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과 거장의 만남은 영화팬이라면 기대할 수밖에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이 데이빗 린치 감독과 접촉했다는 뉴스 또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설명 그것이 배우로서 린치를 캐스팅한 것이라도 말이다. 스필버그는 차기작이자 자전적 영화 <더 파벨만스>에 데이빗 린치를 배우로 캐스팅했다. 이미 자신의 드라마 <트윈 픽스>에서 훌륭한 존재감을 남긴 린치처럼, 몇몇 감독들은 연출만큼 특출난 연기로 진한 잔상을 남기곤 했다. 감독이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연기를 펼친 사례들을 모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황혼에서 새벽까지>
현재 기준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쿠엔틴 타란티노란 슈퍼스타 감독을 주인공으로 기용한 사람은 그의 절친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다. 사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타란티노가 썼으니, 타란티노가 로드리게즈를 기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탈옥한 범죄자 게코 형제가 하필 뱀파이어들의 핫플레이스인 술집에 발을 들여 새벽까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동생 리치 게코를 맡아 무슨 한풀이라도 하듯 미치광이(!) 범죄자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존 휴스턴 <차이나타운>
이 분야에서 가장 정점을 찍은 감독이라면 존 휴스턴 감독일 것이다. <말타의 매>,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 <백경>, <승리의 탈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준 높은 작품을 내놓은 거장 존 휴스턴은 아버지 월터 휴스턴처럼 배우로서도 활동이 많았다. (유아 시절부터 무대에 섰으니까.) 그런 그가 연기한 가장 유명한 캐릭터는 <차이나타운>의 노아 크로스. 데뷔작 <말타의 매>로 필름누아르의 한 페이지를 쓴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의 필름누아르에서 역대급 캐릭터를 맡았으니 연기력에 상징성까지 완벽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해소되지 않고 막을 내리는 이 필름누아르에서 거장의 존재감은 최고였다.
프랑소와 트뤼포 <미지와의 조우>
스필버그의 감독 캐스팅은 린치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77년 <미지와의 조우>에서 과학자 클로드 라콤 역에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을 캐스팅한 전적이 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었을 영화광들은 얼마나 신기했을까. 할리우드의 총아와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의 만남이라니! 트뤼포는 가끔 영화에 얼굴을 비치긴 했어도 프랑스에서 제작하는(대부분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들뿐이었다. 그런데 할리우드의 SF영화에서 주연이라니. 물론 <미지와의 조우>는 할리우드 SF 영화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었으니 트뤼포가 출연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필름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트뤼포와 미지의 것을 밝혀내리라 분투하는 라콤, 서로 닮은꼴인지도 모르겠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투 다이 포>, <심야의 공포>
요즘 세대에게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배우로서의 얼굴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소위 세계3대 SF 작품 가운데 하나인 <스타 트렉>의 최신 드라마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에서 스타플릿 요원 코비크로 출연하고 있기 때문. 감독으로선 2014년 <맵 투 더 스타> 이후 단편 말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는데(이제야 차기작 <크라임스 오브 더 퓨처>가 후반 작업 중이다) 배우로선 드라마 <슬래셔>, <앨리아스 그레이스> 등에 출연하고 있으니 말이다. 잘생긴 외모와 어딘가 모호한 분위기 때문인지 과거에도 크로넨버그는 분량은 적어도 인상적인 캐릭터로 선택받곤 했다. 대표적으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투 다이 포>에서 스토리를 정점을 찍는 인물로 크로넨버그를 출연시켰다. 호러 소설의 거성 클라이브 바커 또한 자신의 연출작 <심야의 공포>에서 크로넨버그를 주연으로 내세웠다.
시드니 폴락 <아이즈 와이드 셧>
<콘돌>, <투씨>,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을 연출한 감독 시드니 폴락 감독은 본래 배우 출신이다. 연극 무대에서 일하던 그는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을 만나 연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다 연출 쪽에 좀 더 힘을 주면서 나중에는 배우보단 감독으로서 명성을 다진 케이스. 그래서 은근히 출연작이 적지 않은데, 그중에도 단연 빛나는 건 <아이즈 와이드 셧>일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이 된 이 영화에서 시드니 폴락은 빅터 지글러로 출연했다. 본래 이 캐릭터는 하비 케이틀이 촬영했으나 재촬영에 불참하게 되면서 시드니 폴락이 ‘땜빵’을 한 것. 그러나 큐브릭의 완벽주의를 입증하듯, 시드니 폴락은 빅터 지글러란 인물로 <아이즈 와이드 셧>의 모호한 분위기를 한층 부각시켰다. 이외에도 시드니 폴락이 제작으로도 참여한 <마이클 클레이튼>에서도 그의 날 선 연기를 볼 수 있다.
존 카사베츠 <악마의 씨>
시드니 폴락과 마찬가지로, 배우로 시작해 지금은 감독으로 더 유명한 사람은 존 카사베츠다. 출연작과 연출작 수가 비등비등한 시드니 폴락과 달리 존 카사베츠는 출연작이 압도적으로 많다. 다만 그럼에도 그가 지금껏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배우 활동으로 마련한 자신의 사비를 들여 영화를 만들면서 독립 영화의 영역을 넓혔기 때문. 그렇게 현재 독립 영화의 거장으로 남았기에 아트하우스나 예술영화관에서 특별전으로 그의 작품을 만났던 관객이라면 놀랄 만한 출연작이 적잖게 있다. <킬러>, <더티 더즌> 같은 장르물과 <악마의 씨>, <분노의 악령> 같은 호러 영화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마틴 스콜세지 <퀴즈 쇼>
미국 영화의 젊은 피에서 할리우드의 최고참까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등장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화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거장이다. 나이가 들어도 다소 장난기 있는 얼굴과 특유의 검은 뿔테 안경은 마틴 스콜세지라는 감독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 그만의 리드미컬한 어조 또한 그렇다. 그래서 마틴 스콜세지가 <퀴즈 쇼>에서 마틴 리튼홈을 연기했을 때 딕 굿윈(롭 모로)와 ‘밀당’하는 장면은 쏠쏠한 볼 재미를 선사한다. 이 영화를 연출한 건 로버트 레드포드. 명배우가 명감독을 배우로 캐스팅한 것인데, 그 선택은 유효했다. <퀴즈 쇼>에서 좀 더 난이도를 높여보고 싶다면 <꿈>(1990)을 보며 마틴 스콜세지를 찾아보자. 구로사와 아키라와 혼다 이시로는 마틴 스콜세지를 어떤 인물로 캐스팅했을까. 붉은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