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석양을 배경 삼아 자유롭게 흔들리던 <버닝>의 해미와 예상 불가능한 내면의 광기를 서슴없이 뿜어내던 <콜>의 영숙, 남다른 능력을 각성하고 마침내 갇혔던 자유를 세상에 표출하던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의 모나리자처럼 작품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전종서에게 로맨스라는 장르가 가벼운 옷처럼 느껴진다면 오해다.

<연애 빠진 로맨스>의 자영은 전종서이기 때문에 설득될만한 20대의 복잡한 감정을 세심하게 담아냈다. 전종서는 마음을 다칠까 본능에만 충실하다가도 이내 모든 것을 내주고 싶고, 상처의 흔적 때문에 주저하다가도 다시 빠져들고야 마는 사랑의 특별함과 보편성 모두를 아슬아슬한 감정의 파동을 통해 현실에 내놓는다.

이렇게 해보다 안되면 저렇게 해보고, 연기에 대해 정해 놓은 것도 없고 계산하지도 않는다 말하는 전종서를 보면서 뜬금없이 봉준호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내겐 배우를 향한 모순된 생각이 있는데, 내가 구상한 대로 아주 정확하게 움직이길 바라는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어떤 것을 갑자기 보여줘 자신을 놀래켜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그것이다" 짐작건대 전종서는 후자에 가까운 배우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지만 반드시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배우 말이다.


<버닝> <콜>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등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를 경유해왔다. 얼핏 보기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영역일 것 같은 <연애 빠진 로맨스>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버닝> <콜>은 선택이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작품에 가깝다. <콜>을 찍을 때는 그렇게 파격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재미있게 찍었다. (웃음) <콜>을 마친 후에 다음 작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바로 미국에 가서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을 촬영했지만 이 작품은 한국에서의 행보와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할 것 같다. 고민하던 시기에도 로맨스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가영 감독님 시나리오를 받고 유니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맨스지만 개성 있고 귀여웠다. 내가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결에 부합하는 것 같았다. 상대 배우가 손석구 배우라는 점도 의외성이 있어 선택하게 됐다.

자영은 전종서와 시대와 일상을 공감할만한 현실적인 캐릭터다. 전종서가 생각하는 자영은 어떤 인물이었나.

이 영화가 차기작으로 되기까지 고민이 깊었는데 막상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으니까 아주 단순해졌다. 자영에 대해서는 기존에 내가 했던 다른 캐릭터처럼 깊게 파고든다거나 여러 가지 레이어를 얹은 캐릭터를 가져가려 하는 그런 진지한 고민들을 하지 않았다. 그냥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의 그 느낌, 뭔가 발칙하고 어느 정도 파격이 있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때론 공격적인 그런 느낌을 가져가면 될 것 같았다.

우리 역의 손석구 배우와의 앙상블이 재미있다. 때로는 능청맞고 어떨 땐 순진하며 귀여운 무해한 남친의 전형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앞서 있었던 씨네플레이와의 영상 인터뷰에서 손석구 배우는 전종서 배우가 하지 말라면 안 하고 하라면 했다는 말도 기억이 난다. 손석구 배우와의 연기는 어땠나.

자영이 등장하는 장면의 반 이상이 손석구 배우와 함께다. 그래서 그 케미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손석구 배우 첫인상은 한국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뭔가 다 오픈되어 있고, 격식이 없고 모든 게 다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상대 배우를 작품에서 처음 만나면 많이 어색한데 손석구 배우와는 그런 게 없었다. 손석구 배우가 현장에서 '첫 주연 영화다'란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그래서인지 모든 면을 아주 섬세하게 신경 쓰는 것 같더라. 나는 이렇게 해보고 아니면 또 저렇게 해보는, 뭘 정해 놓고 출발하거나 계산하거나 하지 않는데 이런 부분은 나와 달랐다. 내가 '이건 하지 마, 이건 해!' 이런 적은 없다. (웃음) 그냥 오빠(손석구)가 생각했을 때 내가 '편하게 해' 이런 말들이 무언가 간단명료한 답이 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일동 웃음)

사랑은 의심과 불안, 그러면서도 확신하게 되는 이성과 감정의 부조화일지 모른다. 자영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나.

