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사실 트럼프의 집권은 중간결과였지 원인이 아니었다. 아무리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도, 소수인종 우대정책이 정책적으로 지지를 받아도, 인종차별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미국 각지에서 경찰들은 흑인들을 과잉 진압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은 후보군을 백인들로 채웠으며, 폭스뉴스는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출생을 미국에서 한 게 아닐 것’이라는 루머를 제기했다. 각각 치안과 범죄율의 문제, 작품성의 문제, 권력을 견제하는 언론의 역할과 표현의 자유 문제 따위로 옹호되어 은근슬쩍 넘어갔던 인종차별의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그랬으니, 오바마를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고도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을 극복하지 못한 거겠지. 데이비드 듀크가 여전히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오바마가 재선이 아니라 3선, 4선을 했다 하더라도, 미국인의 일상이 바뀌지 않았으면 샬롯츠빌의 참극은 어김없이 벌어졌겠지.
<블랙클랜스맨>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며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손톱을 물어뜯는다. 역사는 전진하고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만, 사회가 역진 불가능한 진보를 이루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을 뽑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일 것이다. 70년대 말 FBI의 수사를 통해 KKK를 박살내고도, 두 차례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를 뽑고도, 미국은 일상 속에 녹아든 인종차별을 극복하지 못해 다시 차별과 혐오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 한, 누구를 뽑아도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