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

니콜라스 케이지의 지난 20여 년을 돌아보려 한다. 2월 23일 개봉한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피그>라는 작품이 계기가 됐다. <피그>는 오랜만에 케이지가 연기한 진지한(?) 영화다. 케이지의 최근 필모그래피는 중구난방처럼 보인다. 작가주의 영화, 독립영화, 애니메이션, 상업영화, B급 영화가 혼재돼 있다. 전성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난 것 같다. 200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의 출연작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 5편을 골라봤다. 이 작품들을 통해 한때 할리우드를 대표한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던 그의 연기 인생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가늠해보자.


<맨디>(2018)

<맨디>

<맨디>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일까. <맨디>는 저예산 슬래셔 장르의 영화로 분류될 것이다. 아주 수위가 높은 폭력성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사람의 뼈와 살이 분리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일단 대부분의 관객은 관람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비위가 좋은 편인 저예산 컬트 영화에 열광하는 일부 관객만이 이 영화를 선택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아마도 대다수는 높은 평점을 주기 어려울 것 같다. 이유는 이 영화가 아주 형식적인 미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맨디>는 1980년대 숲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던 레드(니콜라스 케이지)가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아내 맨디(안드레아 라이즈보로)가 납치당하고 살해당하자 복수하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이 플롯은 형식을 보여주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과거 1970~80년대 이탈리아의 B급 호러 영화나 미국의 슬래셔 무비의 오마주에 가깝다. 그마저도 실험적인 성향의 감독인 파노스 코스마토스는 장르적 쾌감에 기반한 연출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대신 느린 호흡과 영화 자체가 마약에 취한 것 같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가 <맨디>를 지배한다. 이제 이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예산 컬터 무비에 열광하는 호러 장르의 골수팬과 평론가 집단이 그들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돼서 화제가 됐고, 국내에서는 장르 팬들의 축제인 부천국제판스타틱영화제에 초청됐다. 이런 마이너한 취향의 영화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했다. 그런데 피칠갑을 한 그의 얼굴은 이 작품에 기가 막히게 잘 녹아든다.


<조>(2013)

<조>

<조>는 <머드>라는 작품과 비교된다. 공통분모는 배우 타이 쉐리던이다. <머드>의 쉐리던이 연기한 소년 엘리스는 살인을 저지르고 이름 모를 섬에 숨어 사는 신세인 머드(매튜 매커너히)에 의지한다. <조>에서 쉐리던이 연기한 소년 게리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과거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전과도 있는 조(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두 영화를 단순히 비교해보자면 매튜 매커너히의 자리와 니콜라스 케이지의 자리가 동일하다. 그렇다면 두 배우의 연기를 비교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머드>에 비해 <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케이지의 팬이라면 이 영화를 분명 소중히 여길 것이 틀림없다. 데이비드 고든 그린 감독은 알코올 중독자라는 전력, 그 자신도 폭력적인 성향의 삶을 살았던 조가 게리를 만나며 변해가는 과정을 진득하게 보여준다. 그린 감독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게리가 아니라 조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런 만큼 케이지가 보여주는 연기의 힘이 이 영화의 주요 동력이다. <조>를 보면 새삼 깨닫게 된다. 케이지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것 말이다. 이 영화 전후에 제작된 온갖 쓰레기 같은 영화에서 흔히 하는 말로 재능을 낭비하던 케이지도 제대로 된 작품을 만나면 우리가 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조>는 그의 팬들에게 더욱 소중한 작품이다.


<고스트 라이더>(2007)