자영을 얼핏 보면 아주 개방적으로 보이는데 그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저렇게 상대를 밀어내고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며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모든 것을 터놓지 않는지, 이런 감정의 이면에 대해 조금 더 묵직한 고민을 했다. 내 실제 성격도 많이 반영된 것 같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남자 친구를 비롯해 내 친구들과 한번 관계가 맺어지면 나는 숨김 없이 전부 다 보여주는 편이다. 잘 믿기도 하고. 그런데 그러기 전까지는 많은 의심과 경계를 한다.

<연애 빠진 로맨스>의 손석구, 전종서.

많은 대화가 술자리를 통해 이뤄진다. 전종서 배우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술 취한 연기 어려움은 없었나.

술자리는 자주 가서 분위기는 잘 안다. (웃음) 다만 내가 직접 먹어보지 않았으니 술 먹는 방법을 잘 몰랐다. 다행히 정가영 감독님이 애주가시다. (웃음) 감독님이 소주 먹는 방법을 잘 알려주셨다. 한 번에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다, 텀도 좀 있어야 하고, 꺾어 마셔야 한다고. 근데 나는 그냥 물 마시듯 마신 것 같다. 영화를 보시고 술 먹는 장면에 집중하시는 분이 있다면 '쟤는 술 마실 줄 모르네'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술을 처음부터 마시지 않았나, 아니면 먹어보니 내게 안 맞던가.

술을 먹어보긴 했다. 일단 냄새가 그리 좋지 않더라. (웃음) 그리고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진다. 또 잠이 막 쏟아지고, 먹은 걸 다 뱉어내고 싶고. 술과 나는 안 맞는 것 같다.

이 영화를 가로지르는 태도는 연애와 로맨스의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변화다. 솔직하되 가볍지 않고 본능적이지만 서툴기도 한 감정들이 그렇다. 모든 사랑이란 시작의 불확실성을 확신과 이해로 바꾸는 과정일 수 있겠는데, 특별히 <연애 빠진 로맨스>가 보여주려는 사랑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 직전까지의 모습만 보여준다. 그래서 자영도 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고 끝내고 싶었다. 그 둘이 함께 걸어가며 영화의 엔딩을 맞이하지만 그 뒤에도 계속 만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영이 끝내 우리를 안 받아줄 수도 있는 거다. 이 사랑이 어떻게 될지는 받아들이는 분에 따라 다를 것 같다. 나는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상처를 받아도 또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고, 기대를 한 만큼 또 상처를 받게 되겠지만 그 영원한 굴레 속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연애 빠진 로맨스> 공민정, 전종서, 김슬기.

공민정, 김슬기 배우와 현실 친구 케미도 좋았다. 이들과의 촬영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

함께 촬영한 것은 3일 정도밖에 안 된다. 진짜 친구들의 느낌이 있어야 했다. 실제의 나는 친구들 만나서 그렇게 말을 많이 안 한다. 내 할 것 하고, 핸드폰 하다가 또 대화에 끼어들고. 이러는 게 진짜 현실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영의 친구들을 보면 성격이 다 다르고, 자기들끼리 부산스럽고 산만하게 대화하는 게 많아 나는 조금 빠져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게 정말 리얼한 친구 관계일 것 같고, 또 좀 풀이 죽어 있는 게 여기에서 내 역할일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공민정 배우와 배유람 배우는 서로 같은 대학교 동기다. 친한 두 분이 분위기를 많이 풀어주고 또 이끄시기도 했다.

정가영 감독은 남녀 간의 발칙하고 솔직한 사랑 이야기에 능한 감독이다. 정가영 감독의 작품들을 본 적이 있었는지 그것이 작품 선택에 흥미를 줬는지도 궁금하다.

