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흔히들 '얼굴이 서사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훤칠한 얼굴이 하나의 장르요, 좀 어설픈 전개가 펼쳐진다 한들 많은 것들이 용서된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있어서 '이 배우'는 눈빛이 서사고, 눈빛이 장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 수백만 가지 사연 모아놓은 듯한 동공(!)의 소유자, 라이언 고슬링. 그의 작품들을 보고 나선 어떠한 큰 사건보단, 라이언 고슬링의 눈에 담겨 있던 감정들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한번 보면 도저히 잊기 어려운, 라이언 고슬링의 눈빛이 '다 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킹 메이커>(2012)

The Ides Of March

누군가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를 두고 '오묘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잘 짓는다는 말처럼도 들린다. 앞으로 소개할 모든 영화가 그 오묘함이 빛을 발한 영화다. 다른 영화들이 사랑의 감정과 관련된 것이라면, <킹메이커>는 부정한 권력과 정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얼굴을 담아냈다. "전 후보님과 결혼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스티븐(라이언 고슬링)은 '대선후보 경선' 후보인 마이크 모리스(조지 클루니)의 선거캠프 홍보관이다. 갈 땐 가고, 멈출 땐 멈출 줄 아는 술수를 부리며 선거 판도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자. 정의로운 사회에 한 스푼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정치판에 들어섰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배신을 맛본 그는 괴물로 변해간다.

<킹메이커>는 배우들의 호연에 큰 빚을 진 작품이다. 조지 클루니,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폴 지아마티의 훌륭한 호연은 물론이거니와 서서히 '현실 정치꾼'으로 변화해가는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지켜보는 재미가 크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스티븐은 정치판에 입문한 이후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것이 의리든, 배신이든, 정의든, 비리든, 폭로든. 끊임없이 흔들린다. 라이언 고슬링의 특기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존경하던 정치인의 어두컴컴한 현실을 알고 난 뒤부터, 총명했던 스티븐의 눈은 단번에 사연 많은 허무를 안은 눈동자로 돌변한다. 추악한 정치판에서 제 자신이 권력을 쥘 방법이 배신과 폭로뿐이라는 걸 똑똑히 알게 됐을 때의 그 무기력한 표정이란. 영화의 마지막 부분, 라이언 고슬링의 그 '오묘한' 눈빛은 <킹메이커>의 클라이맥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드라이브>(2011)

Drive

내로라하는 명감독들의 이름을 뒤로하고 니콜라스 원딩 레픈 감독에게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드라이브>는 장면 하나하나의 연출이 멋들어진 영화다. 허투루 카메라를 들이민 듯한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바꿔 말하면 러닝 타임 내내 힘이 가득 들어갔다는 말과도 같지만, <드라이브>는 그저 유려하고 스타일리쉬한 무언가에만 집중한 영화는 아니다. 빈틈없는 연출이 그저 '감탄용'이 아니란 것. 냉철하면서도 격렬한 주인공의 온도를 아름답게 대비시키는 것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드라이버는 얼핏 보아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이다. 낮에는 영화 현장에서 자동차 스턴트맨을, 밤에는 범죄자들의 도주 행각을 도우며 살아갈 뿐. 그런 그의 앞에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난다. 옆집, 405호에서 홀로 아들을 키우는 아이린(캐리 멀리건)이다. 그녀를 스칠 때마다 슬쩍슬쩍 몸이 반응하더니. 어느새 드라이버는 아이린를 목적지로 찍어놓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망쳐가며 아이린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잔인하게 제거한다. <드라이브>는 유혈이 낭자 하는 액션 영화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목뼈가 갈라지고, 드라이버의 얼굴엔 피가 마를 새가 없다. 그럼에도 <드라이브>를 떠올리며 피가 떡칠이 된 라이언 고슬링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 건 왜일까. 어느 한순간도 환하게 웃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사랑한단 말 한마디 하지는 않지만. 사랑이란 감정에 지배돼 무력을 '저지르는'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 <드라이브>는 그 특유의 표정에 빨려들어, 때때마다 꺼내 보고 싶게 만드는 로맨스(!) 영화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2013)

