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세라 불리는 남자

K-드라마 리그 2019/2020 시즌 올스타전이 열렸다면, 가장 많은 출장 기록을 세웠을 선수는 ‘요정세’ 오정세일 것이다. 실로 그가 연기한 캐릭터 모두가 브라운관의 대어들이었다. <동백꽃 필 무렵> 노규태의 지질함은 오정세의 육신을 빌어 사랑스럽게 만개했고, <스토브리그> 빌런 권경민은 오정세를 통과하며 정당성을 획득했으며, <사이코지만 괜찮아> 문상태는 오정세 안에서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높은 비중의 서사를 부여받은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우정 출연한 <극한직업>의 테드 창처럼 기능적으로 소모될 수 있는 캐릭터 상투성마저도 오정세의 연기는 맛깔스럽게 뒤집곤 했다. 배우 오정세의 진짜 얼굴은 도대체 몇 개인 건가. 마침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발달장애 3급의 고기능 자폐를 겪는 문상태가 그림 작가로 데뷔한 동화책 제목이 ‘진짜 진짜 얼굴을 찾아서’였다. 의미심장한 제목이렷다.

낯빛을 능구렁이처럼 바꾸는 ‘배우 오정세’와 달리 ‘인간 오정세’의 진짜 얼굴을 예측할 만한 단서들은 꽤 있다. 오정세는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를 실천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건 나눌수록 크다’라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그와 관련된 미담들이 세상에 알려지곤 했으니까. 신뢰가 쌓이고 환호가 돌아왔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고른 지지를 받는 위치에 섰지만, 오정세는 그런 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건 어색하다는 듯 숨어버린다. 그리고 구석 어디론가로 가서 재미있는 일을 궁리한다. 오정세 스스로도 “개구쟁이 오정세와 낯가리는 오정세가 있다”라고 말하는데, 평범해 보이는 얼굴 안에 부글부글 끓는 에너지를 숨긴 남자랄까. 그러한 그의 매력을 최근 잘 포착해 내는 것 중 하나가 CF로, 대중이 사랑하는 오정세의 코믹한 이미지가 광고 아이디어와 만나 불꽃을 일으키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어떤 얼굴의 오정세를 만날 수 있을까 내심 궁금했던 건 이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누워서 인터뷰

PM 01:00 병원 근육치료실. 오정세를 만나러 가는 길. 약속 장소를 들여다보며 여러 번 웃었다. 병원(정형외과)에서 인터뷰라니. 이 엉뚱한 사내를 보았나. 물론 병원 인터뷰는 틀을 벗어난 재미를 추구하는 그의 기질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배려였음을. 이어지는 촬영으로 바쁜 와중에, 인터뷰 약속을 어떻게든 지키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을 공유한 것이었음을 둔한 기자는 대화가 진행될수록 깨달았다. 인터뷰는 근육치료실에서 진행됐는데, 열대야로 잠을 설쳐 퀭해진 기자의 눈 밑 다크서클을 발견한 것일까. 그가 담당의와 한참을 논의하더니, 비타민 수액을 함께 맞으면 어떻겠냐고 물어왔고, 그렇게 나란히 누워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인터뷰할 때 눈 맞춤은 필수인지라, 고개를 90도로 꺾고. (인터뷰는 병원의 사전 동의와 협의하에 단독실에서 진행됐으며, 내부 공간인 만큼 마스크를 항시 착용했습니다.)

-수액 맞으며 배우 인터뷰하는 최초의 기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웃음)

=하하하. 기획을 보니까, 배우가 자주 가는 곳에서 인터뷰하시더라고요. 요즘 제가 자주 가는 곳은 촬영장 아니면 소속사나 물리/운동치료 병원이에요. 인터뷰 요청 듣자마자 병원에서 하면 되겠네, 싶었죠. (대뜸) 그런데 겁이 없으신가 봐요.

-(흠칫)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겁이 많아서 주사 맞을 때 바늘을 못 봐요. 그런데 아까, 대수롭지 않게 링거 바늘이 피부로 들어오는 걸 보고 계시길래 추측했죠.

-작은 행동 하나에서 사람을 읽어내시다니!

