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배신의 시대에
태어난 히어로

1970년대 중반 미국 만화책은 유소년층이 보는 잡지라는 인식에서 점점 탈피해서, 어둡고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을 지향하고 있었다. 우울한 과거와 현실을 살고 있는 히어로들이 등장했고, 정부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며 측근들조차 믿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사회 전반에 정부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이 만연했고, 잡지와 소설 등은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리며 대중에게 정신적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안티히어로들은 수십 년 전 등장한 슈퍼맨이나 캡틴 아메리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큰 상처를 하나씩 갖고 있던 안티히어로들은 복수심에 불타올랐으며, 그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최고 수준의 폭력을 행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데스록이 첫 등장한 <애스토니싱 테일즈> 25호 (Aug. 1974)

1974년에 등장한  데스록(또는 데슬록)은 이러한 정서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남성적이고 거친 스토리가 강점인 작가 더그 몬치의 스토리와 70~80년대에 다작하면서 당시 팬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남겼던 리치 버클러(환갑이 훌쩍 넘은 지금도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활동중이다)의 그림으로 탄생한 데스록은 당시 등장했던 어두운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다면 끔찍하달 수 있는 기원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가장 끔찍한 탄생 배경
지닌 히어로

스토리의 배경은 멀지 않은 디스토피아적 미래. 미 육군 소속 루터 매닝 대령은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뛰어난 군인이었던 그의 시신은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대신 사이먼 라이커 사령관의 지시 아래 당시 실험 중이던 ‘데스록 테크놀로지’의 실험 대상이 된다. 그의 반 부패한 시신은 사이보그화되고 머리에는 컴퓨터 칩이 내장된 채 전투 기계로 거듭나게 된다.

루터 매닝은 자신을 허락도 없이 로봇화해 반 불멸의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부인과 자녀들을 인질로 삼아 임무를 강제로 수행하게 만드는 사이먼 라이커와 일당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정부에 등을 돌린다. 자신을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의사를 생포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도 속임수. 그 와중에 라이커 사령관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데스록을 파괴하기 위해 병력과 로봇들을 계속 파견한다. 분개한 데스록은 결국 가슴에 있는 성조기 문양을 찢어버리기에 이른다.

마블 사가 디즈니 산하에 있는 현재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1970년대니까 가능했을 이러한 파격적인 캐릭터 기원 내용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잘 보여주는 일면이다.

데스록의 등장부터 사이먼 라이커와 정면으로 대결하기까지의 <애스토니싱 테일즈>의 약 10회 분량의 연재분은 70년대 마블 코믹스의 걸작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데스록의 설정은 많이 변경되어 그 이후로도 수많은 인물들이 데스록의 이름을 계승하였다. 마블 사는 90년대 중반 데스록의 인기를 다시 올려보려고 그의 이름을 건 타이틀을 발간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 그는 주류에서 이미 많이 멀어져 있는 상태이다.


데스록이 등장한 표지들.
후배들의 등장으로
영화화는 불가능?

1974년에 처음 등장한 데스록이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SF 영화들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로보캅의 경우, 임무 수행 중 중태에 빠진 경관이 로봇화된다는 설정 자체가 매우 유사하다. 그에게 경관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어 가족에 대한 아련한 기억으로 과거 살던 집에 찾아간다는 내용도 데스록 원작 만화에 그대로 있는 내용이다.

또한 자신의 창조자의 악한 의도를 알게 되어 그와 대적한다는 내용도 유사하다. 터미네이터와도 유사점이 많은데, 헌터-킬러 탱크 등 인공지능 또한 무선으로 조종하는 기계 병기들이 돌아다니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배경,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 이동, 절반은 인간 절반은 기계인 얼굴, 그리고 터미네이터 특유의 1인칭 시점 등은 전부 데스록 원작 만화에서 먼저 선보인 것들이다. 

<에이전트 오브 쉴드>에 등장하는 데스록의 모습.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데스록은 더 이상 영화화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같은 설정으로 영화화되면 로보캅과 터미네이터의 값싼 아류작으로 치부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마블 드라마 <에이전트 오브 쉴드>에서 변경된 설정으로 등장했고, 각종 마블 만화영화 시리즈에 얼굴을 비치기는 하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반 부패한 얼굴을 한 루터 매닝을 실버 스크린에서 만나게 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