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라이언 고슬링이 사랑에 빠지면 위험하다. 적지 않은 영화 안에서 라이언 고슬링은 사랑으로 직진하는 남자를 연기했다. 사랑에 빠진 그의 분신들은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그녀를 위해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의 사랑이 종말을 맞을 때, 슬픔과 함께 측은지심이 몰려온 이유다. 라이언 고슬링하면 떠오르는 건 ‘멈춰 선 눈빛’이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되도록 오래, 깊게, 그리고 아련하고도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의 멈춰 선 눈빛은 시간을 잠시 정지시키고 그들을 감싼 공간의 공기를 데운다. 오래전, <노트북>(2004)에서부터 그는 그랬다.

<노트북>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고 묻는 순정파들의 바이블인 영화다.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평생을 함께하다 같은 날 눈을 감는, 그런. 빤한 신파이나, 감독이 포착해 낸 감수성과 라이언 고슬링-레이첼 맥아담스가 빚어내는 화학작용에 힘입어 영화는 강력한 호소력을 입었고, 알다시피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멜로 영화를 논할 때 약방에 감초처럼 호출되고 있다. 특히 노아를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별도 달도 진짜 따낼 것 같은 돌직구 스타일의 순정남을 스크린 안팎에서 체현하면서 뭇 여성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엘리(레이첼 맥아담스)에게 첫눈에 반한 노아가 다짜고짜 놀이기구에 매달려 “안 만나주면 떨어져 죽는다”고 떼쓰는 모습이 자해공갈로까지는 보이지는 않았던 것은, 그런 것들을 심각한 무례로 받아들이지 않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남자가 라이언 고슬링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자를 응시하는 그의 멈춰 선 눈빛은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의 완급을 리드미컬하게 조율하며 상황을 납득시킨다.

<블루 발렌타인>

반면 <블루 발렌타인>(2010)은 사랑에 관한 가장 비관적인 보고서다. 시간 앞에 100전 99패 일수밖에 없는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한 이야기이자(1승은 노아가 이미 했다), 흔들리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명절 증후군에 발목 잡힌 이 땅의 기혼 남녀가 본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 영화다. 소중한 상대가 일상이 되고 당연해지고 키스마저 무료해질 즈음, 사랑이란 환상은 지상으로 내려와 권태라는 이름을 남녀 앞에 불쑥 내민다. 영화는 이들의 사랑이 찢어지는 순간을 잔인할 만큼 사실감 있게 그려낸다.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교차편집 하며 심장에 찬 바람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변해가는 딘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은 <노트북>의 노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분장으로 휑하게 벗겨진 앞머리까지도. 그러나 그런 딘을 외면하기 힘든 건, 그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찬란하게 빛났지만 놀랍도록 식어버린 그의 눈빛을 보며 나는 지난 사랑이 떠올라 온몸으로 울었다. 아마, 당신들도 그럴 것이다.

<라라랜드>

<라라랜드>(2016)는 사랑에 대한 가장 완벽한 가정법이다. 서로를 많이 아꼈지만, 사랑 대신 꿈을 선택한 두 남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사랑과 꿈은 양립하기 힘들다고 웅변하고 있으며, 하나를 이루기 위해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도 있는 게 인생임을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그려낸다. 그런데 영화가 막을 내리려는 찰나, ‘만약’ (What If)이라는 가정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만약 이랬다면 우리의 사랑도…” 헤어진 남녀의 현재를 가정으로 뒤집어 풀어낸 라스트 신의 감흥은 눈물 핑 돌 정도로 먹먹했고, 슬프지만 아름답다. 스타라는 수식어를 집요하게 거부하며 주류 할리우드의 울타리 밖으로 무성하게 가지를 쳐 온 라이언 고슬링은 이 영화로 배우로서 다시 한번 도약했는데, ‘만약에’ 그가 미키마우스 클럽 동기였던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처럼 틴에이저 시절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면 그의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인생에서 가정법은 부질없다. 영화만이 그것을 아름답게 한다.

<드라이브>

그리고 <드라이브>(2011)가 있다.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에서의 라이언 고슬링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돌아왔다. <블루 발렌타인>과 <라라랜드> 사이에 나온 <드라이브>는 사랑이라는 뜻하지 않은 변수를 만난 인생 자체가 흔들려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낮에는 스턴트맨과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범죄집단의 도주를 돕는 과묵한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 이름도 고향도 불분명한 그는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남자다. 그런 남자에게 지켜주고 싶은 여인이 나타나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라이언 고슬링은 이 영화에서 ‘세상 모두를 돌같이 보는데,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가 사랑하는 여인 아이린(캐리 멀리건)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드라이브>

순정 마초인 이 남자는, 여자 앞에서 매사 조심스럽다. 그저 멈춰서 바라보다가, 너무 좋아 죽겠다는 마음이 들킬까 시선을 애써 돌릴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 바보야! 지금이 타이밍이라고!’를 속으로 얼마나 외쳤는지. 남자가 여자를 지키기 위해 갱단과 사투를 벌일수록 전갈이 수놓아진 그의 하얀 점퍼는 피로 물드는데, 적의 공격 앞에 냉혹해지는 야수의 눈빛은 진정 아이린을 바라보던 남자의 그것과 같단 말인가. 냉혹한 킬러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순정남을 스위치 전환하듯 오가는 라이언 고슬링의 퍼포먼스는 그르렁거리는 엔진의 굉음처럼 보는 이들의 심장을 두드린다. 어떤 배우를 논할 때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라이언 고슬링에겐 <드라이브>가 그런 영화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