<고스트 라이더>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고스트 라이더>는 마블 코믹스 원작의 영화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에 속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제대로 된 코믹스 원작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스트 라이더>는 혹평에 시달린 영화다. 그럼에도 <고스트 라이더>는 속편이 나왔다. 속편이 가능한 이유는 조니 블레이즈/고스트 라이더라는 캐릭터 자체는 흥미롭기 때문일 것이다. 조니 블레이즈는 세계 최고의 모터사이클 스턴트 챔피언이다. 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피터 폰다)에게 영혼을 팔아넘기고 고스트 라이더로 변한다. 고스트 라이더는 중세 유령 기사를 모티브로 탄생한 캐릭터다. 중세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며 악마의 명을 받고 타락한 영혼을 쫓는 사냥꾼이었다. <고스트 라이더>에서는 말 대신 바이크를 타고 다닌다. 속편에 해당하는 <고스트 라이더 3D: 복수의 화신>은 엄밀히 말해 1편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영화가 아니어서 속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내 수입사에 3D라는 문구를 제목에 집어넣었는데 화염에 휩싸인 해골이라는 고스트 라이더의 비주얼이 불만하다고 관객을 유혹하려는 수작이다. 수작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하겠지만 속편은 전작의 형편없는 평가보다 더 참혹한 평가를 얻어야만 했다. 로튼토마토지수를 기준으로 한다면 1편은 26%, 2편은 18%를 기록 중이다. 문득 <존 윅> 시리즈로 여전히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가 떠오른다. <고스트 라이더> 시리즈가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케이지도 리브스와 비슷한 행보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참고로 케이지가 연기한 캐릭터와 별도로 가브리엘 루나가 연기한 고스트 라이더가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작품인 <에이전트 오브 쉴드>에 등장한 적이 있다.


<내셔널 트레져>(2004)

<내셔널 트레져>

벤자민(니콜라스 케이지)은 21세기의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였다. <내셔널 트레져>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벤자민은 3대째 미국 건국 초기 대통령이 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을 쫓고 있는 가문에 속한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인디와 벤, 두 캐릭터는 닮았다. 템플러 기사단과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 결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내셔널 트레져>는 <다빈치 코드>의 영향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사실 중요한 건 아니다. 어쩌면 <내셔널 트레져>는 제리 브룩하이머라는 제작자의 이름이 더 중요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봉 당시 <내셔널 트레져>의 포스터에는 <캐리비안의 해적> 제작진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고고학 혹은 음모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국보(National Treasure) 찾기 영화인 <내셔널 트레져>는 결과적으로 꽤 흥행했고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다. 1편의 감독 존 타틀타웁과 출연진은 2편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에도 참여했다. 2편은 링컨 대통령의 암살을 소재로 삼고 내셔널이 아닌 인터내셔널한 스케일을 보여줬다. 2편 역시 1편과 비슷한 평가를 받았고 흥행했다. 이제 3편이 나올 차례인데 <캐리비안이 해적>처럼 프랜차이즈가 곧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편이 개봉한 2007년 이후 15년이 흐른 2022년까지 3편은 나오지 않았지만 몇 년 전부터 3편 제작 소식이 꾸준히 들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관객에게 케이지는 아마 <내셔널 트레져>의 벤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3편이 개봉하면 그들에게 선물이 될 듯하다.


<어댑테이션>(2002)

<어댑테이션>

“니콜라스 케이지의 1인 2역은 솜씨 좋은 원맨 밴드의 레코딩 같은 만족감을 안기고 메릴 스트립은 유례없이 귀여운 마약 중독의 징후를 보여준다.” <어댑테이션>이 국내에 개봉한 2003년 김혜리 기자가 쓴 리뷰에 한 대목을 가져와 봤다. 이 리뷰에서 케이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저 문장뿐인 듯하다. <어댑테이션>에서 케이지가 연기한 인물은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시나리오 작가다. 카우프만은 실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카우프만은 사실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쌍둥이가 아니다. 쌍둥이 동생은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실제와 가상의 이야기가 혼재한 이 영화의 리뷰는 주로 각본가 카우프만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다. 결국 <어댑테이션>은 그 제목처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난초도둑>이라는 논픽션의 영화화를 위한 각색(Adaptation) 과정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카우프만의 의식 속에 있는 것 같은 영화다. 퍼뜩 이해하기 어려운 시놉시스처럼 보이는데 실제 이 영화가 그렇다. 김혜리 기자는 비록 케이지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건 단지 이 영화가 카우프만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케이지의 1인 2역 연기, 솜씨 좋은 원맨 밴드의 레코딩이 없었다면, <어댑테이션>처럼 이색적인 콘셉트의 영화는 불가능하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