=뭐든 인상적인 걸 발견하면, 내 안에 저장해 둬요. 연기할 때 꺼내 쓰려고요. 기자님 보면서는 ‘주사 맞으면서 바늘을 볼 수도 있네?’가 인지됐어요. 그럼 이제 풍성하게 그리는 거죠. 가령 외과적 응급처치 받는 장면을 언제고 찍을 때, 상처로 찢긴 부위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면 캐릭터가 강인해 보일 수 있겠구나, 입력하는 거예요.

-예리한 관찰력은 선천적 재능입니까, 후천적 노력입니까.

=부모님이 슈퍼마켓을 운영하세요. 일을 도우면서 많은 손님을 봤죠. 외모에서 묘한 인상을 심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특징을 기억해뒀다가 캐릭터에 덧칠해오곤 했어요

-“연기할 때 물리치료사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어요. 오늘 보니 이 역시 다년간의 관찰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제가 허리 아픈 걸 아니까, 주변에 허리 아프다는 친구들이 있으면 마사지를 해줘요. 그럼 다들 시원해하는데, 그걸 보면 괜히 뿌듯해요. 배우의 보람도 그와 비슷하다, 생각했죠. 내 연기를 보고 누군가 감동 받으면 거기에서 행복을 느껴요.

-오늘은 물리치료와 함께 운동치료도 받으신 거죠?

=네. 어렸을 때부터 허리가 많이 안 좋았거든요.

바쁘게 이어지는 촬영 틈틈이 아픈 허리를 치료 중이다.

-허리 통증의 원인은 뭔가요.

=중학생 때, 중앙선을 침범해 들어오는 차에 치여서 날아간 적이 있어요. 병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요. 그렇게 운전자와 ‘빠빠이’ 했는데, 2~3년 후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 후유증 때문인지 다른 요인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후부터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에, 어디 한 곳만 고장 나도 전신의 불균형을 초래하죠. 연기는 어떤가요. 연기를 구성하는 요소 중 무엇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나요?

=(오랜 생각) ‘어떻게 하면 연기가 다 망가지지?’라고 조금 돌려서 생각해봤을 때, ‘욕심’ 부리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가령 카메라가 ‘바스트숏’으로만 들어와도 뭔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욕심을 부리게 돼요. 힘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대개 ‘풀샷’일 때 연기가 좋고, 상대방 리액션해 줄 때 (어깨만 찍히는) 뒷모습 연기가 가장 좋아요. (일동 웃음)

-마음의 문제이군요.

=네. 연기할 때 저는 늘 싸워요. 긴장이라는 친구와. ‘지금 풀샷을 찍는 거야’라고 주문을 거는데,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설치 미술 작가의 작품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미술관에 카메라 두 대를 설치하고, 그 안에서 제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걸 15분 동안 촬영하는 영상물이었어요. 뭘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이라 너무 좋더라고요. 결과물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영상물이 부산에서 다른 작품들과 전시가 됐는데, 그 중엔 배우가 아닌 분들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도 있었어요. 그걸 보고, 제 영상을 다시 보니…아뿔싸. 제가 연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연기’를요.

-당신의 연기가 거짓으로 보였나요?

=거짓까지는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하지? 한 끗 차인데, 완전 진짜를 보니까 내가 넘지 못한 그 ‘한 끗’이 굉장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생각했죠. ‘너무 어렵다. 연기라는 게.’

-저는 그래서 배우분들을 존경해요. 연기라는 것 자체가 가짜인데, 거기에서 진짜를 또 찾아내시잖아요?

=작품 전체를 ‘진짜’로 채우기란 쉽지 않죠. 진짜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하나둘 정도가 나도 모르게 진짜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순간을 만나면 느껴지나요? ‘지금 이거, 진짜구나!’라는 게.

=느껴져요. 욕심이 없을 때 그런 진짜들이 나옵니다. 제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사형수 정윤수(강동원)의 감방 동기로 나왔었어요. 사형수는 사형집행일이 언제인지 모른대요. 그런데 그걸 직감적으로 안다고 하더군요. 교도관이 “면회 왔다”라고 호명해도 그 길이 형장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그걸 윤수와 감방 동기들이 직감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어요. 단역은 고개만 숙이고 있으면 됐으니, 저에겐 사실상 ‘풀샷’ 같은 신이었죠. (웃음) 그런데 “3987 면회!” 호명 받은 강동원 씨가 출발하는데 ‘저 친구, 지금 나가면 죽네?’라는 생각이 훅 들어오면서 눈물이 갑자기 떨어지는 거예요. 카메라에 찍히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이 저에겐 너무 소중해요. 참 소중한 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감정을 한 번 경험한 것과 아닌 것에는 큰 차이가 있겠죠?

