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란 무릇 목소리만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역사상 수많은 뮤지션이 있었지만, 영화에 사용됐을 때 그 쾌감이 가장 큰 뮤지션 중 하나가 바로 재즈 아티스트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아닐까 한다. 이번 영화음악감상실은 필자의 취향을 가득 담아, 니나 시몬의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I Got It Bad (And That Ain't Good)"
<위대한 레보스키>
The Big Lebowski, 1998
코엔 형제의 블랙 코미디 <위대한 레보스키>는 온갖 정신나간 설정으로 가득하다. 스스로를 '듀드'라고 부르는 제프리(제프 브리지스)는 자기와 이름이 똑같은 백만장자와 오해 받아 강도들의 침입을 받고, 그 일을 통해 백만장자 제프리 레보스키를 찾아가고, 그의 딸 모드(줄리안 무어)까지 알게 된다. 그리고 듀드는 자기가 바보 같고, 아니면 자기 친구가 바보 같아서, 어느 일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포르노 업자 재키 트리혼 집에서 마약이 든 술을 잔뜩 마시고 경찰서에서도 호되게 맞은 듀드는 갑자기 집에 찾아온 모드와 잠자리를 갖는다. 모드가 옷을 풀어헤치면 곧장 두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이어지는데, 방 안에서 흐르고 있는 니나 시몬의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I Got It Bad (And That Ain't Good)' 때문에 아주 약간이나마 무드가 있어 보이긴 한다. 서른 즈음의 니나 시몬이 발표한 작곡가 듀크 엘링턴이 만든 곡으로만 채운 앨범 <Nina Simone Sings Ellington>에 수록된 노래다.
"Sinnerman"
<인랜드 엠파이어>
Inland Empire, 2006
3시간 동안 관객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기는 데이빗 린치의 (현재로선) 마지막 장편영화 <인랜드 엠파이어>는 니나 시몬의 대곡 'Sinnerman'과 함께 끝을 맺는다. 끝내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호텔 로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들과 엔딩 크레딧이 이어진다. 1965년 앨범 <Pastel Blues>의 대미를 장식하는 'Sinnerman'은 본래 10분이 넘는데, 영화에서는 후반부를 인용했다. 전반부가 끝나고 기타 베이스 드럼의 타이트한 연주가 후에 몰아칠 분위기를 예열시키고, 피아노와 박수 소리로만 채워지는 대목에 이르러선 호텔 로비에 여자들이 모여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들어오면 센터에서 춤을 추던 여자가 린치 특유의 번쩍이는 조명을 맞으면서 시몬의 노래를 따라부른다. 미국 민요를 변화무쌍한 편곡을 통해 탈바꿈한 니나 시몬의 걸작은 근 3시간을 린치의 이미지 린치를 견뎌온 관객에게 완벽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Take Care of Business"
<맨 프롬 UNCLE>
The Man from U.N.C.L.E., 2015
나폴레옹 솔로(헨리 카빌)가 베를린 검문소를 빠져나오는 오프닝에 로버타 플랙의 'Compared to What'을 사용한 <맨 프롬 UNCLE>은 니나 시몬의 'Take Care of Business'로 끝맺는다.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나폴레옹 솔로, 일리야(아미 해머), 개비 텔러(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웨이벌리(휴 그랜트)로부터 1시간 후에 이스탄불로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새로운 코드명까지 듣는 그 순간 'Take Care of Business'의 육중한 브라스, 오케스트레이션 인트로가 빵빵하게 울린다. 레드와 블랙 컬러로 조합한 그래픽 몽타주가 엔딩 크레딧을 채우고, 행진곡처럼 들리는 니나 시몬의 노래가 속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실제로 'Take Care of Business'는 니나 시몬의 1965년 앨범 <I Put a Spell on You>의 마지막 트랙이기도 하다.
