부극에 대한 코엔 형제의 재해석이라고 상정하고 보면 더 많은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The Man in Me

BOB DYLAN

왠지 철학적으로 들리는 프롤로그와 듀드가 집에 잠입한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또 다른 레보스키(데이비드 허들스턴)와 그의 아내를 알게 되는 신이 지난 후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한다. 듀드와 볼링 파트너 월터(존 굿맨), 도니(스티브 부세미)가 늘상 시간을 죽이는 볼링장의 일상적인 풍경이 느리게 이어지는 이미지 위로 스탭들의 이름이 나타난다. 밥 딜런(Bob Dylan)의 'The Man in Me'는 듀드가 1987년 경기 실황 녹음을 들으며 누워 있다가 레보스키의 딸 모드(줄리안 무어)의 무리에게 습격당한 후 한밤의 LA를 날아다니거나 굴러가는 볼링공의 시점이 되는 환상 시퀀스에서도 사용됐다. 노래가 수록된 딜런의 11번째 앨범 <New Morning>은 60년대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딜런이 처음으로 큰 혹평을 맞이한 앨범 <Self Portrait>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발표돼 다시금 상업/비평적인 성공을 거뒀다. 단 하루만에 녹음한 트랙들로 채운 앨범은 딜런이 컨트리풍 보컬을 선보이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어 왔다. 코엔 형제는 60년대 말 포크 뮤지션의 생활을 구현한 <인사이드 르윈>(2013)의 사운드트랙에 딜런의 미발표곡 'Farewell'을 수록한 바 있다.


Hotel California (Spanish Mix)

GIPSY KINGS

<위대한 레보스키>는 웃기다. 종종 이렇다 할 맥락도 없이 웃기기 위한 웃긴 장면을 넣어놓기도 한다. 존 굿맨과 함께 코엔 형제의 전작 <바톤 핑크>(1993)를 이끈 배우 존 터투로의 막간 코믹 연기가 빛을 발하는 볼링장 신이 대표적이다. 온몸을 보라색 아이템으로 휘감은 지저스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면서 볼링공을 던져 스트라이크를 기록해 다음 경기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듀드 무리의 속을 긁는다. 지저스의 볼썽사나운 퍼포먼스와 듀드의 만담이 어우러지는 이 신에 남프랑스 출신의 라틴 밴드 집시 킹스(Gypsy Kings)의 'Hotel California'가 흐른다. 이글스(Eagles)의 그 유명한 노래를 스페인 풍으로 커버한 버전이다. 플라밍고 기타의 빠르고 리드미컬한 연주가 곡 전체를 휘어잡는 집시 킹스의 버전은 원곡의 잔잔한 무드와 전혀 달라, 과하디 과한 지저스의 몸짓을 비웃는 것처럼 들린다. 이 신을 본 이상, 경찰서에서 나온 듀드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서 이글스 노래 'Peaceful Easy Feeling'이 들리자 못 참겠다는 듯 "채널 좀 바꿔주시면 안돼요?"라고 말했다가 기사한테 온갖 욕은 다 먹고 택시에서 쫓겨나는 대목도 의도가 있어 보일 수밖에.


Run Through the Jungle

Looking Out My Back Doo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볼링, 양탄자, 화이트 러시안과 더불어 듀드가 좋아하는 것. 바로 밴드 크리덴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이하 '크리덴스')이다. 소지품이라곤 넝마 같은 옷가지밖에 없어 보이는 듀드가 차 안에 둘 만한 귀중품이라곤 '크리덴스'의 카세트 테이프가 전부일 정도다.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크리덴스의 노래 두 개가 사용됐다. 'Run Through the Jungle'은 듀드와 월터가 납치범에게 레보스키의 돈가방을 던져주는 작전을 펼칠 때 나온다. 듀드가 언제나 그랬듯이 차 안에선 크리덴스의 노래가 플레이 되는데, 월터가 돈가방이 아닌 더러운 속옷을 가득 담은 가방을 던져버리자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면서 흥겨운 음악은 실패로 돌아갈 작전의 BGM이 되고 만다. 속옷 가방을 던진 월터가 차에서 뛰어내리자 어둠 속에서 총이 난사되고, 듀드가 이를 피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자, 차에서 나오던 음악은 당연히 뚝 멈춘다. 크리덴스의 다른 트랙 'Looking Out My Back Door'는 듀드가 기분 좋게 담배를 피우면서 차를 몰다가 자기를 미행하는 차에 신경 쓰다가 꽁초를 헛날려 가랑이에 떨어트려 쓰레기통을 들이받을 신에 흐른다. 이쯤 되면 듀드에게 크리덴스는 저주의 밴드가 아닐까 싶어진다.