=그게 신기한 게, 이런 감정 한 번 경험했으니 다음에 또 마음 비우고 해야지가 안 돼요. 경험할수록 성공 횟수도 늘면 참 좋겠는데, 연기라는 놈은 그게 아니라서 참. 허허허허.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세 살부터는 성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죠?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는 이제 너무 유명한데요. 학창 시절, 부모님이 아들에게 기대하는 게 있으셨나요.

=넌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넌 뭐 해야 해. 하는 건 없으셨어요. 부모님이 열심히 사시는 걸 보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자연스럽게 느낀 쪽입니다.

-당신들의 삶으로 자식에게 인생의 옳은 방향을 보여준 셈이군요.

=우리 부모님 세대는 아등바등 일하면서 사신 세대잖아요? 그래서인지, 해 준 게 없다고 늘 미안해하셨어요. 해준 게 없는 게 아닌데. 슈퍼를 쉬지 않으셨던 건 우리를 위해서였는데, 당신들은 뭘 못 해줬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슈퍼 한 지 40년 가까이 되는데, 절반은 24시간 영업이었어요. 쉬지 못하고 일만 하신 거죠. 열심히 사는 부모님의 삶 자체가 저에겐 교훈이었어요. 설렁설렁 살면 안 되겠구나, 부모님을 바라보며 늘 생각했죠.

-부모님에 대한 존경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애교 많은 아들은 못돼요. 활발하고 장난꾸러기인 오정세가 있고 소극적이고 낯가리는 오정세가 있는데, 아버지 앞에서는 후자인 오정세가 나와요. 오래전에 동네 골목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친 적이 있어요. 멀리서 아버지가 걸어오시는데 가까워질수록 되게 어색한 거예요. (웃음) 돌아가기엔 너무 멀고. 그래서 어색한 상태로 지나갔는데, 보통 길에서 부모님 만나면 “식사하셨어요” 내지는 “어디 가세요?”라고 묻잖아요? 그런데 저는, 무의식적으로 “안녕하세요~!” 했어요. (일동 폭소)

-1남 2녀 중 막내시죠? 누나만 있는 막내들은 굉장히 사랑을 받거나, 반대로 누나들에게 강하게 키워지는 면이 있던데, 어느 쪽이었나요.

=막내라서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누나들 영향도 크게 받았죠. 저도 누나들도 초등학생일 때였어요. 그때 성남 길거리에 음악 틀어놓고 길에 앉아 도움 청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큰누나, 작은누나가 그분들에게 선물을 드리자고 하더라고요. 모아 둔 용돈으로 양말을 몇 켤레 사서 따뜻한 보리차랑 함께 드리자고요. 그렇게 그분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보온병에 담은 보리차랑 양말을 선물한 경험이 있는데, 뻘쭘하고 낯설기는 했지만, 그게 저에겐 굉장히 좋은 정서로 남아있어요.

-듣기만 해도 너무 따듯하네요.

=누나들에게 얻은 정서죠.

-갑자기 궁금한데 스스로가 감성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 때문에 운 건 손꼽힐 정도로 없는 편입니다. 드라마 보면서도 담담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나 리얼 예능 보면서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울어요. 옛날에 <우정의 무대> 보면서도 그랬어요. 병사가 “(장막 뒤 어머니가) 저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어~머니!”하고 외치면 이제 눈물이 막~ (일동 웃음)

-리얼리티에 약하시군요. (웃음)

=그런 면이 있어요.

마성의 한류스타 승재로 분했던 <남자사용설명서>. 당초 다른 역할로 캐스팅됐던 오정세는 주인공 승재를 연기할 기회가 찾아오자, 열과 성을 다해 기회를 실력으로 치환해 냈다. 그를 논하는데 빼놓으면 섭섭한 마성의 작품.

오정세는 스무 살 때까지 자신의 의지 하에 뭔가를 직접 선택한 기억이 별로 없다. 남들이 가니까, 남들이 하니까. 다수가 걸어간 길을 큰 고민 없이 따라가던 오정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자기 인생에서 자신이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임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렇게 전국 대학에 있는 모든 과를 펼쳐놓고 생각했다. 지금의 선택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칠 텐데, 평생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경영학과? 아니야! 건축학과? 아니야! 그렇게 지워나가다 보니 남은 건 하나. 연극영화과였다.

