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는 치열한 건달의 이야기다. 이들을 뜨겁게 만드는 건 명분이 아닌 생존, 즉 먹고사는 문제다. 영화는 ‘범죄와의 전쟁’으로 조직폭력배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 1993년, 부산 변두리 포구 구암을 배경으로 한다. 일거리, 돈, 인력 등 모든 것이 손영감(김갑수)의 만리장 호텔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곳에 점차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성인 오락실이나 보드카 공급 같은 새로운 사업이 밀려 들어와 큰돈을 좇는 이들을 유혹하며, 도시의 거대조직 영도파가 손영감의 항구를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주인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전쟁과 그 주변의 각개전투는 여지없이 피를 부른다. 한번 시작된 지각변동은 구암의 질서가 뒤집어질 때까지 멈출 줄 모른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 만리장 호텔의 중간 관리자 박희수(정우)가 있다. 건달 생활을 하며 손영감의 궂은일을 도맡다 보니 어느새 마흔이 된 그는 그저 평범한 미래를 꿈꾸다가 이 싸움의 심장부에 서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희수를 특징짓는 건 그의 야망이나 동기가 아니라 구체적 행동이다. 특히 그는 유능한 실무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호텔은 물론 동네의 잡음까지 알아서 처리하는 게 그의 몫. 마약 장사하는 용강(최무성)을 구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애쓰는 일련의 시퀀스는 ‘구암의 에이스’라는 희수의 뛰어난 수완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희수가 이런 생활을 이제 그만 정리하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그는 긴 세월 아버지나 다름없이 모시던 손영감을 떠나 전자오락기 사업에 뛰어든다.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던 인숙(윤지혜)과 살림도 차린다. 제 손으로 운명을 바꾸는 여느 주인공의 행보처럼 보이지만, 실은 크고 작은 물결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모양새에 더 가깝다. 그는 기민하지만 매번 한발씩 늦고, 눈앞의 사건 뒤에 도사리는 음모에 관해서는 놀라울 만큼 무지하다. 거기까지가 애초에 그가 감당해야 할 삶의 크기였을 것이다. 희수는 점점 더 많은 피를 보며 너무 멀리까지 나아간다.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파도 앞에 내던져진 자가 이를 곳은 용강의 말처럼 정말로 밑바닥 혹은 왕좌뿐인지도 모른다.
희수의 오랜 친구이자 영도파의 조직원 철진(지승현), 자타가 공인하는 미친개 용강, 줄곧 안전 주의 노선을 택하는 손영감, 쓸쓸한 얼굴의 인숙과 그녀의 아들이자 건달계의 자라나는 새싹 아미(이홍내)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희수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영화는 맥락을 서술하거나 인물의 동기를 설득해내려는 의지 없이 그저 휘몰아치는 상황 한가운데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내용의 함축이 다소 과한 탓에 군데군데 궁금증이 남고, 인물의 대사와 결단이 뜬금없게 느껴지는 대목도 더러 있다. 대신 한평생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이들의 강렬한 얼굴과 부두, 공장, 호텔 등 생생한 삶의 현장을 완충제 없이 정면에서 마주한다. 1993년이라는 구체적 시간을 조건으로 삼고 있으나 개인의 행동을 시대에 빗대 손쉽게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은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유사 영화들과의 차이점이다. 여기서 인물 행동의 한계치를 정하는 건 오히려 장르 자체다. 배반과 복수로 점철된 세계의 그들이 그러하듯이, <뜨거운 피>의 인물들 또한 어딘지 무기력해 보인다.
<뜨거운 피>는 <고래>(2004)와 <고령화 가족>(2010)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천명관의 감독 데뷔작이다. 동료작가 김언수의 동명 소설을 감독이 직접 각색했으며, 가상의 지명인 구암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설정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사회와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생계를 위해 분투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뜨거운 피>는 천명관의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2012),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2016) 등과 궤를 함께 한다. 한편, 건달을 앞세운 누아르는 천명관이 영화 연출을 준비하며 줄곧 몰두해온 소재이기도 하다. <뜨거운 피>는 인물의 자의식이 분출될 충분한 여지를 억누르면서, 장르의 규칙 안에서 고군분투하며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말하자면 기본을 지킨 셈인데, 이러한 방법이 여전히 유효한가는 끝내 질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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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 기자