The Place Beyond the Pines

<드라이브>에 이어 라이언 고슬링은 또 달린다. 드라이버가 여자를 위해 달렸다면,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의 루크(라이언 고슬링)는 사랑하는 한 여자와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드라이버가 차량 스턴트맨이었다면 루크는 오토바이 스턴트맨이다. 말과 행동 모두 자유로워 보이는 루크는 1년 전 하룻밤을 보냈던 로미나(에바 멘데스)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았을지 몰라도 '아빠'가 된 이상 내가 아닌 가족을 위해 돈을 번다. 물론 그 방법이 의로운 것이었다면 좋았겠건만. 루크는 은행 강도질을 택한다. 그때부터 이 가족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기 시작한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는 라이언 고슬링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그는 극 전체가 아닌 전반부만을 담당했다. 후반부는 에이버리를 연기한 브래들리 쿠퍼의 몫. 루크와 에이버리가 한 '짓'이 어떤 화살이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는지를 상세하게 엮어낸, 진지하지만 흥미진진한 작품. 라이언 고슬링은 <노트북> <드라이브> 그리고 <블루 발렌타인>에 이어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도 거칠지만, 로맨틱한 캐릭터의 전형을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다소 비슷한 패턴의 캐릭터를 꾸준히 선택해 그의 얼굴이 질린다거나, 피로하다거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라이언 고슬링은 또 다른 결을 만들어내며 놀라움을 선사한다. <블루 발렌타인>을 통해 라이언 고슬링의 가능성을 한껏 넓혀준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라이언 고슬링의 '은인'이 된 셈이다.


<라라랜드>(2016)

La La Land

꿈과 현실.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미움. 안도와 질투. 그 어딘가에 서 있는 불안한 연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의 사계절을 담아낸 <라라랜드>는 누가 뭐라 해도 2016년 최고의 작품 중 하나. <위플래쉬>로 전 세계를 들썩인 데이미언 셔젤은 <라라랜드>를 통해 <위플래쉬>의 흥행이 그저 '운'이 아니었음을 똑똑히 증명해낸 셈이다. J.K 시몬스 그리고 마일즈 텔러에 이어 데이미언 셔젤은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을 제 무대 위에 세웠다. 그가 라이언 고슬링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재즈 뮤지션이라는 꿈, 그리고 그에 걸맞은 재능을 가진 세바스찬을 연기하는 데 라이언 고슬링만 한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언 고슬링은 영화 속 피아노 연주 장면을 '모두' 직접 연주했을 만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갖췄다. 사운드트랙에 직접 참여했을 만큼 노래 실력도 못지않다.

물론 음악적 재능 하나 때문에 라이언 고슬링을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음악적 재능은 3순위 정도? 꽉 막힌 고속도로를 뻥 뚫어 주었던 오프닝을 지나고, 꿈과 사랑 사이 방황의 시간을 지나고, <라라랜드>의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에서 우린 그가 세바스찬이 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만약에"를 되뇌는 상상을 지나 커다랗게 잡힌 세바스찬의 얼굴. 라이언 고슬링은 쌉싸름한 미소와 눈빛을 통해 그들이 보낸 모든 추억을 압축한다. 형용할 수 없지만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그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라이언 고슬링의 장기이자 가장 아름다운 능력이다. <라라랜드>는 라이언 고슬링의 그 장기가 가장 우아하고 씁쓸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Blade Runner 2049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 이후 35년 만에 제작된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라이언 고슬링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블레이드 러너' K를 연기했다. '리플리컨트'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을 찾아가며 끊임없이 제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는 K는 기계지만, 누구보다 감정에 충실하다. 함께 사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와 사랑에 빠지고, 함께 비를 맞고,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는 장면에서 누구보다 인간적인 K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언급한 라이언 고슬링의 '오묘함'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계속된다. 차가운 기계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그의 얼굴에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그 이상의 무언가가 전해진다. 누군가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향해 라이언 고슬링의 변신이라거나, 라이언 고슬링의 새로움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가 가진 특유의 '오묘한' 눈빛과 표정, 그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흑화한' 캐릭터 안에서도 사연 많은 그의 동공은 지워지지 않고 빛을 발했다.


씨네플레이 유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