지금의 오정세를 떠올리면, 이렇게 끼 많은 사람이 대한민국 모든 연극영화과를 낙방한 사실이 기막히기도 하지만, 그의 말대로 “준비된 게 없으니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약”이 됐다. 연기를 전공했다면 이를 공부로 받아들였을 텐데, 아니었기에 연기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과 갈증은 커졌다. 그는 연기 강좌와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몸으로 부딪쳤고, 각종 오디션에 도전하고 떨어지고 도전하고 떨어졌고 또 도전했다.

=오디션에 합격하고 합격하고 합격한 게 쌓여서 지금의 오정세가 된 게 아니라, 떨어지고 떨어지고 수백 번 떨어진 게 지금의 저를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그렇기에 놓쳐서 아쉬운 건 별로 없어요. 물론 사람이기에 당시에는 많이 아쉬워했지만요.

어딘가에서 읽었던 책 문구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지나온 날들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선택하지 않고 놓쳐버린 것들의 총합도 지금의 나”라는 문구가.

=무수히 많은 탈락의 경험에서 얻은 게 참 많습니다. 한 번은 너무 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오디션 준비를 하고 갔죠. 결과는 탈락! 몇 달 후에 운 좋게도, 좋은 역할의 오디션 기회가 왔어요. 그랬을 때 이전 경험을 복기해요 ‘잠깐만! 내가 이전에 최선을 다했는데 떨어졌어. 어쩌면 내가 그때 한 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네? 그럼 그때 했던 최선의 곱하기 3을 더해 볼까?’가 되면서 더 준비하고 더 고민하죠.

-2000년에 ‘액터스21 아카데미’에 들어가 6개월간 연기를 배웠는데, 그 시절이 당신에게 남긴 유산은 뭔가요.

=같이 걷게 된 든든한 친구들이요. 혼자 걷다가 동반자들을 만난 거죠. 연기의 기술보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신 오지혜 선생님(평소 호칭은 ‘형’), 함께 오디션 보러 다니며 위로하고 응원했던 액터스21 동기들. 그때 함께했던 ‘우리만의 작은 영화제’도 많이 그립네요.

-정식 데뷔작은 2002년 연극 <이발사 박봉구>였습니다. 정보를 찾아보니, 5월 시작해서 월드컵 기간인 6월에도 열기를 이어간 연극이더라고요. 2002년 6월은 우리에게 월드컵 함성으로 기억돼 있는데, 당신에겐 무대 밖 함성과 무대 위 함성이 오버랩 된 해가 아닐까 짐작해 봐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연극도 축구처럼 축제 분위기였어요. 연일 매진이었거든요. 둘 다 축제인데 저에겐 완전히 다른 축제였죠. 축구는 제가 마음껏 소리 지르면서 즐길 수 있었던 축제. 반면 무대는 너무나 어렵고 조마조마했던 축제였죠. 운 좋게 기회를 얻었지만, 기본이 안 돼 있었기에 무대에선 많이 혼나고 깨졌거든요. 그때의 저에게 연극은 관객과의 소통 이런 개념이 아니라, 제 연기하기에 급급한 것이었어요.

-그런 무대가 왜 그렇게 좋았나요.

=‘행.복.하.다’라는 감정 있잖아요? 저는요, 그 감정을 그때 처음 느꼈어요. 이전까지 행복이라는 건 저에게 추상적인 개념이었거든요. 그런데 첫 커튼콜 때 생각지도 않았던 눈물이 쏟아지면서 그 감정의 실체를 만났죠.

-그런 당신에게 핸디캡이라 여겨진 게 있다면요?

=울렁증. 긴장이 저를 졸졸 따라다녔어요.

-어느 정도의 긴장은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적당한 긴장이라면 건강하죠. 문제는 나만 긴장하면 좋은데, 보는 사람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긴장이라…(웃음) <이발사 박봉구> 이후 <라이어>라는 연극을 6개월간 했어요. ‘스탠 리’라는 메인 역할이었죠. 더블 캐스팅이어서 제 공연이 없는 날, 구경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동료들이 “형, 온 김에 특종기자 역할 하는 거 어때?” 하더군요. 무대 올라가서 “어이, 존 스미스 여기 좀 보세요. (사진 ‘찰칵’ 찍고) 앗~싸”하고 바로 빠지는 게 특종기자 역할이에요. 간단한 신이라서 “그래 내가 할게!” 했는데, 말을 뱉자마자 (심장 짚으며) 쿵쾅쿵쾅쿵쾅. 매일 섰던 무대인데도, 안 해 본 역할을 맡으니 떨리더라고요. 배우들은 긴장하면 숨을 안 쉬고 대사를 뱉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다면!