Just Dropped In (To See What Condition My Condition Was In)

THE FIRST EDITION

포르노 제작자 재키 트리혼의 집에 찾아간 듀드는 그가 준 술을 받아먹다가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위대한 레보스키>의 상징과도 같은 꿈 시퀀스가 이어진다. 마치 재키 트리혼이 제작한 단편영화인 마냥 연출된 대목은 코엔 형제의 지독한 유머로 꽉꽉 채워져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두 개의 볼링공과 하나의 볼링핀의 형상은 분명 남성기처럼 보이고, 처음 만날 때 알몸부터 본 모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는 볼링과 '존슨'이 제일 중요한 듀드의 단순한 욕망을 펼친다. 명징한 화면 구도와 미장센으로 관객의 볼거리를 톡톡히 만족시키는 시퀀스를 채우는 건 60년대 말 전성기를 보낸 싸이키델릭 밴드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의 'Just Dropped In (To See What Condition My Condition Was In)'이다. 싱어송라이터 미키 뉴버리(Mickey Newbery)가 만들어 발표한 곡을 1967년 데뷔한 신인 밴드 퍼스트 에디션이 커버해 빌보드 차트 5위에 올랐고, 60년대 말 유행한 싸이키델릭 록을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잡았다. 환각을 구현한 장르의 명곡이 환각 그 자체를 수식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퀀스에서 엿보이는 모드를 향한 듀드의 리비도는 모드가 듀드의 집에 찾아와 그를 유혹하면서 성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니나 시몬(Nina Simone)의 재즈 넘버 'I Got It Bad and That Ain't Good'가 만드는 무드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모드의 '자세'를 만나게 된다.


Wie Glauben

CARTER BURWELL

코엔 형제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음악감독 카터 버웰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버웰은 코엔 형제의 데뷔작 <블러드 심플>(1984)부터 현재 제작 중인 신작 <맥베스의 비극>까지 근 40년간 꾸준한 협업 체제를 이어오는 중이다. 티 본 버넷(T Bone Burnett)이 음악을 만든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와 오리지널 스코어가 따로 없는 <인사이드 르윈>을 제외한 모든 코엔 형제 영화에 카터 버웰이 음악감독으로 올랐다. 영화 곳곳을 6,70년대 명곡들로 채운 <위대한 레보스키>에도 버웰의 손길이 닿는 곳이 있다. 마지막 즈음, 그동안 거짓 작전으로 듀드를 속여오던 독일인 니힐리스트들이 그의 차를 불태운 채 버티는 신이다. 타오르는 차 옆에서 의기양양 뻗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지만, 이 모든 말썽의 원흉이었던 버니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는 걸 아는 '다혈질' 월터가 들고 있던 볼링공을 던져 육탄전이 시작된다. 이 난장판을 카터 버웰이 만든 일렉트로니카 트랙 'Wie Glauben'이다. 영화를 채운 그동안의 음악과 달리, 'Wie Glauben'은 무심한 전자음으로 가득하다. 크리덴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을 좋아하는 듀드와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음악을 배치해 싸움판의 어처구니없음을 강조했다.


Dead Flowers

TOWNES VAN ZANDT

독일인 니힐리스트와 싸우다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도니의 유골을 뿌리는 장면 다음, 영화 처음에 화자 노릇을 한 이방인이 "듀드는 계속된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말이 위로가 됩니다"라며 마무리 멘트를 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보여준 정신나간 코미디가 무색하게도 이방인의 마지막 말들은 묘한 '감동'을 안긴다.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노래를 컨트리 포크 뮤지션 타운스 반 잔트(Townes van Zandt)가 커버한 'Dead Flowers'가 볼링장에 울려퍼져 그 감흥이 배가 된다. 이 노래를 사용하게 된 에피소드도 꽤 재미있다. 원곡의 권리를 가지고 있던 롤링 스톤즈의 전 매니저는 노래를 사용하는 데에 무려 15만 달러를 요구했다. <위대한 레보스키> 속 음악 선곡을 총괄한 티 본 버넷은 이를 조율하기 위해 듀드가 이글스 노래 좀 꺼달라고 하는 신을 보여줬고, 이를 보던 매니저는 "바로 그거지, 그냥 노래 써버려!"라고 흔쾌히 인용을 승낙했다고 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