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포스터는 영화 본편보다 더 강렬히 기억에 남는다. 2019년 2020년에 이어, 영화만큼 인상적인 2021년의 영화 포스터를 선정했다.


스펜서

Spencer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2016년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미국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두 영화 <네루다>과 <재키>를 발표한 바 있다. <스펜서>는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를, 특히 왕실 생활에 대한 염증이 극심했던 1991년(이듬해 찰스 왕세자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다)에 초점을 맞춰 그린다. 결혼 전 성姓 ‘스펜서’를 내세운 영화는 남편의 외도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왕실 생활에 지쳐가던 서른 즈음의 여성 다이애나 스펜서의 내면을 파고든다. 올해의 영화 포스터를 꼽는 거의 모든 리스트에 포함된 <스펜서>의 포스터는 새까만 배경과 대비된 크림빛 드레스를 입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는 다이애나를 비스듬하게 담은 이미지가 전부다. 감정과 조형을 완벽하게 조합한 포스터.


인트로덕션

홍상수의 또 다른 전환점이라 할 만한 <인트로덕션>은 그가 직접 촬영까지 도맡아 기존의 미니멀한 제작 방식을 더 밀어붙였다. 이전 작품과는 달리 20대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부둥켜안고 한겨울 추위를 녹이는 흑백의 순간들을 품고 있는데, 하얀 도화지 위에 몸을 포갠 두 남녀를 까만 연필 하나로 그린 스케치는 <인트로덕션>의 정서와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소용돌이

Vortex

<돌이킬 수 없는> <러브> 등 내놓는 작품마다 파격을 거듭하는 감독 가스파 노에의 최신작 <소용돌이>는 치매를 앓는 아내와 함께 사는 노년의 영화학자에 초점을 맞춘다. 한 프레임에 시점을 둘로 나눈 독특한 연출로 서로 어긋나고 만나는 부부의 동선을 쫓아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와 70년대 최고의 프랑스 영화 <엄마와 창녀>의 배우 프랑수아 르브런이 연기한 부부가 가까스로 안고 있는 모습 주변에 신경질적인 낙서들이 빼곡히 채워진 포스터는 막막한 그들의 처지를 극대화한다.


플리

Flugt

Flee

작년 픽사의 <소울>과 함께 수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아온 애니메이션 <플리>는 동성 결혼을 앞둔 아민 나와비(가명)가 난민 자격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덴마크로 피신한 과거를 회상하는 다큐멘터리다.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모든 캐릭터를 가지런히 세운 포스터는 '난민'과 '동성애' 두 화두를 끌어안은 <플리>가 나와비 한 개인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걸 묵묵히 나타낸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Verdens verste menneske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원제는 '세상 최악의 인간'이다. 30세 여성 줄리는 15살 많은 그래픽노블 작가와의 연애가 시들해짐을 느끼고 있던 차에 파티에서 자기보다 어린 남자를 만난다. 제목 '세상 최악의 인간'은 주인공 줄리가 스스로를 자조하는 말. 세상 해맑은 얼굴을 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줄리/르나테 라인스베(이 역할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의 모습과 포스터 상단 가운데를 큼직하게 차지하고 있는 세상 최악의 인간이라는 제목이 상충하는 시너지 효과가 단순한 포스터에 가치를 부여한다.


베네데타

Benedetta

폴 버호벤의 신작 <베네데타>는 17세기 이탈리아 베네데타 카를리니 수녀의 실화를 영화로 옮겼다. 신이 성흔을 남겼다고 주장하면서 원장 수녀 자리에 오른 베네데타는 같이 몸담았던 수녀 바르톨레메아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영화 초반, 이제 막 수녀원에 들어온 어린 베네데타는 밤에 몰래 빠져나와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다가 그것에 깔린 채로 성모상의 가슴을 핥는다. 성모를 어머니로 여기는 진실된 태도이자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온몸을 감싼 새하얀 수녀복 사이로 슬쩍 가슴이 보이는 포스터가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거대한 자유

Große Freiheit

Great Freedom

독일 영화 <거대한 자유>는 1945년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남자 한스(프란츠 로고스키)가 25년간 복역한 여정을 풀어놓는다. 감옥에서도 그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한스는 그곳에서 종신수 빅토르와 사랑에 빠진다. 차가운 벽을 마주하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과 그 뒤통수에 열린 통로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형상이 한데 담긴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송곳니> <더 랍스터>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등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의 포스터를 전담해온 디자이너 바실리스 마르마타키스(Vasilis Marmatakis)의 작품이다.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

Summer of Soul

(...Or, When the Revolution Could Not Be Televised)