=맞아요. 들어가자마자 “(속사포처럼) 어.이.존.스.미.스.여.기!(찰칵)아.아.싸!”하고 후다닥 도망 나왔지 뭐예요. (일동 웃음) 연극으로 입문한 많은 배우가 고향 같은 연극 무대에 다시 서고 싶다고 하는데, 저에게 연극 무대는 고향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도전이에요. 여전히 저에겐 긴장되고 숨이 안 쉬어지는 공간이랄까. 그래서 언제고 연극을 다시 한다면, 작품성이나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무대 위에서 놀 수 있는 걸 1차 목표로 할 것 같아요.

-카메라 앞에선 어떤가요.

=무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첫 촬영이나 초반에는 긴장하고 부자연스러워하고 그래요. 다행히 상대 배우나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옅어지고 있어요.

삶(Life)을 연기하는 배우

-소속사 ‘프레인TPC’와 오랜 시간 함께 해오고 계십니다. 2017년 재계약 발표 당시, 여준영 대표님이 직접 써서 전한 러브레터에 가까운 긴 글이 참 뭉클했어요. “야구로 치면 홈런왕, 다승왕은 아직 못했지만, 연속 출장, 최다 경기 출장 같은 기록에 도전해 볼 만한 배우”라고 당신에게 애정을 드러낸 부분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는데요, 이후 4년간 홈런도 치고 다승왕 행진도 하는 배우가 되셨어요.

=그리고 야구로 치면 언제 은퇴할지 모르겠지만(웃음), 지금은 운이 좋아서 홈런도 치고 안타도 치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야구가 그렇잖아요? 잘 맞을 때도 있지만, 안 맞을 때도 있잖아요. 연기 역시 몇 번 잘했다고 해서 탄력받아서 계속 올라가지 않아요. 최근엔 안타를 쳤지만, 올 하반기에는 9회 말 2사 만루에 타자로 들어서서 3진 당하는 선수가 될 수도 있기에 당장의 결과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많이 합니다.

-마음을 다잡는 데 에너지 소비는 없으신가요.

=주사 맞기 전과 비슷해요. 무섭다고 아등바등해봤자 피할 수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힘 빼고 맞자 그러거든요. (웃음)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닌 이력이 유명합니다. 정은표 배우가 인터뷰에서 당신에 대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작은 역할이라도 마음에 들면 감독을 먼저 찾아간대요. 진짜 멋지지 않나요?”라고. 정은표 배우 말의 방점은 ‘멋지다’에 찍혀 있었는데, 공감했어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누군가는 거절당할까 봐, 누군가는 자존감이나 자존심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잖아요?

=‘큰 역할=성공’ ‘작은 역할=실패’라는 기준 자체가 저에겐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군요. 가령 이충현 감독의 <몸 값>(2015)이라는 단편 영화를 제가 너무 좋아해요. 감독님의 첫 장편 영화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 그 작품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마음’, 그리고 그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가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장편(영화 <콜>) 준비 중이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래서 뒷모습만 나와도 상관없으니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죠.

-<콜>은 참여에 의미를 둔 작품이었군요.

=그렇죠. 조금 다른 개념이긴 한데, <극한직업>도 사실 테드 창이 아닌 다른 역할로 제안받았어요. 당시 시나리오상에 테드 창보다 분량이 더 많은 배역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어떤 캐릭터가 더 좋고 나쁘다가 아니라, 분량이 적더라도 테드 창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출연 분량이 기준이 아니기에, 그런 선택을 하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극한직업>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테드 창과 이무배(신하균)의 ‘티카티카’를 굉장히 사랑합니다. 두 분이 대사 치는 타이밍은 거의 도사 수준인데요. 아이러니한 게, 신하균 배우도 당신 못지않게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 분이잖아요? 그런 두 분이 영화 안에서 ‘도른자’ 연기를 하고 계시니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렸듯 제가 활달함과 낯 가리는 모습 사이의 간극이 큰 사람이라면, 하균이 형은 조용한 모습을 기본 바탕으로 유쾌함을 품은 사람이에요. 그 모든 걸 떠나서, 작품 안에서 다른 옷을 입으면 그냥 그 사람이 돼 버리는 게 있고요. 그런데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게, 기자님도 츄리닝 입고 슈퍼 나갈 때와 차려입고 예식장 갈 때의 걸음걸이나 말투가 조금은 다르잖아요? 그런 개념인 것 같아요. 의상에 따라서 달라지는.

