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25번째 장편 <인트로덕션>이 현재 상영 중이다. 근래 홍상수 영화의 페르소나였던 김민희가 아닌, 신예 신석호와 박미소를 내세운 이번 신작은 홍상수의 새로운 전환점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뚜렷한 변화들이 눈에 띈다.


제목 ‘인트로덕션’

홍상수의 새 영화를 향한 호감은 그 제목을 알면서부터 시작된다.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도망친 여자... 홍상수 영화의 이름이 대부분 한글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인트로덕션’은 영어 한 단어다. 예고편에서 감독은 “영어의 인트로덕션(introduction)에 단어로 대응하는 말이 없습니다. 소개, 입문, 서문, (새것의) 도입 등의 뜻을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한국제목도 영어를 그대로 썼습니다”라 밝히며 영화에 걸맞는 ‘인트로덕션’의 의미들을 드문드문 나열한다. 먼저 등장하는 “한사람을 다른이에게 소개하는 행위”와 “한사람이 뭔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영화를 나눈 세 개의 이야기가 모두 품고 있는 요소다.


청춘의 이야기

<인트로덕션>의 주인공 영호와 주원은 젊은 연인이다. 주원은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고, 한국에 홀로 남은 영호는 유명 배우가 무심코 던진 말만 믿고 덜컥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연기를 위해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받아들지 못해 번뇌에 빠진다. 홍상수 영화에서 20대 청년들은 간간이 등장하긴 했어도 이번 영화처럼 두 젊은 남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처음이다. 영화는 서로 헤어져야 하는 연인의 애틋한 마음을 현실과 꿈이 뒤섞인 채 각자 다른 시점에서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기성세대가 두 청춘에게 가하는 미묘한 폭력을 그리기도 한다. 이것이 20대를 바라보는 홍상수의 시선이라고 단정 짓는 건 무리일 테지만, 어른 앞에서 주눅 들거나 긴장해 있던 젊은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겨우 불안을 다독인다. <인트로덕션>은 한사람이 다른이와 안고 안기는 걸 찍은 영화다.


새로운 얼굴

신석호와 박미소. <인트로덕션>의 두 주인공 영호와 주원을 연기한 배우다. 신석호는 홍상수의 근작들을 본 이들에겐 얼마간 낯익을 것이다. <풀잎들>(2017)에서 아름(김민희)에게 혼나는 친동생, <강변호텔>(2018)의 후반부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주유소 직원, <도망친 여자>에선 영순(서영화)의 집에 찾아와 대뜸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아달라고 청하는 주민을 연기했고, 세 작품 모두 연출부로 참여했다. 촬영 전 스탭들이 모인 자리에서 ‘배우’라고 소개받고는 연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주인공이 될 거라는 건 이미 촬영이 얼마간 진행된 후에야 알게 됐다고.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인 박미소는 <인트로덕션>이 ‘인트로덕션’ 하는 배우다. 신석호와 마찬가지로, 홍상수가 교편을 잡고 있는 건국대학교 영화과 학생인 박미소는 수업을 듣다가 캐스팅됐다. 작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전작 <도망친 여자>로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와 서영화가 공식 행사를 마친 후, 신석호와 박미소가 합류해 베를린 파트를 촬영했다. 연기 경력이 두텁지 않은 배우가 홍상수 영화 전면에 서는 건 <인트로덕션>이 처음. 두 배우의 연기는 기존 베테랑 배우들에 비하면 덜 능숙한 게 사실이지만, 영호와 주원이 품고 있는 불안한 마음을 담기에는 그런 미숙함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익숙한 배우들

눈에 익는 배우들도 많다. <그 후>(2017)와 <강변호텔>에서 작은 역할을 맡기도 했던 김민희는 이번엔 베를린에 유학 온 주원의 거처를 마련해주는 화가를 연기했다. 연기의 비중을 낮춘 대신 스크립터, 제작조수, 스틸 담당으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스틸 사진을 찍었다면 영호가 바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담은 <인트로덕션> 포스터의 속 사진 역시 김민희의 솜씨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로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부터는 줄곧 김민희와 함께 프레임에 잡히곤 했던 서영화는 주원의 엄마 역을 맡았다. 특유의 목소리처럼 홍상수 영화에선 언제나 온화한 인물만 연기했던 것과 달리, 주원의 엄마는 다소 강압적인 태도로 딸을 대한다. 저명한 연극배우 역으로 1부와 3부에 등장하는 기주봉은 <밤과 낮>(2007)부터 주연까지 맡은 <강변호텔>까지 홍상수가 자주 기용하는 배우들 중 하나다. 영호가 오랜만에 만나는 의사 아버지 역의 김영호와 병원 간호사 역의 예지원은 각각 <하하하>(2009), <우리 선희>(2013) 이후 오랜만에 홍상수 영화에 출연했다. 권해효 주연의 <그 후>를 통해 처음 영화에 출연한 연극배우 조윤희는 영호가 강릉에서 만나는 엄마를 연기했다.


홍상수의 새로운 데뷔작?

예고편이 일러주는 ‘인트로덕션’의 또 다른 의미 “어떤 것의 처음부분”과 “새로운 것을 (세상에) 가져옴”은 홍상수에게 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전작 <도망친 여자>부터 음악을 만들기도 했던 홍상수는 <인트로덕션>에서 촬영과 편집까지 스스로 도맡았다. 이 변화의 결과는 촬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2000년 초 저예산 영화에서 썼을 법한 소형 DV카메라를 직접 잡아 담아낸 이미지는 영호의 아버지가 책상에 앉아 기도하는 첫 장면부터 그 어두컴컴하고 거친 화질이 대번에 이질적인 감상을 안긴다. 병원 바깥에서 영호와 간호사가 대화를 나누는 신은 화면 프레임을 불안정적으로 잡고, 종종 자연광에 노출된 배경은 거의 표백된 것 같다. 하지만 홍상수의 카메라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니, 마치 그 방향이 영화에 더 여유를 불어넣는다고 믿는 것처럼, 집요하게 서로 몸을 맞대 얼어 있는(<인트로덕션>은 2020년 2월과 3월 사이에 찍었다) 몸과 마음을 녹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잡아내고야 만다. 25번째 장편영화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홍상수 영화는 서서히 변해왔지만, <인트로덕션>처럼 변화가 성큼 눈에 띈 적은 없었다. 홍상수의 새로운 데뷔작이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인트로덕션>보다 먼저 촬영했다고 알려진 (이혜영 주연의) 미개봉작 <당신 얼굴 앞에서>를 보면서 이 변화의 크기가 얼마나 가파른 것인지 보다 확실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