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되어 온 이들의 삶을, ‘불쌍하다’고 내려보는 시선 말고 ‘함께 가야 한다’는 연대의 시선으로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소수자들을 다룰 때, 계속 ‘불쌍한 존재’ 정도로만 다루는 거 좀 답답하지 않아요?” 내가 본업으로 TV 평론을 하고, 겸직으로 인권단체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고 말하자, 상대는 대뜸 두 가지를 연결시킨 질문을 던졌다. “보면 장애인도 그렇고, 성소수자도 그렇고, 돈 벌러 한국 온 외국인들이나 미혼모도 그렇고, 죄다 ‘우리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 정도로만 그리잖아요? 안 불쌍한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서 도와줘야 할 사람들로 그리니까, 정작 그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데모 같은 거 하면 ‘어진 마음으로 도와주려 했더니 감히 건방지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아, 우연히 만난 시민조차도 이 정도의 담론을 대수롭지 않는 말투로 꺼내는 시절이라니, 내가 뭘 잘 안다고 어디 가서 전문가랍시고 떠들 수 있는 시대도 거진 다 끝난 듯하다. 나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네, 선생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한번은 소외계층을 위한 기금 모금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들도 가능한 한 밝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담아내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들이 이처럼 자신의 꿈을 향해 즐겁게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연대가 필요합니다”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좀처럼 모금이 안되고, 어떻게든 힘들고 아프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한껏 강조해야 그나마 모금이 된단다.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시청자들도 “어, 그래도 좀 살 만한 모양이다”라며 선뜻 ARS 모금 전화를 안 하는 것 같다며 제작진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몇 년 전에는 자신이 후원하는 아동이 자기가 후원한 돈으로 알 만한 브랜드에서 나온 롱패딩을 사 입었다며 격분해서는 후원을 끊겠다던 네티즌도 있었지. 다들 사는 게 각박해서 마음씀씀이도 어쩔 수 없이 각박해지는 모양이다 싶으면서도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위한 적선’이 아니라 ‘같은 세상 살아가는 이웃끼리의 연대’는 불가능한 걸까? 소수자들은 마냥 ‘불쌍한 사람’으로만 재현되어야 하는 걸까?
OTT 플랫폼 웨이브와 MBC, 영화사 수필름과 한국영화감독조합이 공동으로 기획, 제작한 8부작 SF 앤솔로지 드라마 <에스에프에잇(SF8)>(2020) 중 한 편인 <우주인 조안>에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온다. 미세먼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극심해진 2046년을 배경으로 한 <우주인 조안>의 세계에는 ‘C’와 ‘N’이라는 사실상의 계급이 존재한다. 어릴 적 미세먼지로 인한 각종 질병을 방지하는 항체주사를 맞아 100년에 가까운 기대수명을 누리는 C(Clean) 계급과, 고액의 항체주사를 살 돈이 없어 접종시기를 놓친 탓에 30년 남짓한 기대수명으로 살아가는 N(Non-Clean) 계급이 그것이다. 주인공 이오(최성은)는 20년 넘게 자신이 C인 줄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병원의 착각으로 항체주사가 엉뚱한 사람에게 접종되었으며 자신은 주사를 맞지 못한 N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는다. 남은 날들이 70여 년에서 10년 안쪽으로 급격하게 줄어든 이오는, 과연 다른 N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N들이 모여 사는 동네 ‘N타운’을 방문한다.
N타운 초입에서 만난 가이드소년은, 강화청정복을 입은 이오에게 말한다.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실 건 없어요. 세대가 새롭게 바뀌면서 N들은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우리는 13살에 기초교육만 마치고 나면 취업, 결혼, 출산, 모두 스스로 결정합니다. 사실 그 나이쯤이면 이미 부모가 죽었거나 곧 있을 부모의 죽음에 대비해야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N들만 가질 수 있는 게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에너지는 C들은 절대 넘볼 수 없는 것이죠. 세계적으로 예체능 분야에서 N들이 특히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건 아시죠?” 살아갈 날이 길지 않다는 걸 비극으로만 생각하던 이오의 마음은 가이드소년의 말을 듣고 흔들리고, 가이드소년이 말한대로 살아가고 있는 N인 조안(김보라)을 만나며 더 거세게 흔들린다.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로 일평생 커피도 한 모금 마셔본 적 없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춤을 추거나 청정복 없이 맨살로 대기를 마주해 본 적도 없는 이오는, 조안의 손을 잡고 그 모든 일들을 한다. 100년을 살 수는 없을지 몰라도 ‘지금 여기’의 오늘을 겁 없이 사는 건 가능하다.
물론 각자의 삶이 지닌 무게를 무시하고 무조건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의 행복과 즐거움이 있을 테니 당당하게 사시라”고 말하는 사람들, “저들도 그럭저럭 살 만해 보이니 우리는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까 싶어 말을 꺼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소외되어 온 이들의 삶을, ‘불쌍하다’고 내려보는 시선 말고 ‘함께 가야 한다’는 연대의 시선으로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도 전에 미처 몰랐던 즐거움이 생길지 모른다. 평생 커피 한 모금 먹어본 적 없었던 이오가 조안의 손을 잡은 뒤 커피의 맛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