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1월 10일)은 ‘마에스트로’ 엔니오 모리꼬네가 태어난 날이다. 1928년생이니 무려 88번째 생일!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영화음악가인 모리꼬네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서 창작과 라이브 투어를 정력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올해는 그에게 더없이 특별한 해다. 활동 60주년을 기념하는 투어 '60 Years of Music'을 진행중에 있으며, 생일에 맞춰 체코 국립 오케스트라와 자신의 명곡들을 새롭게 작업한 앨범 <Morricone 60>을 발표한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드넓은 음악 세계를 짤막하게 알아보자.
고프레도 페트라시와 엔니오 모리꼬네
엔니오 모리꼬네는 음악가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트럼페터였던 아버지 마리오 모리꼬네에게 악보를 읽고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운 그는, 12살 때부터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해 트럼펫, 작곡, 지휘 등 정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산타 세칠리아 음악원 재학 당시,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현대음악 작곡가로 일컬어지는 고프레도 페트라시는 지도 교수로서 그의 열정과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트럼펫을 전공했던 모리꼬네는 다시 한번 음악원에 입학해 페트라시의 가르침 아래 실내악, 관현악, 가곡 등 정통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탈리아의 경제난으로 인해 모리꼬네는 음악을 업으로 삼아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본명 대신 여러 가명으로 써서 활동하던 그는 이탈리아 국영 방송의 경음악단에서 트럼펫 연주와 작편곡을 맡으며 대중음악의 작법을 자연히 익혀 나갔다. 이때 얻은 감각은 그가 60,70년대에 작업했던 영화음악이 품었던 다양한 스타일의 밑거름이 됐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1954년 학교를 졸업 이후 꾸준히 고스트라이터로서 유명 영화음악가들의 작업에 참여해왔다. '공식적인' 영화음악 커리어는 1961년부터. 현재까지 600편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니, 1년에 10편을 웃도는 작업량이다. 그 방대함만큼이나 곡마다 담겨 있는 스타일이 굉장히 다양한 건 물론이다. 사실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몇 가지 작품을 손꼽는다는 점이 어불성설에 가깝지만, '이름을 들어는 봤는데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의 영화음악 커리어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봤다.
60,70년대 세르지오 레오네
엔니오 모리꼬네와 세르지오 레오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흔히 심금을 울리는 서글픈 선율로만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활동 초기부터 꾸준히 이탈리아의 가벼운 코미디 영화들을 작업해왔다. 모리꼬네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의 두 번째 영화 <황야의 무법자>(1964)의 음악을 작업하면서부터다. 로마 출신인 레오네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이탈리아 풍의 서부영화, 이른바 '마카로니(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변종 장르를 개척해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레오네는 직접적으로 서부영화 특유의 전형적인 작법을 지양해달라고 요구했고, 모리꼬네는 일렉트릭 기타와 노랫말 없는 허밍과 휘파람 소리를 적극 활용하는 등 당시에는 낯선 시도를 감행했다. 새로운 작법으로 주목받던 <황야의 무법자>의 음악 스타일은 곧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이와 성공을 모리꼬네 역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예전부터 여러 예명들 뒤에 숨어 작품을 발표하던 모리꼬네는 <황야의 무법자>의 크레딧에 이름을 댄 사비오로 올렸다.