-연기 유형으로 보면 두 분 모두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스타일이죠.

=이무배가 식당에 나타나니까, 제 부하들이 칼로 위협하면서 이무배에게 달려드는 신이 있어요. 그때 제가 부하들 말리면서 “야야 괜찮아~ 얘 싸움 졸라 못 해!”라고 애드리브 하는데, 그 대사도 사실 형 때문에 나왔어요. 그 신을 형이 먼저 찍었는데, 형이 (‘나 잡아 봐라’ 포즈 취하며) 이렇게 하면서 들어오지 뭐예요. (일동 웃음) 제 눈에는 싸움을 진~짜 못하게 보였어요. 자연스럽게 그 대사가 나온 거죠.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상대가 어떤 액션을 주느냐에 따라서 리액션이 많이 바뀌는 스타일이네요.

=이전에는 준비해 간 걸 현장에서 모두 구현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준비해 간 걸 상황에 맞게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기 시작했죠. 이전에는 잘 못 버렸거든요. 이젠 상대방의 호흡이랄지, 현장 분위기랄지, 전체를 보고 쓰느냐 안 쓰냐로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저세상 텐션’인 테드 창을 우리가 만날 수 있었군요.

=(깊게 생각한 후) 연기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가끔가다 혼나기도 하고, 가끔가다 칭찬도 받고, 가끔가다 보너스도 받아요. 제 입장에서 테드 창 타입의 인물은 처음이 아니었어요.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런 캐릭터를 연기했었단 말이죠. 그랬을 때, 테드 창을 제가 이전 캐릭터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고 잘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조금 다르게 표현한 정도일 뿐이거든요. 다만 이전 캐릭터가 3 정도의 사랑을 받았다면, 테드 창은 <극한직업>이 잘 되면서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거예요. 제겐 보너스 같은 느낌인 겁니다.

‘No규태Zone’ ‘노규태 노(No)땅콩’의 주인공 노규태. <동백꽃 필 무렵>에서 오정세는 뭔가 많이 허술한데, 자꾸만 정이 가는 노규태를 창조해 너른 지지를 받았다.

백상예술대상에서 <동백꽃 필 무렵>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후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잘해서 결과가 좋은 게 아니고, 못해서 망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자책하던 날, “계속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동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오정세의 말에 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위로를 받았었다. 하루아침에 나온 말이 아니었음을. 100편 넘는 작품을 하면서 늘 똑같은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했던 자의 토양에서 나온 말이었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눈길을 끄는 건, 독립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출연으로 이어진 그의 행보다. 한국 노동 문제를 파고든 영화에서 그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송전탑 수리공을 맡아 “성실하게 일한 만큼 대우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여러모로 오정세는 무엇을 성취했느냐보다, 어떻게 성취했느냐가 더 이목을 끄는 배우다.

-배우 인생을 야구로 친다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 같으십니까.

=6회 초. 목표라면…‘1루 정도는 계속 출루할 수 있으면 좋겠다!’

-‘스토브리그(비시즌에 프로구단이 팀 전력 보강을 위해 선수 영입과 연봉 협상에 나서는 시기)’를 배우에게 대입한다면, 작품 사이 사이가 모두 스토브리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시간을 잘 보는 건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저는 전시회나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녀요. 바로 다음 작품을 위해서라기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작품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저장해 놓으려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미술이나 음악을 많이 아는 건 아니고요, 이전에는 미술 전시회를 가면 둘러보는데 5분이면 끝났어요. (웃음) 2~3시간 보는 분들을 신기해했죠. 그런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넓어졌어요.

-최근 눈길이 가는 전시나 작가가 있다면요?

=익명의 작가 ‘뱅크시’요. 사회적인 메시지를 재치 있게 해석해서 전달하는 것도 그렇고, 그 행보가 참 흥미로워요. 뱅크시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전달 수 있는 방법이 배우에겐 뭐가 있을까도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곤 합니다.