정가영 감독님이 연출한 단편을 보면 다 서슴없고 가차 없는 캐릭터들을 영화로 풀어내셨는데 그게 되게 유쾌하면서도 위트가 넘쳤다. 감독님의 그런 센스가 좋다.

<연애 빠진 로맨스> 전종서.

창작에는 반드시 자신의 경험이 어느 정도 담기기 마련이다. 극중 우리의 칼럼도 연인 자영과의 일상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만일 전종서가 혼자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 같은 작품을 통해 세상에 꺼내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마침 어제 시사회를 마치고 지인과 똑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아마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 동의가 구해지지 않은 것이라면, 이게 문서화 영상화 되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싫은 것은 나를 이용한 상대방이다. 그리고 더 싫은 것은 그걸 보고 어떤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일 거다.

영화 <콜>로 2021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곧 개최될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랐고.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 토크에서 왜 관객들이 <콜>의 영숙을 좋아해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관객과 평단이 전종서 배우의 연기에 어떤 이유로 공감하는지 생각한 적이 있나.

영숙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실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영화가 공개되고 영숙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느낀 것은 관객분들이 이제 다양한 캐릭터를 관심 있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작품을 선택할 때도 이런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도 좋겠다 느꼈다.

최근 조금 지쳐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딱 그때, 부산국제영화제 즈음에 정말 좀 지쳐있었다. 최근 드라마를 약 7개월 정도 찍었다. 보통 영화 작업은 2∼3개월이면 다 끝나는데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한 작품으로 보내다 보니 뭔가 너무 반복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조금 지쳤다고 한 것 같다. 빨리 이 시스템에도 적응해야 하는데. 내가 이런 긴 작품을 안 해봐서 그런 거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해외 활동을 위한 에이전시 계약도 맺었다. 해외 활동에 대한 도전을 결심한 이유가 듣고 싶다.

해외에서 시나리오가 왔을 때 '이게 왜 왔지?' 했다. (일동 웃음)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시나리오도 재미있었다. 되게 힙하다고 할까. 그래서 하게 됐다. 앞으로 계속 외국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시간과 노력을 엄청나게 쏟아야 한다. 내가 한국에서 지내다 보니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서 그렇다. 그런 특별함이 필요하지만 그걸 감내할 만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면 꼭 하고 싶다. 그런데 작품마다 이미 다 주인이 있는 것 같더라. (웃음) 내가 아무리 이 영화, 이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뭔가 인연처럼 만나지는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나는 시작부터 그랬던 것 같고.

<종이의 집> 촬영을 마쳤다. 어떤 작품인가.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얻은 스페인 드라마의 한국 리메이크작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원작이 너무 유명하지 않나. 원작 <종이의 집>을 사랑하셨던 세계 팬분들 입장에서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다. 리메이크 작은 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요소들이 아주 많다. 가령 분단국가 같은 설정이 그렇다. 세계관이 조금 더 작지만 한국 사람으로서는 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길 수 있겠다 생각이 든다.

할리우드를 경험했고, 최근에는 영화와 다르게 현장에 밥차가 없는 (웃음) 드라마도 경험했다. 연기자 전종서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버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콜>을 했고, 또 정말 쉬지도 않고 바로 미국 가서 영화 찍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1년 정도 작품을 안 하다가 <연애 빠진 로맨스>를 했다. 미국에서 찍은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아직 개봉도 안 했고, <콜>은 촬영하고 나서 2년 정도 지나 관객을 만났다. 코로나가 있었긴 했지만 계획대로 전부 되지는 않더라. 1년 넘게 준비해오던 작품도 있었지만 갑자기 다른 작품을 선택하게 돼 버리고. 변수라는 것이 항상 많다. 그때그때 미련 갖지 않고 현명하게 선택하고 싶다.

<연애 빠진 로맨스> 손석구, 전종서.

영화 속에 나온 평양냉면집을 확인하기 위해 촬영 장소가 어디인지 눈을 크게 뜨고 봤다. 실제 평양냉면을 좋아하나. 좋아한다면 최애 냉면집은 어딘가.

냉면 정말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곳은 마포에 있다. (웃음)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