힙합 밴드 루츠의 드러머이자 프로듀서 퀘스트러브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은 1969년 뉴욕에서 열려 6주 동안 이어졌던 '할렘 컬처 페스티벌'을 재조명한다. 흑인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연이지만, 그해 겹치는 시기에 진행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밀려 역사적으로 외면 받았던 그 뜨거웠던 현장에 우리를 데려간다. 포스터는 공연 중인 B.B 킹, 맥스 로치, 마할리아 잭슨 등의 모습을 흔들리듯 포착한 모습을 프레임 가득 담은 여러 판본이 공개됐는데,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수장 슬라이 스톤(Sly Stone) 버전이 그 중 특히 역동적이다.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저예산 아트하우스 영화와 디즈니 실사 프로젝트를 가로지르는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작년에 개봉한 판타지물 가운데 가장 야심찬 비주얼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설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토대로 한 영화의 포스터는 시뻘건 배경에 영화 속 캐릭터 가웨인 경(데브 파텔), 버틸락(조엘 에저튼), 에셀(알리시아 비칸데르), 녹색 기사 등을 비스듬히, 어둡게 바라본 모습이 담겨 있다. 필자는 그 중 여우 버전을 선택했다. 아름답고 귀여워서.


페러렐 마더스

Madres paralelas

Parallel Mothers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2021년 신작 <페러렐 마더스>는 알모도바르의 오랜 디자인 파트너 후안 가티(Juan Gatti)가 아닌 처음 협업한 디자이너 하비에르 하엔(Javier Jaen)이 포스터를 만들었다. 모유가 눈물처럼 보이도록 만든 디자인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킨 티저 포스터에 이어 발표된 메인 포스터는 더욱 놀랍다. 꽉 껴안은 두 여자의 몸에 죄수복 같은 그래픽을 덧입혀 얼굴과 손을 강조한 포스터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한 날 한 병원에서 아이를 낳은 두 세대의 싱글맘이 고된 생활을 딛고 연대하는 과정을 그린 <페러렐 마더스>의 이야기를 제대로 함축했다.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언제나 '넥스트 레벨'의 미감을 뽐내는 웨스 앤더슨 감독은 <프렌치 디스패치> 포스터를 종합선물세트처럼 준비했다. 이미 2020년 초에 공개한 메인 포스터처럼 디자이너 에리카 도른(Erica Dorn)과 일러스트레이터 하비 아즈나레즈(Javi Aznarez)가 함께 작업한 프로젝트는 다섯으로 나뉘어진 각 챕터의 요소들을 빼곡이 담은 포스터, 주요 캐릭터 별 포스터, 그리고 영화 속 신문 '프렌치 디스패치'의 표지 등으로 구성됐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에도 2021년 한해에만 두 편의 신작을 발표한 리들리 스콧 감독. 지난 10월 개봉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의 포스터가 아주 인상적이다. 유서 깊은 가문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하고, 불명예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르그리트가 자크의 죄를 밝히자 장과 자크 사이에 진실을 둘러싼 결투 재판이 벌어진다. 전설적인 포스터 디자이너 솔 바스(Saul Bass)의 영향이 짙게 묻어나는 포스터는 조형과 색채 모두 지극히 단순한 가운데, 두 남자의 칼이 만나는 지점에 피해자 마르그리트의 위태로움이 나타나는 형상으로 영화의 테마를 완전히 전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등 MCU 작품, <겨울왕국 2> 등 디즈니/픽사 작품의 그래픽을 담당한 '리전'(Legion)의 작품.


신의 손

È stata la mano di Dio

The Hand of God

당대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신의 손>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17세 소년인 주인공 파비에토의 성장기가 중심이지만 영화 초반은 파비에토가 아닌 그가 매혹된 이모 파트리치아가 어느 날 밤 처음 만난 이에게 이끌려 어느 집에서 어린 수도승을 만나는 과정에 할애된다. 폐허가 된 집 한가운데 거대한 샹들리에가 떨어져 있고 그 앞에 여인이 홀린 듯 서 있는 <신의 손>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바로 그 신을 포착한 것이다.


리코리쉬 피자

Licorice Pizza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부기 나이트>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이어 70년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설정했다. 밴드 하임의 멤버 알라나 하임과 앤더슨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아들 쿠퍼 호프먼이 연기한 두 청춘 알라나와 게리의 로맨스를 보여주면서 70년대 할리우드 영화계 또한 조명한다. 그야말로 70년대에 바치는 영화답게, 포스터 역시 대번에 당시 유행했던 화풍이 떠오르는 일러스트로 그린 등장인물들로 채워졌다. 하와이 특유의 엑조틱한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캣 리더(Kat Reeder)가 아트워크를 담당했다.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რას ვხედავთ როდესაც ცას ვუყურებთ?

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

조지아 출신의 감독 알렉산드레 코베리체의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는 눈 밝은 평자들의 2021년 베스트 리스트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었던 작품 중 하나다. 두 주인공 리사와 조르지가 첫눈에 서로를 사랑하고 그 관계가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무심한 듯 펼치는 영화의 포스터는, 조금 전 마주친 리사와 조르지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직전 찰나를 중앙에 두고, 그 위 아래에 별 특별해 보이지 않은 영어 제목과 동글동글 신비로운 조지아어 제목을 배치했다. 하늘은커녕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주변 배경은 하늘색인 것도 흥미롭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