-혹시 그게 연출작이 될 수도 있을까요? 영상을 찍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써놓은 시놉시스가 세 개 있어요. 그걸 언제고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어찌 될지는 모르겠어요. 시놉시스 중 하나는 ‘행복한 감정’과 ‘가장 슬픈 감정’이 함께 오는 설정인데, 그래서 <스윙키즈>(2018) 병삼(오정세)을 만났을 때 너무 좋았어요. 표현해 보고 싶었던 감정의 결이 병삼에게 있었거든요. 찾아 헤매던 아내 매화(주해은)를 드디어 발견했는데, 그 아내가 놓여 있는 참혹한 상황도 동시에 보게 되는 인물.

-말씀처럼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큰 슬픔을 겪는 인물이었죠.

=네. 촬영 3~4개월 전에 매화를 맡은 배우에게 양해를 구해서, 그 친구의 돌사진부터 초중고 사진을 받았어요. 받아서 매일 봤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되뇌인 거죠. 탭댄스 연습하다가 꺼내 보고, 대사 외우다가 꺼내서 ‘애를 꼭 찾아야 하는데’ 상상하고. 드디어 촬영 날. 저는 재회 장면에서 주체 못 할 감정이 ‘빵’ 터지길 바랐는데, 그러지는 못했어요. 만족스러운 감정을 연기하지 못한 거죠. 그럼에도 병삼을 제 안에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준비 안 해서 감정이 안 나왔더라면 속상했을 텐데,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놓을 수 있었던 거죠.

-최선을 다했기에 놓을 수 있었다…담아두고 싶은 말이군요.

=올림픽에서였나? 한 수영 선수가 3위로 들어왔어요. 은메달을 딴 선수와의 차이는 불과 0.01초. 기자가 묻습니다. “아쉽지 않나”고. 선수는 해맑게 웃으면서 그래요. 자신의 기록을 넘어서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최선을 다한 자의 아름다운 미소였어요.

‘엄마 나무’ 앞에서 동화책을 읽을 때 상태가 흘린 눈물은 오정세의 진짜 눈물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촬영하며 오정세를 지켜본 박신우 감독은 그에 대해 배우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미소를 오정세에게서 본 적이 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방영 당시, 그가 발달장애를 지닌 첼리스트 배범준 씨와 놀이공원에서 시간을 보낸 사연이 알려진 바 있다. 상태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범준 씨의 요청으로 성사된 만남이었다. 오정세의 마음이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소속사도 함구했던 이야기. 그러나 범준 씨 가족이 오정세의 선한 영향력을 알리고 싶어 SNS에 공개하면서 그날의 사연은 온라인을 타고 퍼져나갔다. 함께 공개된 사진 속, 오정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이 사연에는 몇 가지 맥락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상태를 연기한 오정세 연기가 진실되지 않았다면 범준 씨는 드라마를 보며 “상태를 위로해줘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정세가 상태를 그냥 ‘연기’라고만 여겼다면, 그는 범준 씨 요청에 고민했을 것이다.

=저는 잘 울지 못하는 배우에 속해요. 그런데 상태가 되면 안 그랬어요. 울음 버튼이 있는 것마냥, <사이코지만 괜찮아> 현장에서는 (김)수현이랑 (서)예지 눈만 보고 있어도 눈이 막 뜨거워지곤 했어요. 연기할 때 수현이랑 예지가 와서 눈을 마주쳐주면 큰 도움이 됐고, 그 친구들도 혼자 연기하다가 감정이 안 나오면 “정세 형/오빠 좀 불러주세요”하곤 했죠.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 같은 존재였죠.

-예쁜 촬영 현장이었네요.

=‘진짜’가 올라온 신도 있었어요. 동화책 작가가 된 상태가 초판을 들고 엄마가 잠들어 있는 ‘엄마 나무’로 가서 자랑하는 신입니다. 원래 대본은 감정적인 신이 아니었어요. “엄마 나 작가 됐어요. 잘했죠?” 정도였는데, 이상도 하지. 뜨거운 게 올라왔어요. 이렇게 감정적으로 가는 게 맞는지, 감독님도 고민하셨는데 최종적으로 그걸 써 주셨죠.

-어떤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셨는지는, 놀이공간 일화에서도 엿보입니다.

