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사라졌다
한 늙은 어머니가 딸에게 편지를 쓴다. 엄마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와 딸 안티아(프리실라 델가도) 모녀는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안타깝게 헤어졌다. 아니, 어느 날 갑자기 딸이 사라진 것이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영화는 시작부터 두 사람의 사연 전체를 알려주지 않고 별다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히 적은 양의 단서만 던져주면서 막연히 모녀의 과거를 추측하게 한다.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돌아다니는 엄마 줄리에타의 이야기를 다룬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줄리에타>는 무언가 수상해 보이는 여자들의 삶을 미스터리한 추리의 시선으로 따라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이 영화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영화라는 것이다.
미스터리한 여자
딸에게 편지를 쓰던 줄리에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괴로워한다. 그녀가 갑자기 편지를 쓰는 이유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딸 안티아의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미 안티아가 집을 떠나 사라진 지 수 년이 지났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던 줄리에타는 딸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도시를 떠나려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딸의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그 길로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다시 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줄리에타>는 단순한 드라마라기보다 좀 더 장르적인 접근이 관객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영화다. 누군가의 절망적인 죽음의 사건과 누군가의 가장 찬란한 섹스의 순간이 교차된다거나 열차를 타고 떠나는 여자의 앞에 우연히 들이닥치는 인연들에 관해 다루는 식으로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18세가 되던 순간에 부모 곁을 떠나는 딸의 운명 같은 요소가 영화 전체를 묘하게 신화적이거나 혹은 스릴러 영화처럼 보이게 만든다.
운명의 장난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엄마가 딸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다가 사랑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내던졌던 젊은 시절을 잠시 회상하기에 이른다. 젊은 시절의 줄리에타는 운명 같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첫눈에 빠진 이는 해안가 마을에서 어부로 일하는 소안이란 남자다. 둘은 어디론가 떠나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어떤 사건을 겪게 된 이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기차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 둘은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줄리에타는 주소 하나만 남기고 떠났던 소안을 찾겠다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
사랑의 절정과 끝
헤어졌던 소안과 극적으로 연락이 된 줄리에타는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사랑을 이어나간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에 딸 안티아가 태어나고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세상은 그녀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녀의 아름다웠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마는 것일까.
자세한 이야기는 설명하지 않겠지만 줄리에타는 소박하게 꿈꿨던 가족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다시 예전 그대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른다. 그 와중에 딸 안티아는 계속 성장해서 어느덧 엄마 곁을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사랑을 잃고 딸도 잃고 추락하듯 절망적인 상황을 연이어 겪은 줄리에타는 심신이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새로 찾아오는 기회를 잡아야 할지, 실패와 좌절을 안겨줬던 과거를 먼저 수습해나가야 할지 갈등한다. 줄리에타는 이 애타는 상황을 과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영화의 감상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익히 봐온 관객이라면 그의 영화 속 여자의 일생이 변화를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해보길 바란다. 그녀가 운명이 이끄는 대로 순간을 살았고 또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와있는 것을 되새기다 보면 엄마의 일생, 죄의식, 가족의 해체, 운명, 대물림과 같은 정서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줄리에타>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이다. 감독은 단편집 <떠남>(Runaway)을 읽고 3개의 작품 <Chance>, <Soon>, <Silence>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 3편의 단편은 모두 줄리에타가 주인공이지만 각각 연결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각각의 이야기를 통일시키는 각색 작업을 거친 것. 단편집 <떠남>은 그의 전작 <내가 사는 피부>에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교도소장 마릴리아(마리사 파레데스)가 포로 베라(엘레나 아나야)에게 건네준 접시에, 그리고 아침 밥상에 앨리스 먼로의 책이 있었다.
새로운 뮤즈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말에 따르면, <줄리에타>는 여성 세계로 돌아온 감독 자신의 복귀를 상징하는 영화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배우 캐스팅에 공을 들였을 것이다. 감독의 선택은 줄리에타의 20대 시절과 40대 시절을 각각 연기할 여배우를 따로 두는 것이었다. 20세부터 40세까지는 아드리아나 우가르테(위 사진)가 연기하고 40세 이상부터는 배우 엠마 수아레스가 맡았다. 단순히 주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가 배우들의 나이 든 분장만으로는 표현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감독의 의도 때문이었다. 특히 젊은 줄리에타를 연기하는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다른 영화들의 주연배우였던 페넬로페 크루즈, 빅토리아 아브릴, 세실라 로스 같은 배우들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배우다.
감독이 직접 꼽은
영화 속 명장면
남편 조안의 친구 에바는 조각가다. 그녀의 작업실에 우연히 놀러간 줄리에타는 점토로 남성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물럭거리며 만들고 있는 에바에게 말한다. “신들은 찰흙과 불의 도움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을 만들었어요.” 에바는 작업을 계속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줄리에타가 무언가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장면을 "여성의 힘이 느껴지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킹콩의 손 안에 있는 금발의 포로와 동일한 비율로 여성을 남성의 창조자로 보여주려 했다"고. 또 그는 이렇게도 덧붙인다.
여성은 남성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더욱 강인하게 보여진다.
싸우고 관리하고 고통 받으면서 인생이 주는 행복함을 누린다.
그녀보다 강인한 것은 운명뿐이다.
감독이 직접 전하는 말,
영화 두 번 보세요!
저의 작품 대부분은 한 번 이상 관람됩니다. <줄리에타>는 한 번 보고 스토리를 아는 상태로 두 번째 볼 때 훨씬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관객들에게 제공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첫 만남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법이지요. <줄리에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