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생명인 탓에 자기보호본능이 있으니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고, 느낄 수 있는 감각에 한계가 있으니 자기 고통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머리와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만, 내가 겪는 고통은 당장 온몸으로 느껴지니까. 결국 가장 생생하고 격렬하게 느껴지는 고통은 타인의 골절상이 아니라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한 올인 법이다. 초라하고 간사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사람인 것을.
그렇다고 ‘원래 사람이 다 그렇다’는 말을 ‘다 그래도 된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나야 내 고통이 제일 크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지만 남들에게도 그런 건 아니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아프고 힘들다. 그러니 비록 내가 겪는 아픔만큼 즉각적으로 아프진 않더라도, 상대도 몹시나 힘들고 아플 것이라 생각하고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내가 가장 힘든 건 아닐 거야’라고 머릿속으로 정정하는 균형감각, 그리고 ‘멀쩡해 보이는 저 사람도 사실 나름의 힘듦이 있겠지’라고 상상하고 공감하려 노력하는 힘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진작에 저마다 자기 손톱 밑에 박힌 가시만 바라보며 “네가 힘듦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제일 힘들어!”라고 울다가 멸종했을 것이다.
MBC <킬미 힐미>(2015) 속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재벌 3세 차도현(지성)도 그렇다. 스스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학대를 당했던 것만 같은 정황은 생각할수록 고통스럽고, 그로 인해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다른 인격들은 당황스럽다. 정신을 차려보면 다른 인격이 저질러 놓은 사고와 무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그걸 수습하고 살아야 하는 인생도 피곤하기 그지없다. 드라마가 진행되며 서서히 드러나는 도현의 과거는 상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데, 애초에 왜 몇 개의 조각으로 자아가 분열되었는지 능히 짐작할 만도 한 과거다.
그러나 도현은 자신이 가장 아프고 힘들었노라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데 멈춰 있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정신과의사 오리진(황정음)과 그의 쌍둥이 오빠 오리온(박서준)의 도움을 받으며, 도현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나 홀로 고립된 채 혼자 아프고 혼자 서러웠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타인과 함께 아프고 함께 서러웠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도현은 생각한다. 자신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타인의 고통에 있어서는 가해자이자 방관자였던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자신이 의도치 않게 잘못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도현의 다중인격장애는 비로소 천천히 치유되기 시작한다.
드라마 방영 당시에는 7개로 쪼개진 인격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연기해 보는 이를 설득하고야 마는 지성의 괴물 같은 연기력에 세간의 찬사가 몰렸다. 하지만 그 찬사가 단순히 연기력에 대한 칭찬에서 멈춘 게 아니라 인격 하나 하나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고 드라마 자체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진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상처 입은 도현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수 조각으로 쪼개졌던 인격들은, 그 고통이 도현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함께 힘들고 아팠을 누군가를 보듬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천천히 도현에게 협조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혼자서 골방 안에 숨어 있을 수 없으니까, 내 고통에 잠식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일어나서 나 때문에 아플 다른 이의 고통을 돌봐줘야 하니까. 이런 용기를 내는 인격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린 때로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고 살피는 데 인색하다. 내가 이처럼 힘들고 죽겠는데 다른 사람 챙길 여력은 또 어디 있냐고 합리화하고, 내 코가 석자라는 말로 외면하는 마음을 정당화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세상 사람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힘들다는 걸 알아도, 그 지식을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쓰는 대신 “너만 힘들어? 다 힘들어, 다!” 라고 상대를 제압하는 데 써먹곤 한다. 얼핏 보기에 나보다 덜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죄다 엄살이라 여기고, 언쟁이라도 붙으면 둘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굳이 경중을 재며 경쟁한다. 내가 더 불행하고 내가 더 힘드니까, 넌 좀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과연 그래서야 치유가 될까? 저마다 ‘내가 가장 아프다’, ‘난 감히 너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라고 말하며 각자의 골방 안에 숨어버리면, 그저 제각기 아프기만 한 사람들인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각자가 겪는 고통과 불행은 다 별개의 것이더라도, 서로가 그 아픔을 공감하고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을 때 치유도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나만 이렇게 아픈 게 아니라 남도 나처럼 아플 거라고, 내가 다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어도 저 사람도 저 사람 나름의 상처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타인의 상처를 살피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을 통해 연대하고 서로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을지 모른다. <킬미 힐미>의 도현이, 리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