=어릴 때 친누나들과 경험한 정서가 저에게 귀하게 남아있다고 했잖아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아는데, 실천은 많이 못 해왔어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래서인지 연락을 받았을 때, 저긴 그냥 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범준 씨 어머니가 “어렵게 와 주셨는데 범준이가 낯선 사람 보듯 할 수도 있다”라고 하셨는데, 그건 저에게 전혀 고민이 아니었어요. 오정세로 가는 게 맞나, 상태로 가는 게 맞나가 고민이었죠. 생각해보니 오정세는 그 친구에게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상태 복장으로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죠. 저도 많은 걸 얻은 하루였습니다.

-당신을 이야기하면서 <남자사용설명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오정세사용설명서’라는 게 나온다면 어떤 문구가 특별히 있어야 할 것 같나요?

=‘놔둬라?’ 왜 보통 매장에 가면 직원들이 묻잖아요. “어떻게 오셨어요?” “뭐 찾으세요?” “색깔 뭐 좋아하세요?” 그런 안내가 편한 분들도 많겠지만, 저는 조금 불편하더라고요.

-하하. 같은 입장인지라, 너무 공감되는군요.

=여대표님이 운영하는 패션숍이 있는데 거기가 그래요. 함께 일하시는 분들에게 대표님이 주문하신 게 ‘최대한 놔둬라’에요. 대신 고객이 물어보면, ‘그 누구보다 친절하게 설명해 드려라’ 거든요.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저는 놔둬야 자연스럽게 마음을 여는 편이에요. 제가 타인을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배우를 만났을 때, 기쁜 마음에 연을 맺고 싶어서 억지로 뭔가를 하면 오히려 어그러지더라고요. 인위적인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남자사용설명서>엔 ‘연애 비법 비디오테이프’가 중요하게 등장하죠. 현실에 대입하면 어떨까요. ‘연애 비법’ 말고, 어떤 비법을 다룬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면 구매하실래요?

=어떤 게 좋으려나. (오랜 생각) 떠오르는 것들은 시중에 이미 다 판매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행복해지는 비법’ ‘건강해지는 비법’ 같은 것들 말이죠. 교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실천을 안 하고 있으니 ‘실천하는 비법’이 나오면 사려나? (웃음)

-여러 인터뷰에서 <동백꽃 필 무렵> 노규태의 테마는 ‘외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오정세의 테마는 뭔가요.

=건강? 하하하. 최근 영화 <하이파이브>와 드라마 <엉클>을 찍고 있어요. 촬영 중에 여러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몸이 아프니까 자연스러운 구현이 안 돼서 속상하더라고요. 더 좋은 장면을 구현하고 싶은 욕심이 배우에겐 있잖아요?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라는 말에는 동의하시나요?

=동의합니다. 그걸 인디 밴드 친구들을 보면서 느끼죠. 낮에는 일터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음악을 하고, 때로는 자신에게 휴식도 주면서 건강을 삶을 뮤지션들이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이 더 좋게 들려요.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들었다면 여느 가수의 음악과 다르지 않게 들렸을 텐데, 그가 사는 삶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다 보니 음악도 더 마음에 와닿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느끼죠. 좋은 가수라는 게 테크닉적으로 훌륭한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배우로서 조금 서툴면 어때.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의 뒷모습

누가 그랬더라. 우린 오정세라는 동백꽃이 만발한 시대에 있다고. 박노해 시인은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했다. 나무에서 한 번 피고, 떨어져 땅에서 또 한 번 피고, 이내 가슴에 붉게 다시 핀다고. 오정세의 동백꽃들이 그렇다. 그의 마음에서 한 번 피고, 작품으로 스며들어 또 한 번 피고, 이내 보는 이들의 마음으로 붉게 물든다. 물론 제대로 피지 못하는 꽃들이 있고, 인생도 연기도 그러하다. 오정세는 다짐하듯 말했다. “60~70까지 연기를 한다면 계속 오르락내리락할 텐데, 조금 칭찬받았다고 신나 하고 조금 내려갔다고 힘들어하면, 버틸 수 없어요. 의미 부여하지 않아야 오래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어요.” 대화 말미에 그는 최근 재미있게 본 광고 영상들을 열거하며 즐거워했다. 가령, 본드 한 방울 똑 떨어뜨리자 시곗바늘 초침이 3초 만에 멈추는 ‘본드 광고’ 같은 것들. 이 모든 게 그가 만들어가는 캐릭터의 질료가 되겠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