"Wild Is the Wind"
<위도우즈>
Widows, 2018
<위도우즈>는 도둑 일당이 작전 중에 모두 죽고, 갖고 있던 돈까지 불에 타버려, 그들의 아내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절도 작전을 펼치는 과정을 그린다. 하이스트 무비로 소비되기 딱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스티브 맥퀸 감독은 범죄물의 쾌감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그 아내들(Widows)의 심리를 그려내는 데에 공을 들인다. 니나 시몬의 'Wild is the Wind'가 등장하는 건 베로니카(비올라 데이비스)가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홀로 어둠이 깔린 창 밖을 바라보는 신에서다. 악기들의 연주만 적적하게 이어지다가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대뜸 남편 해리(리암 니슨)가 나타나 베로니카를 안는다. 빗물처럼 떨어지는 피아노 연주에 너무나 안정적인 시몬의 부드러운 소리가 얹어지면서 베로니카의 황량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하지만 그 순간은 이어지지 않고, 다른 앵글로 비춘 베로니카는 여전히 혼자다.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음악이 영화에 드러나는 음량으로써 드러내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I Put a Spell on You"
<포드 V 페라리>
Ford v Ferrari, 2019
세기의 레이싱 경기를 영화화 한 <포드 V 페라리>는 비단 경주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풀어내는 데에도 출중한 작품이다. 외골수 레이서 켄(크리스찬 베일)이 디자이너 캐롤(맷 데이먼)의 설득으로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영화 전반부를 차지한다. 목숨을 걸어야 할 기세로 우승을 향해 달려야 하는 레이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켄의 아내 몰리(케이트리오나 발피)가 그의 참가를 반대하지만, 결국 아들과 함께 켄을 가장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켄이 한밤 중에도 경기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자동차 정비에 골몰할 때 몰리가 찾아온다. 몰리는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다가 니나 시몬의 'I Put a Spell on You'에 딱 맞춰 오붓한 분위기를 만든다. 시종일관 격정을 뿜어내는 'I Put a Spell on You'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따스하게 만져지는 순간인 한편 몰리가 겨우겨우 감춰뒀을 불안이 보이기도 한다.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노바디>
Nobody, 2021
니나 시몬의 팬이라면 <노바디>에 대한 호감은 밥 오덴커크의 얼굴이 떠오르기 전부터 피어난다. 암전 위로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자막이 뜨고 하프와 피아노가 찰랑거리면 곧장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상처가 가득한 중년의 사내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는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니나 시몬 노래의 비장함과 아주 잘 어울리는데, 품에서 참치 통조림과 커터를 꺼내고 다른 품에서 아기 고양이를 나오게 해 밥을 주는 황당무계한 전개마저도 그 아이러니함 때문에 흥미는 배가 된다. 앞서 소개한 <맨 프롬 UNCLE>과 마찬가지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는 1964년 앨범 <Broadway-Blues-Ballads>의 문을 여는 트랙이다. 시작부터 니나 시몬을 쓰는 작품답게 <노바디>는 수많은 재즈 명곡들을 곳곳에 배치하면서 액션과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영화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Feeling Good"
<크루엘라>
Cruella, 2021
디즈니 실사 프로젝트 <크루엘라>는 '음악영화'를 표방한 웬만한 작품들보다 더 풍부하고 섬세하게 6/70년대 명곡들을 사용한다. 각종 도둑질로 연명하다가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손을 씻은 에스텔라(엠마 스톤)는 리버티 백화점에서 청소부로 일할 때 친 사고 덕분(?)에 남작 부인의 회사 '바로니스'에서 일하게 된다. 에스텔라가 처음 출근하는 시퀀스를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수식하는데, 아직도 새벽의 기운이 남아 있는 런던의 거리를 뛰면서 출근하는 모습부터 노래가 등장한다. 아무런 연주 없이 그저 니나 시몬의 읊조림만 나오는 오프닝에 서서히 악기가 더해지는 과정은 에스텔라가 바로니스의 작업실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과 맞물린다. 이를테면 뒷문과 계단을 지나 작업실로 들어서는 문을 열면 음악도 브라스 세션이 빰빰 하면서 터지는 식이다. 'Feeling Good' 라는 제목이 마치 꿈에 그리던 브랜드의 일원이 된 에스텔라의 흥분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음악은 에스텔라의 감정보다는 남작 부인의 어깨 가득한 권위에 더 걸맞아 보인다. 이 부조화는 결국 에스텔라와 남작 부인 사이 불화의 씨앗을 암시하는 것 같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