<황야의 무법자> / <석양의 무법자>
레오네와 모리꼬네의 협업은 다음 작품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로 계속 이어진다. <석양의 무법자>의 영화음악이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탁한 관악기 소리가 와아↗와아↗앙~ 울리는 멜로디만으로도 저 황량한 땅에 두 사내가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 펼쳐지는 메인 테마는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레오네의 마지막 작품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까지 예외없이 콤비 체제를 이어나갔다. 시나리오를 충분히 설명하고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영화음악을 완성해 거기에 맞춰 배우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레오네의 음악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80,90년대 롤랑 조페 & 쥬세페 토르나토레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엔니오 모리꼬네
모리꼬네의 커리어는 80년대에 가장 화려하게 빛났다. (1971년 작 <막달레나>의 음악으로 만들었던) 'Chi Mai'가 재편곡돼 1981년 <프로페셔널>에 수록되면서 현재까지도 수많은 BGM으로 사용되는 고전으로 남았다. 레오네와의 마지막 작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로 극찬을 이끌어낸 그는, 1986년 롤랑 조페의 <미션>의 음악으로 또 다른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했다. 18세기 유럽 교황청의 남미 침략사를 따라가는 영화의 배경을 따라 관악기를 적극 활용해 중세 종교음악과 성가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재현해냈다. 하프시코드와 오보에의 환상적인 조화 'Gabriel's Oboe', 남미 원주민 소년들의 합창곡 'Ave Maria', 남미 민속악기를 끌어들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Te Deum Guarani' 등 수많은 명곡들이 탄생했다. 모리꼬네는 처참한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그린 롤랑 조페의 영화 <멸망의 창조>(1989)와 <시티 오브 조이>(1992)에도 음악을 제공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바로 <시네마 천국>(1988)이 아닐까?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 토토와 영사 기사 알프레도의 우정, 청년 토토와 그의 연인 알레나의 사랑을 펼치면서 그야말로 눈물을 쏙 빼놓는 <시네마 천국>은 모리꼬네의 아름다운 선율이 없었다면 아마 그 감동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토토가 알프레도가 틀어준 영화에 흠뻑 젖어 있을 때, 토토와 알레나가 그토록 사랑하면서 결국 이별할 때, 훌쩍 시간이 지나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어 알프레도가 검열된 키스신 모아놓은 필름을 볼 때(여기서 흐르는 'Love Theme'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아들 안드레아 모리꼬네가 작곡했다), 모리꼬네의 음악은 완벽하게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시네마 천국> 당시 이탈리아의 떠오르는 감독이었던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연을 맺었던 모리꼬네는 감독의 최근 작품 <코러스폰던스>(2016)까지 단 한 작품도 빼놓지 않고 음악을 선사했다. 토르나토레는 엔니오 모리꼬네에 대한 다큐멘터리 <The Glance of Music>을 만들고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걸작 갱스터 영화 <언터처블>(1987), 레오네의 페르소나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사선에서>(1993),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의 로맨스 <벅시>(1991)와 <러브 어페어>(1995), 금지된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로리타>(1997) 등이 있다.
2000년대 쿠엔틴 타란티노
그의 창작 활동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지만, 2000년대에 모리꼬네의 음악은 그의 60,70년대 작품들이 재조명 받는 과정에서 더 크게 회자되었다. 이탈리아 영화음악가의 작업들이 다양한 장르를 즐기는 음악 마니아들의 표적이 되면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잊혀진 흔적들이 다시 호명된 것이다. 마니아의 리스트에서 추앙되던 차, 모리꼬네에 대한 존경을 가장 유별나게 표현했던 이는 '덕후 중의 진성덕후'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타란티노는 <킬 빌 2>(2004)에서 <석양의 무법자>의 'Il tramonto', (레오 니콜스라는 예명으로 발표했던) <나바조 조>(1966)의 'A Silhouette Of Doom' 등을 인용하면서 모리꼬네 사랑을 만방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과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언제 봐도 민망한 한국판 제목)에도 모리꼬네의 감춰진 음악들을 활용했다. 어느 것 하나 빠질 데 없이 적재적소에 쓰였지만, 특히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중 쇼사나가 복수의 살육을 이루려던 그 순간 자신을 쫓아다니던 전쟁영웅에게 총을 맞고 쓰러질 때 흐르던 'Un Amico'는 최고의 오마주가 아닐까 한다.
타란티노는 성공한 덕후다. 모리꼬네는 자신에 대한 일편단심을 드러내던 타란티노에게 <장고: 분노의 추적>에 쓰일 오리지널 곡 'Ancora Qui'를 제공했다. 하지만 관계가 늘 순탄치는 않았다. 모리꼬네는 한 강연에서 다시는 타란티노와 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이 소식에 타란티노뿐만 아니라 둘의 협업을 염원하던 뭇 팬들까지 아쉬움을 표했지만, 츤데레모리꼬네는 타란티노의 웨스턴 <헤이트풀8>(2015)의 음악 전체를 작업했다. (OST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영화 속에 모리꼬네가 만든 <엑소시스트 2>(1977)와 <괴물>(1982)의 음악을 삽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미담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아카데미 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돼 5번이나 고배를 마신 바 있는 엔니오 모리꼬네는 <헤이트풀8>으로 올해 초 열린 시상식에서 드디어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덕후 소원성취의 모범답안이다.
<헤이트풀8> 사운드트랙의 두 가지 커버. 오른쪽은 잭 화이트가 운영하는 음반사 써드맨에서 발매한 LP의 커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